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신도의 성소
시즈는 잠시 머뭇거렸으나, 이내 숨을 고르며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마력이 응집되면서 왼눈을 가린 가면의 중심부가 서서히 빛을 머금으며 푸른 섬광을 토해냈다. 작은 뇌격들이 요동치면서 공기 속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하는 순간, 하늘이 갈라지는 듯한 굉음과 함께 벼락이 떨어졌다.
콰과광———
푸른 섬광에 직격 당한 바위는 폭발하듯 산산조각 나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파편이 튀어 오르며 숲 속을 울렸고, 공기에는 여전히 전류의 잔향이 요동쳤다.
벼락의 빛이 잦아들자, 라사리아는 먼지로 가라앉은 바위의 잔해 너머를 바라보았다. 시즈는 그 자리에 간신히 서 있었다. 거친 숨을 몰아쉬는 얼굴에는 식은땀이 줄줄이 흘렀고, 어깨는 마치 천근의 무게를 진 듯 축 늘어져 있었다.
"역시... 필멸자의 육체로는 강대한 마력의 정수를 온전히 받아내지 못하는군."
라사리아의 시선이 시즈를 천천히 훑었다.
"그 몸으로 벼락을 남발한다면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다. 네가 품은 마력은 결국 생명력을 깎아내는 대가로 피어나는 권능이기에 결코 그 운명으로부터 피할 수 없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그저 흐름을 다스려주는 일뿐이다. 아텐시아의 권능이 너를 집어삼킬 때 동반되는 고통과 내상을 무디게 해 줄 수는 있겠지만 네 생명을 갉아먹는 근본은 바뀌지 않지. 오히려 고통이라는 경고를 느끼지 못하면서, 언제가 닥쳐올 파멸의 신호조차 알아차리지 못한 채 무너질 것이다. 그래도 상관없느냐?"
라사리아의 설명은 시즈의 가슴을 두려움으로 짓눌렀다. 그러나 자신의 여정을 걱정해 스스로의 권능을 내어준 아텐시아의 희생이 떠올랐다. 그 의지를 생각하니, 두려움에 매달릴 여지는 없었다. 겁을 먹는 것조차 사치였다. 그것은 자신을 믿고 힘을 나누어준 지고의 존재를 모욕하는 일이 될 뿐이었다.
"...아우로라를 떠난 순간부터 각오했습니다."
시즈의 대답에 라사리아는 잠시 그녀를 묵묵히 바라보았다. 결연한 눈빛 속에는 흔들림 없는 의지로 가득했다.
"좋다. 하지만 명심해라. 내가 내어줄 힘 또한 결코 가볍지 않다. 받아들이기 쉽지 않을 터이니, 각오를 단단히 해야 할 것이다."
라사리아가 팔을 들어 올리자, 넓은 손바닥이 빛기둥 속에서 내려와 시즈의 머리 위에 드리워졌다. 완전히 닿진 않았으나, 하늘에서 그림자가 드리우듯 압도적인 기운이 그녀를 감쌌다.
그 순간, 라사리아의 손바닥에서 눈부신 빛이 터져 나왔다. 마치 좁은 강줄기에 거대한 용맥이 억지로 흘러드는 듯한 힘이 덮치자, 반동을 버티지 못한 시즈는 신음조차 내지 못한 채 몸이 휘청이며 바닥에 풀썩 쓰러졌다.
지하로 이어지는 통로는 끝없이 이어지는 개미굴과 같았다. 젖은 바위틈에서 흘러내린 물방울이 이따금 땅에 부딪히며 서늘한 메아리를 남겼고, 그 진동에 놀란 듯 팔뚝만 한 박쥐 떼가 천장의 어둠 속에서 검은 폭포수처럼 쏟아져 나왔다. 놈들의 거친 날갯짓이 휩쓸고 지나간 바닥에서는 오래된 뼈와 재가 뒤섞인 잿빛 가루가 서걱이며 흩어졌고, 바람조차 닿지 않는 공간은 숨결만으로도 눅눅한 악취가 목구멍을 짓눌렀다.
