운명을 마주하는 발걸음 (6)

사도 샤비트

by 이샤라

칠흑 같은 밤.


안식 교회를 빠져나온 사도 카브르와 추적자들은 한 줄기 등불 없이 어둠 속을 내달리고 있었다. 그들이 지나온 자리에는 푸른 생명의 기운은 이미 자취를 감춘 지 오래였다. 썩은 장기와 독기로 뒤덮인 대지 위로는 죽은 생물의 뼈와 기이하게 일그러진 균열이 가득했고, 여기저기 무너진 폐허는 음습한 냉기와 이질적인 부패가 덕지덕지 들러붙어 있었다.


한 발, 또 한 발 옮길수록 공기는 무거워졌다. 들숨조차 멈칫하게 만드는 냄새에 추적자들 일부는 헝클어진 망토 자락으로 코를 틀어막은 채 낮게 웅얼거렸다.


"......젠장, 폐가 썩을 것 같아."


"이 망할 독기...... 도대체 어디서 퍼져 나온 거야?"


몸을 움츠린 추적자들의 눈에는 불안한 떨림이 서려 있었다. 어디선가 바람도 없는 공간을 스치는 소름이 등을 타고 내려오는 가운데, 선두에 선 카브르는 잘려나간 왼팔을 부여잡은 채 거친 숨을 토해냈다. 핏물이 배어 나온 소매 아래로 느껴지는 허전함은 단순한 고통이 아니었다. 그것은 자신의 계획이 틀어졌다는 명백한 증거이자 씻을 수 없는 수치였다. 분노로 뒤덮인 눈동자에는 아직도 전장의 기억이 생생하게 되살아나고 있었다.


'그 기운... 대체 뭐였지?'


교회의 무녀를 납치하려던 계획은 원래 완벽해야 했다. 남은 무녀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는 상황에서 그런 실패는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나타난 정체불명의 기사가 모든 걸 망쳐버렸다.


처음부터 이상했다. 단순히 강한 자가 아니었다. 놈의 검이 자신의 팔을 베어내는 순간, 카브르는 기사가 다루던 힘이 지금껏 한 번도 접해본 적 없는 결의 것이란 것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그건 신성도, 마력도 아니었다. 이질적이면서도 찬란했고, 본능적으로 위협적이었다. 마치 세상에서 잊혀진 깊은 원류에서 끌어올린 순수한 힘 같았다.


'드물게 대지의 힘을 가진 자들 중에도 저 정도의 기운은 없었다. 언령... 설마, 그 기사가......?'


이를 악물고 달리던 카브르는 마침내 목적지에 도달했다. 앞을 가로막은 거대한 바위 벽 앞에서 멈춰 선 카브르는 피에 젖은 팔에서 손가락을 떼어내며 고통을 참는 듯한 얼굴로 허공에 복잡한 기호를 그렸다. 그의 입술 사이로는 낮고 이상한 발음의 언어가 속삭임처럼 흘러나왔다.


잠시 후, 땅이 진동하며 굉음이 울렸다. 바위는 거대한 맥동을 일으키며 살아 있는 듯 흔들리더니 중앙에서부터 긴 균열과 함께 서서히 갈라졌다.


틈 너머로 드러난 공간은 칠흑 같은 어둠과 냉기로 가득 차 있었다. 내부는 인위적으로 깎아낸 듯한 석실이었다. 중앙에는 매끄럽게 정제된 검은 돌 탁자가 놓여 있었고, 위로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액체가 담긴 수십 개의 용기들이 가지런히 정렬돼 있었다. 액체가 부글부글 끓어오르며 내뿜는 증기는 마치 생명체처럼 꿈틀거리며 천천히 흩어졌다.


크라인은 그 틈을 지나면서 익숙하고도 싸늘하게 흘러내리는 위화감을 느꼈다. 코를 찌르는 독기의 악취와 방금 전까지 자신들이 지나온 부패의 땅. 그 시작이 바로 이곳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 수많은 증기가 쏟아져 나오는 탁자 앞에는 한 남자가 서 있었다.


또 다른 사도, 샤비트였다. 그는 가느다랗고 길게 뻗은 손가락을 드러낸 채, 검은 액체를 제조하듯 다루면서 물끄러미 카브르를 내려다보았다.


