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공의 긍지
달빛이 고목 사이로 흘러내려 숲의 한가운데를 은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낮 동안 황금빛 햇살이 스며들던 자리 위로, 이제는 서늘하고 청아한 달빛이 고요히 번져 있었다.
그 고요와 어둠의 결 속에서 잠들어 있던 시즈의 닫혀 있던 눈꺼풀이 천천히 열렸다. 떨리는 손끝으로 바닥을 짚은 그녀는 짧은 호흡을 하며 깨어났고, 오랜 꿈결을 벗어난 듯한 시선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 순간, 숲의 상공을 선회하던 거대한 무언가가 시즈를 향해 강하하고 있었다. 그녀가 아는 그 어떤 새와도 비교할 수 없었다. 집채만 한 날개는 펼쳐질 때마다 숲의 상공을 가렸고, 바람을 가르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유려한 날갯짓은 두려움보다 먼저 경외감을 느끼게 했다.
마침내 땅에 내려앉은 거대한 새는 그 자체로 작은 언덕과도 같았다. 날카롭게 휘어진 황금빛 부리와 칠흑같이 검은 눈동자는 밤의 어둠 속에서도 위엄을 뿜어냈고, 목덜미를 감싼 새하얀 깃털은 달빛을 받아 은은하게 빛났다. 시즈는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그 압도적인 생명체 앞에서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거대한 새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시즈를 바라보았다. 짙은 갈색 눈동자에는 적의가 아닌 아주 오래된 무언가를 알아보는 듯한 깊은 지성이 담겨 있었다. 새는 위협적인 부리를 가볍게 떨며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다가왔다. 그리고는 거대한 머리를 숙여, 마치 어미 새가 아기 새를 어루만지듯 자신의 뺨을 시즈의 얼굴에 부드럽게 비볐다.
시즈는 처음 느꼈던 공포가 눈 녹듯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깃털 너머로 전해져 오는 따스한 온기와 자신의 내면 무언가에 공명하는 듯한 새의 기운. 시즈는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본인보다 몇 배는 더 큰 새의 부리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그 손길에 새는 기분 좋다는 듯 나지막한 소리를 내며 기꺼이 제 몸을 맡겼다.
"알리베라가 너를 마음에 들어하는 모양이구나."
어느새 다가온 라사리아의 목소리에, 시즈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알리베라... 이 새의 이름인가요?"
"그렇다."
라사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시선은 어느새 시즈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거대한 새를 향해 있었다.
"안개의 땅에 남은 마지막 독수리지. 오래전, 아텐시아의 은혜가 아니었다면 그 또한 역사 속으로 사라졌을 것이다. 맹약을 목숨보다 중히 여기는 긍지 높은 종족이니, 그 은혜는 결코 잊을 수 없는 빚으로 남았을 터. 다만 태생적으로 세계수의 기운이 깃든 곳이 아니면 둥지를 틀지 못하는 종족이기에... 이 숲을 떠나지 못하고 긴 시간을 홀로 보냈다."
라사리아의 설명이 끝나자, 알리베라는 아쉽다는 듯 시즈에게서 천천히 물러나 다시 한번 거대한 날개를 펼쳤다. 소리 없는 날갯짓과 함께 하늘로 솟아오른 그는 숲의 상공을 한 바퀴 선회한 뒤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시즈는 아우로라의 고문서에서 읽었던 내용을 떠올렸다. 창공의 지배자였던 용들을 따르며 하늘을 호령했으나, 태고의 전쟁과 함께 모두 사라졌다고 기록된 전설 속의 새. 하늘로 날아오른 생명체가 바로 그 전설의 마지막 남은 존재라는 사실에 다시 한번 말을 잃었다.
그 모습을 잠자코 지켜보던 라사리아는 시즈를 향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몸은 어떠하냐."
시즈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고 눈을 감았다. 몸 안에서 흘러가는 마력의 흐름을 따라가자, 이전처럼 억지로 쥐어짜듯 붙드는 감각 대신 자연스레 맥박과 함께 고요히 퍼져 나가는 기운이 있었다. 짧게 숨을 고른 그녀는 허리를 숙이며 미소를 머금듯 낮게 속삭였다.
"...이렇게까지 안정된 것은 처음이에요. 정말 감사합니다."
"감사할 일이 아니다."
라사리아의 어조는 담담했지만, 차갑게 잘린 그 말끝에는 은근한 무게가 실려 있었다.
"앞서 말했듯, 그것은 참된 도움이라 부를 수 없다."