라그나르는 지난 몇 달간 단서를 찾기 위해 추적자들의 흔적을 좇아 여러 은신처를 뒤졌다. 그러던 끝에, 어느 협곡의 폐허 속에서 어둠 아래로 이어진 비밀스러운 내리막길을 발견했다.
거칠게 깎아낸 듯 이어진 그곳은 갱도처럼 곳곳에 무너져 내릴 듯 삐걱거리는 나무 지지대가 버티고 있었고, 바닥에는 오래전 수레가 지나간 흔적처럼 조잡한 철로가 얽혀 있었다. 끝없이 어둠 속으로 이어진 길을 내려가던 라그나르는, 마침내 지하 깊숙이 숨겨진 거대한 문명에 닿았다.
짙은 그림자로 뒤덮여 그 외관을 자세히 확인할 수 없었지만, 그것만으로도 믿을 수 없을 만큼 정교한 것은 분명했다. 마치 오랜 세월 동안 세상으로부터 철저히 숨겨져 온 듯한 도시 안쪽으로는 분홍빛 불빛이 희미하게 번졌으며, 그 틈으로 희미하게 인간을 포함한 다양한 종족들이 좁은 골목을 오가는 것이 보였다.
그때, 도시의 거리 곳곳에서는 검은 후드를 깊이 눌러쓴 이들이 끝없이 흘러나왔다. 줄지어 행렬을 이룬 그들의 발소리는 메아리처럼 울려 퍼지며 골목마다 가득 번졌다. 수백의 발걸음이 거대한 강물처럼 모여들어 어딘가로 흘러가자, 라그나르는 무심히 그들의 흐름을 눈으로 좇았다. 줄지어 행렬을 이룬 신도들의 발자취가 모여든 곳은 도시의 북편, 외진 절벽 위에 홀로 솟아 있는 거대한 신전이었다.
그곳에 퍼져있는 기운은 지독할 정도로 역겨웠다. 자욱한 안개를 연상시키듯 신전 주변으로 펼쳐진 그 기운은 정신을 뒤흔들 정도였지만 라그나르는 주저 않고 몸을 낮추며 주변의 바위 틈새를 기어올라 사원 내부로 스며들었다.
신전의 안쪽은 교회의 예배당을 닮아 있었다. 양옆 벽을 따라 늘어선 기둥들이 끝없이 늘어서 있었고, 돔 형태의 천장은 음울한 울림을 만들어냈다. 모여든 신도들의 낮은 숨소리는 바닥에서 진동처럼 일렁이자 무수한 그림자가 촛불과 섞여 출렁거렸다.
잠시 후, 신전의 중심부에 남색의 후드를 쓴 사도가 모습을 드러냈다. 제단 위에 오른 그는 예배당을 가득 채운 신도들을 바라본 뒤 천천히 팔을 벌렸다. 그리고, 알 수 없는 음률이 목구멍을 타고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라-샤-도르, 에하-림......"
낯선 음절이 공기를 짓눌렀다. 메아리조차 삼켜버린 그 목소리가 끊기자, 신도들은 일제히 고개를 숙이고 같은 음절을 되뇌었다.
"에하-림... 에하-림..."
그 광경은 기도라기보다는 맹목적인 응답이었고, 반복될수록 점점 깊은 광기로 변해갔다. 사도의 한 마디마다 군중의 웅얼거림이 따라붙었고, 점차 물결처럼 증폭되어 예배당을 가득 메웠다. 마치 살아 있는 벽이 안쪽으로 기울어 무너져내리는 듯한 압박이 사방을 짓눌렀다.
라그나르는 기둥 뒤 어둠 속에서 그 장면을 지켜보았다. 뼈와 살을 파고드는 불길한 울림이 내면을 흔들었지만, 눈을 돌리지 않았다. 오래된 전쟁조차 남기지 못한 이질적 광경이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예배가 아닌, 마치 이 땅에서 결코 드러나지 말아야 할 비밀의 단편과도 다름없었다.