"...무녀를 잡아오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팔까지 날아갔군.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샤비트의 목소리는 조용했지만, 조소와 실망이 짙게 밴 음성이었다.


"대지의 힘을 다루는 기사가 있었습니다. 놈은 지금껏 겪어본 자들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생소한 힘이었습니다."


"......엘나 본연의 힘을 다루는 기사라는 말인가."


샤비트의 눈이 가늘게 좁혀졌다.


"언령의 예언이 허언이 아니었군."


샤비트는 천천히 손을 뻗어 돌 탁자 위에 놓인 검은 액체가 담긴 용기 하나를 집어 들었다. 손끝이 용기의 표면을 휘감자 액체는 기화되어 뿌연 연기가 되었고, 살아 있는 것처럼 손짓에 따라 공중을 일렁이며 움직였다. 그 연기를 조심스럽게 카브르의 잘린 팔 쪽으로 가져가자 연기가 상처에 닿으면서 낮은 신음이 새어 나왔다. 피부와 근육, 뼈의 조직이 기계음 같은 파열 속에서 재구성되면서 연기는 소름 끼칠 정도로 정교하게 팔을 짜 맞추듯 흘러들어 갔다.


카브르는 이를 악물고 버텼다. 온몸이 경련을 일으켰지만, 마침내 고통이 가신 후 그의 입가엔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크라인의 얼굴은 하얗게 질렸다. 눈앞에서 펼쳐진 불가사의한 장면은 자신이 알고 있는 상식을 철저히 무너뜨리고 있었다.


"계획이 틀어졌다고 해도 멈출 수는 없다. 무녀는 반드시 필요하다."


치료를 샤비트는 새로운 팔을 움직이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은채 고개를 끄덕이는 카브르를 향해 냉정하게 덧붙였다.


"두 번의 실수는 없다. 다음 실패는 그분께서 용납하지 않으실 것이다. 반드시 무녀를 확보해라. 그리고... 그 기사에 대해서도 알아봐라. 언령이 말하는 엘나 본연의 힘을 다루는 존재가 맞다면 단순한 걸림돌이 아닐 것이다."


"......명심하겠습니다. 모든 것은 그분의 뜻대로."


카브르가 고개를 깊이 숙인 채 조용히 바위문 밖으로 나서자, 크라인 또한 서둘러 그의 뒤를 따라 나가려 움직였다. 하지만 그는 살기 어린 기척에 얼어붙었다. 샤비트의 시선이 등 뒤에서 크라인을 꿰뚫고 있었기 때문이다. 검은 아우라가 순간적으로 퍼지면서 크라인의 몸을 공중으로 들어 올렸다. 아우라는 진흙처럼 질척이면서 촉수처럼 길게 뻗었고, 점점 그의 몸을 감아 조이기 시작하면서 찢어내듯이 살갗을 도려냈다. 비명을 지르고 싶어도 공포에 질린 크라인은 몸을 제대로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몸을 감싸는 기운은 생물 같았고, 마치 살아 있는 촉수가 천천히 자신의 살을 '씹어' 넘기는 듯한 감각이 온몸을 휘감았다.


‘미친놈이다...! 내... 내가 이런 놈 밑에 붙어 있었다고!?'


크라인은 생전 처음 겪는 공포에 압도당했다. 경련처럼 일렁이는 그 감각 속에서 처음으로 '죽고 싶지 않다'는 본능에 잠식되었다. 샤비트는 그런 크라인을 벌레 보듯 바라보면서 음산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네놈들이 똑바로 처리했더라면 이런 일도 없었겠지. 주어진 위치에서 제 몫을 다하지 못한 놈들은 언제든 갈아치우면 그만이다."


"시, 실수하지 않겠습니다...! 제발... 목숨만은......!"


"당장 사라져라."


샤비트는 손을 내리치듯 아우라를 휘둘러 크라인을 내동댕이쳤다. 피와 땀으로 범벅된 채 바닥을 굴러 떨어진 크라인은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킨 뒤 숨을 몰아쉬며 황급히 자리를 빠져나갔다.