라사리아의 말이 더 이어지지 않자, 시즈는 뭔가를 떠올린 듯 문득 주위를 살폈다. 숲으로 들어온 후 줄곧 자신의 뒤에 있었던 오미누스가 보이지 않았다.
"...오미누스는 어디에 있나요?"
"오미누스라... 너희는 그리 부르는 모양이군."
라사리아는 고개를 들어 숲의 어둠이 짙게 깔린 위쪽을 바라보았다. 시즈의 시선이 그를 따라가자 조금 떨어진 곳에 집채만 한 바위가 눈에 들어왔다. 그 위로, 오미누스가 앉아 있었다. 차갑게 내려앉은 푸른 시선은 나뭇잎 사이로 보이는 달을 무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저 아이, 메렌이 아니었다면... 너희는 그날 절벽 아래에서 어떤 끝을 맞이했을지 장담할 수 없었을 터."
메렌. 시즈는 지금껏 불길함을 뜻하는 '오미누스', 혹은 ‘죽음을 거니는 자’라 불려 왔을 그에게 다른 이름을 지니고 있으리라곤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바로 그가 아로스와 자신을 구해낸 존재라는 점이었다. 아로스조차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던 뒤틀린 기사들로부터 벗어나게 해 주었다는 사실은 설명하기 어려운 낯선 경외감과 동시에 알 수 없는 경계심을 불러일으켰다.
그의 정체에 대한 의문이 머릿속을 맴돌 무렵, 라사리아가 다시 입을 열었다.
"메렌은 이 세계에 속한 존재가 아니다."
시즈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무슨 말씀이신지...?"
"말 그대로다. 저 아이는 대지와 공존할 수 없는 기운을 품고 태어났다."
그는 잠시 과거를 더듬듯 깊은 숲 속을 바라보았다.
"몇 년 전... 긴 시간동안 침묵하던 엘라마가 난데 없이 숲을 열어 달라 부탁했었지. 나는 그 말을 듣고 곧장 기운이 불길하게 일렁이는 곳으로 향했고, 그곳에서 한 아이를 발견했다. 하얀 머리칼을 길게 늘어뜨린 어린아이였지. 차마 사람이라 부를 수 없는 몰골로 간신히 두 다리로 서 있는 것이 기적처럼 보일 정도였다. 피부는 인간의 것으로 보였으나 지나치게 창백했고, 사지는 곪아터진 것인지 썩었는지 분간조차 안될 정도로 새까맸지만... 가장 먼저 내 시선을 붙잡은 건 그 아이의 눈이었다. 푸른빛으로 타오르는 그 왼쪽 눈... 반대편에는 눈이 있었던 흔적조차 없었다. 나를 보자마자 두려움과 경계, 그리고 노골적인 살의를 함께 드러냈지. 그러나 이곳까지 오는 여정이 고됐는지, 풀썩 쓰러진 뒤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지금껏 살아오며 그토록 사무친 감정은 어떤 필멸자에게서도 본 적이 없었다."
잠시 침묵이 흐르고, 이야기를 잇는 라사리아의 음성은 더욱 낮아졌다.
"엘라마가 무슨 연유로 숲을 열어달라고 했는진 모르지만... 그 울음과 눈빛을 보니 나 또한 알 수 없는 이유로 마음이 움직였다. 그 뒤로 저 아이를 거두어 메렌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시즈는 조용히 숨을 고르며 라사리아의 이야기를 곱씹었다. 왜 오미누스의 시선이 그토록 차갑고 감정을 내비치지 못했는지 이제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린 나이에 노골적인 살의를 드러낸다는 것은 어떠한 온기조차 받지 못한 채 살아왔다는 방증일 터였다. 저 차가운 눈동자 너머로, 그 누구에게도 닿지 못한 채 얼어붙은 아이의 비명이 여전히 메아리치고 있는 것일까. 타인을 향한 살의는 사실, 자신을 지켜줄 그 무엇도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가 선택한 유일한 언어였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안타까움이 가슴을 스쳤지만, 동시에 시즈의 마음속에는 또 다른 의문이 겹쳐졌다. 자신의 키보다도 큰 부러진 칼날을 아무렇지 않게 들고 다니는 모습, 기척 하나 없이 나타나는 신출귀몰함과 비현실적인 괴력. 그 섬뜩함이 쉽게 잊히지 않았던 시즈는 망설임 끝에 입을 열었다.
"...혹시, 그의 과거에 대해 알고 계신 것이 있나요?”
라사리아는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나도 모른다. 하지만 저 아이는 내가 거둔 뒤로 줄곧 자신의 과거를 찾기 위해 세계를 떠돌아다녔으니... 더 알고 싶다면 직접 물어보거라."