순간, 라그나르의 시선이 위로 향했다. 신전 주변을 가득 채운 역겨운 기운은 이곳의 단순한 자연현상 아니었다. 그것은 신전의 꼭대기에서 흘러내리듯 퍼지고 있었다.
그는 몸을 낮추고 기둥과 기둥 사이를 따라 미끄러지듯 움직였다. 아치형으로 치솟은 천장은 끝없이 높아 어둠 속에 사라졌고, 벽면마다 새겨진 문양은 낯설고 불길한 상징으로 가득했다. 옅은 불빛에 비친 창호는 오래전에 빛을 잃은 유리 파편처럼 갈라져 있었으며, 그 아래로 난 좁은 계단과 구불구불한 돌다리가 서로 얽혀 있었다.
라그나르는 신도들을 피해 그 길을 그림자처럼 조심스럽게 기어올랐다. 등 뒤에서는 불길한 기운이 따라붙는 듯했지만, 그는 기척을 감춘 채 은밀하고 날렵하게 위로 향했다.
마침내 꼭대기에 닿자, 시야에 들어온 것은 경악스러운 광경이었다. 어두운 실내에는 마치 실험실을 연상시키는 도구들이 흩어져 있었다. 낡은 철제 기구와 유리병, 끊어진 사슬과 뒤틀린 금속 도구들이 아무렇게나 널려 있었고, 구석마다 검게 물든 살덩이들이 잔해처럼 굴러다녔다. 썩은 피와 금속 냄새가 섞여 역겨운 향취가 가득 찼으며, 공간 전체가 오래 묵은 실험의 흔적으로 뒤덮여 있었다.
방 한가운데에는 거대한 금속 잔이 놓여 있었다. 기괴하게도 그 안에는 새까만 액체가 가득 차 있었으나, 액체라 불리기엔 이상했다. 물결 하나 일지 않았고, 찰랑거림도 없었다. 그저 검은 공허가 고여 있는 듯한 정적만이 자리하고 있었지만 그 액체가 신전을 감싸는 기운이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라그나르는 본능적으로 시선을 돌렸다. 방 한쪽에는 책장이 서 있었는데, 너무 오래되어 먼지가 덮인 채 형체조차 흐려 보였다. 일부 구역은 먼지가 겹겹이 쌓여 굳어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몇 칸은 최근에 사용된 듯 깨끗했다. 그는 숨을 죽이고 다가가 낡아빠진 책 한 권을 조심스럽게 꺼내 들었다. 갈라진 표지 아래의 페이지는 바람만 스쳐도 부서질 듯 위태로웠다.
그렇게 책장을 펼치자 의외의 광경이 드러났다. 그 안에는 지금은 사라진, 아득한 옛날의 인간들이 사용하던 문자가 새겨져 있었다.
그러나 책장을 넘길 때마다, 라그나르의 눈은 서서히 흔들렸다.
......오늘은 눈빛이 조금 흐려졌다. 아무것도 모른 채 잔을 들이키는 습관은 더 깊어졌다. 나쁘지 않다. 조금씩 균열이 벌어지고 있다......
페이지가 바람처럼 넘어갔다. 라그나르의 시야는 문장을 놓치지 않으려 필사적으로 글귀를 쫓았다.
......맛의 감각이 무뎌졌다. 몇몇은 단맛과 쓴맛을 구별하지 못한다. 기호가 사라지는 것은 곧 의지가 무너지는 과정이다. 청각 또한 둔해졌다. 종소리를 듣지 못하나 의례의 낭송에는 무의식적으로 반응한다. 그 틈이 곧 통로다......
책을 읽는 손끝에 점점 힘이 들어갔다. 기록은 냉정했으나, 글 사이로 은밀한 환희가 배어 있었다.
......침묵이 길어지고, 대화마저 줄어들었다. 신도 하나가 부주의해 일을 그르칠 뻔했으나 제때 처리했다. 관리가 더 필요하지만 계획은 흔들리지 않는다......
숨을 몰아쉬며 계속해서 다음 장을 펼쳤다. 문장은 점점 더 차갑고 집요해졌다.