어둠 속에 홀로 남은 샤비트는 조용히 허리춤에서 작은 증표 하나를 꺼냈다. 초승달 안에 해가 떠오르는 형상의 그 증표는, 한때는 푸르게 빛났을지 모르나 이제는 금이 가고 빛을 잃은 채로 남아 있었다.


샤비트는 그것을 손안에 감싸 쥐며 중얼거렸다.


"......5년 만에 나타났군."




안식 교회를 떠난 지 이틀째.


동쪽으로 뻗은 길은 적막했지만 그 적막마저 따스한 봄날처럼 평화로웠다. 길가에 펼쳐진 들판은 바람에 실려 잔잔한 물결처럼 흔들리는 풀로 가득했다. 아지랑이처럼 일렁이는 지평선 너머에서는 잔잔한 바람이 스쳤고, 그 위로 맑게 퍼진 새소리가 멀리서 날아왔다.


하지만 시즈는 이 땅에 들어선 순간부터 공기 중에 스며 있는 미묘한 위화감을 느끼고 있었다. 부패의 독기와는 다른 무겁고 서늘하면서도 어딘가 깊은 생명력이 깃든 듯한 이질적인 기운. 마치 거대한 존재가 숨 쉬며 내뿜는 기척 같기도, 오래된 숲의 정령들이 속삭이는 소리 같기도 했다. 남쪽 대륙이 사람의 발길이 드물다는 이유가 어쩌면 이것 때문일까.


그럼에도, 시즈는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바람이 옷자락을 부드럽게 쓸고 지나가는 것을 느끼며 잠시 눈을 감았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안식 교회에서 겪었던 피비린내 나는 기억조차 잠시 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시원하면서도 부드러운 공기가 뺨을 스치자 가만히 숨을 들이마셨다. 곱게 다져진 흙과 풀의 향이 전해졌고, 그녀는 이토록 평화로운 풍경이 아직 남아 있다는 사실에 마음 깊은 곳에서 안도감을 느꼈다.


시즈는 남쪽 대륙의 일부가 여전히 이처럼 자연의 평화를 간직하고 있다는 사실에 감탄하면서도, 문득 도서관에서 읽은 오래된 책의 내용을 떠올렸다.


...까마득히 먼 옛날, 신들이 방랑 끝에 안개의 땅에 당도했을 당시의 이곳은 용과 거인의 세계였다. 태초의 바다를 건너온 신들은 이 땅 위에 문명을 세우려 했고, 이를 거부한 용과 거인들은 동맹을 맺어 그들과 격렬한 전쟁을 벌였다. 그러나 전쟁의 끝은 배신과 분열이었다. 일부 용과 거인들이 신들에게 동조해 전세가 뒤집히자 결국 신들이 승리하며 세계의 주인이 되었다. 전쟁에서 패한 거인들은 북쪽으로 추방을, 용들은 멸족했다. 그 후, 신들은 새로운 문명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사자'라고 불리던 존재들에게 손길을 내밀었다. 수인의 조상이었던 사자들은 신들과 함께 문명을 건설하는 것에 큰 도움을 주었고, 그것을 토대로 번영을 누린 그들에게 있어 크나큰 영광이었다. 하지만 끝을 모르는 강경파 신들의 욕망으로 인해 사자들을 파멸의 길로 이끌었다. 엘나가 파괴되면서 생명의 거인들은 모두 죽임을 당했고, 오직 '엘라마'라 불리던 거인 하나만이 남쪽으로 도망쳐 행방불명되었다고 전해진다. 오늘날, 남쪽의 ‘엘라리모스’라는 이름은 바로 그 거인의 이름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시즈는 말을 타고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마음속에 그 내용을 되새겼다. 이 땅에 감도는 기묘한 기운과 전설 속 거인의 이야기가 혹시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닐까. 마지막까지 생명을 지키려 했던 거인의 이야기가 이렇게도 고요하고 아름다운 풍경 위로 남아 있다는 것이 그저 전설만은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이 풍경이 오래도록 변하지 않기를, 누구에게도 짓밟히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다.


하지만 그런 평화로운 마음 한편에 자리 잡은 근심은 시즈의 시선을 앞서 걷는 무명의 기사로 돌리게 했다. 이틀을 함께했지만 주고받은 말은 고작해야 아침의 인사와 잠들기 전 밤의 인사, 단 두 마디였다. 시즈는 처음에는 그 침묵을 불편하게 여기지 않으려 애썼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의 과묵함은 단순한 성격이 아닌 어떤 단단한 벽처럼 느껴졌다. 자신을 좀처럼 열지 않는 그의 모습에, 시즈는 몇 번이나 말을 걸려다 주저했다.


말을 꺼낼 타이밍을 재다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침묵만 따라가게 된 것이다.


그러나 더는 이 조용한 여정을 견디기 힘들 것 같았던 시즈는 용기를 내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런데, 귀공의 존함은 무엇인가요? 여지껏 모르고 있었습니다."


기사는 고개를 돌리지도 않은 채 짧게 답했다.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죄송합니다."


시즈는 순간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한 채 고개를 숙였고, 말 위에서 자신의 발등만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말을 꺼내기까지 그렇게 망설였으면서, 고작 묻는 질문이 이름이라니. 괜히 무뚝뚝한 그를 탓하려 했던 자신이 부끄러웠다. 왜 지금까지 이런 기본적인 것조차 묻지 않았을까. 자신이 얼마나 어색하게 말을 꺼냈는지, 되뇔수록 얼굴이 더 뜨거워졌다. 시즈는 황급히 얼굴을 돌려 주변 풍경을 바라보며 내심 어색함을 감추려 애썼다. 기사를 탓할 게 아니었다. 그녀 역시 지금껏 상대에 대해 알려고 하지 않았기에 조금만 더 일찍 용기를 냈다면 상황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기사의 대답은 여전히 머릿속을 맴돌았다. 이름조차 기억나지 않는다는 말은 그가 안식 교회에서 말했던 공허함의 연장선일 터였다. 자신이 누구였는지, 어디서 왔는지도 모른 채 이 낯선 세상에 버려진 사람. 정체성을 잃고 기억할 이름 하나 없이 살아간다는 것. 그 말속에 담긴 외로움과 상실감을 떠올리며 안타까움을 느낀 시즈는 그저 스쳐 가는 동행뿐만이 아닌 그가 품고 있는 공허함까지 이해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이상적인 감정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있었다. 앞으로 마주칠 사람들에게 이 사람을 뭐라고 소개해야 할까. 심지어 말수도 적은 데다, 인상부터가 냉담하고 무거워 보이는 이 남자가... 과연 사람들과 제대로 어울릴 수나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대로 넘어가고 싶지는 않았던 시즈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다시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귀공은 불리고 싶은 이름이 있으신가요?"


기사는 이번에도 고개를 돌리지도 않은 채 짧게 대답했다.


"생각해 본 적은 없습니다."


"...그렇군요."


'역시나...'


시즈는 마음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괜히 혼자만 진지하게 고민한 것 같아 어딘지 민망한 기분이었다. 기사는 여전히 무표정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어떻게 불리든 상관없습니다.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무렇지 않다는 듯한 말투였지만 담담함 너머 어딘가에는 여전히 깊이 가라앉은 고독이 스쳐 지나갔다. 이대로 그냥 흘려보내고 싶지는 않았던 시즈는 다시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 문득 무언가 떠오른 듯, 그녀의 시선이 천천히 기사의 손에 들린 등불로 향했다.


"귀공께서 지닌 그 등불은... 안식 교회에서 환시를 보여주는 힘을 지녔죠. 늘 그 빛을 품고 계시니, '환시를 품은 이'를 뜻하는 '아로스'라는 이름은 어떠신가요?"


기사는 말 위에서 조용히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속도도 줄이지 않았고, 고개를 돌려보지도 않았다. 투구 속 어둠 아래에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할 수 없었지만 잠시 후 그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조용히 말했다.


"...썩 나쁜 이름은 아닌 것 같군요. 마음에 듭니다."


투구는 여전히 그의 표정을 가리고 있었지만, 시즈는 그 안에서 아주 작게 미소가 번지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확신할 수는 없었음에도 괜히 그 상상이 마음을 간질이듯 기분 좋게 만들었다.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이에요, 아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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