......기억이 흐려지고 있다. 자아마저 약해졌다. 껍데기만 남은 몸뚱이는 비어 있으며, 비어 있는 그릇은 저항하지 않는다. 이제, 언제든지 정신을 지배할 수 있을 것이다......
떨리는 손길로 마지막 장을 넘기자, 꾹꾹 눌러 담은 듯한 글자가 칼날처럼 눈에 꽂혔다.
그분의 말씀은 결코 틀리지 않았다. 거짓된 신들마저 무너뜨릴 정도로 그분의 정수는 위대하다. 카타디오는 세계의 새로운 중심이 되어 그분의 세계를 위한 초석이 될 것이다.
차가운 식은땀이 등을 타며 흘렀다. 가슴은 쉴 틈 없이 미친 듯 요동쳤다. 방금까지 읽어 내려간 기록들이 머릿속을 헤집으며 하나의 그림처럼 이어졌다.
신들을 서서히 지워나가는 과정, 차갑게 적힌 문장들, 그리고 마지막에 박힌 한 줄. 카타디오가 세계의 새로운 중심이 될 것이라는 문장은 심장에 날카롭게 파고들었고, 라그나르는 자신도 모르게 탄식을 내뱉었다.
"신이시여... 이것이 대체... 전부 무엇이란 말입니까?"
그때였다. 뒤편에서 거친 발소리와 함께 불쑥 나타난 두 신도가 라그나르를 보자 목소리를 높였다.
"웬 놈이냐!"
라그나르는 그들에게 반응할 여유조차 주지 않았다. 순식간에 접근해 발톱을 휘둘러 두 신도의 목을 날카롭게 긋자, 공중을 가르는 선혈과 함께 그들은 신음조차 내지 못한 채 바닥에 쓰러졌다.
하지만 신도들이 쓰러지는 기척이 퍼진 순간, 어둠을 가르며 남색 후드를 쓴 사도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라그나르를 향해 팔을 치켜들더니 머리 위로 검은 아우라를 끌어올렸다.
그러나 공기를 휘감는 불길한 기운이 뭉쳐들며 주술이 형체를 이루기 직전 라그나르는 망설임 없이 몸을 던졌고, 화살처럼 날아가 그의 몸은 사도를 난간 밖으로 내던졌다.
우지직——
"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사도의 비명이 신전을 가득 울려 퍼졌다. 그의 몸은 아래 예배당 중심부로 추락했다.
콰당탕————
돌바닥이 박살 나는 소리가 폭발하듯이 울려 퍼졌고, 그 충격은 예배당을 아수라장으로 바꾸었다. 제단을 가득 메우던 광신의 합창은 일순간에 뒤집혔다. 제단 위에 있던 또 다른 사도가 고개를 번쩍 들어 라그나르를 발견하자마자 곧장 손가락을 내질렀다.
"저놈을 잡아라! 주교께서 노하시면 안 된다!"
그의 목소리는 갈라졌으나 광기 어린 분노로 울려 퍼졌다.
"놓쳐버린다면 내가 직접 네놈들 전부를 죽여버릴 것이다!"
라그나르는 잠시도 지체하지 않았다. 계단마다 신도들의 발소리가 몰려들었고, 검은 액체가 담긴 그릇에서부터 흘러나온 불길한 기운이 뒤를 바짝 쫓아왔다. 하지만 그는 날렵하게 몸을 낮춰 기어오르던 구조물을 거꾸로 내달렸다. 단숨에 난간과 계단, 교차된 기둥과 돌다리를 짐승처럼 네 발로 뛰어다니는 움직임은 번개 같았다.
바람을 가르며 한순간에 예배당의 중심까지 내려온 라그나르는 아수라장으로 변한 광경을 스쳐지나 신전의 출구를 향해 내달렸다. 뒤에서는 수많은 신도들과 사도가 고성을 지르며 추격했고, 어둠의 기운이 그림자처럼 몸을 휘감아 내려왔다. 그러나 라그나르는 머뭇거림 없이 어둠을 헤집으면서 순식간에 도시를 빠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