시즈는 고개를 들어 조용히 바위에 앉아 있는 오미누스를 바라보았다. 시선은 자연스럽게 그의 허리춤에 걸린 거대한 부러진 칼날로 향했다. 신비로운 숲의 빛을 받아서일까, 칼날의 단면에서는 의식을 잃기 직전에 보았던 그 섬광과 꼭 닮은 청록빛 기운이 아주 희미하게 아른거리고 있었다.
그 희미한 빛은 그녀의 기억과 의문을 하나로 묶었다. 한참 동안 칼날을 바라보던 시즈는 그것을 확인하고 싶다는 생각에, 조용히 오미누스가 앉아있는 바위를 향해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저기..."
조심스러운 부름에, 감정 없는 푸른 눈동자가 천천히 아래로 향했다.
"본명이 있는 줄은 몰랐어요. 라사리아 님께서 당신을 그렇게 부르시더군요."
"...너희들 편한 대로 불러. 굳이 그 이름으로 바꿔 부를 필요 없어."
오미누스는 귀찮다는 듯 시선을 돌리며 무심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그 단호한 태도에는 '메렌'이라는 이름은 오직 라사리아에게만 허락된 것이라는 무언의 선이 그어져 있었다. 시즈는 잠시 머뭇거렸으나, 이내 그의 뜻을 존중하여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오미누스."
호칭을 정리한 시즈는 마음속에 품었던 질문을 꺼내기 위해 한 걸음 더 다가갔다.
"물어볼 것이 있어요. 절벽 아래에서 정신을 잃기 직전,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청록빛 섬광을 봤어요. 그리고 방금... 당신의 칼날에서 그것과 똑같은 빛을 봤습니다. 그 칼날에는... 심연의 존재들을 소멸시키는 특별한 힘이 있는 건가요?"
오미누스는 잠시 시즈를 바라보다, 다시 고개를 돌려버렸다.
"...알 필요 없어."
지극히 차가운 대답이었지만, 시즈는 그의 반응에서 어떤 긍정을 읽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오미누스의 눈에는 처음의 날 선 적대감 대신, 갈피를 잡지 못하고 미세하게 흔들리는 기색이 서려 있었다. 그 낯선 흔들림 속에서 시즈는 언젠가 그와 진실된 대화를 나눌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얻었다.
그 순간, 숲 전체가 낮게 떨리며 심장의 박동 같은 파문이 번졌다. 라사리아의 시선은 곧장 한 곳으로 향했다.
"...공명이 끝났군."
짧게 중얼거린 그는 지체 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시즈도 서둘러 뒤를 따랐지만, 라사리아의 걸음은 바람처럼 빨라 순식간에 시야에서 멀어졌다. 어둠 속에서 길을 잃는가 싶었으나 그가 지나간 자리에 하얀빛을 은은히 뿜어내는 작은 생명체들이 남아 있었다. 그 빛들은 마치 길잡이처럼 이어졌고, 시즈는 그 흔적을 따라 달리며 숲의 깊은 그늘을 빠져나갔다.
나무 사이가 점차 벌어지자 어둠 속에서 작은 불빛이 깜박였다. 초록빛 반딧불 하나가 허공을 떠다니더니 이내 또 다른 불빛이 뒤따라 나타났다. 드문드문 희미했던 불빛은 점점 무리를 이루며 밤공기 속으로 흘러나왔고, 마침내 완전히 숲의 그림자에서 벗어나는 순간 사방은 반딧불의 군무로 가득 차 있었다.
수천 개의 작은 별들이 땅 위로 내려앉은 듯, 빛의 물결이 어둠을 밀어내고 있었다.
그 한가운데, 라사리아가 서 있었다. 달빛과 반딧불에 둘러싸인 그의 시선은 오직 한 곳, 호수와 그 위를 감싼 은빛의 중심에 고요히 잠들어 있는 엘라마에 닿아 있었다.
시즈는 무심결에 발걸음을 멈추었다. 숨결조차 잊은 채, 그녀는 빛과 물결이 뒤섞여 자아내는 장관에 눈길을 빼앗겼다. 바람이 잔잔히 스쳐가자 반딧불의 물결은 파도처럼 흔들렸고, 호수의 수면 위에 드리워진 달빛과 겹쳐져 몽환적인 장막을 드리웠다.
그리고, 엘라마의 아래에 조용히 앉아 있던 아로스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달빛과 반딧불의 빛 사이로 걸어 나오는 그의 모습은 이전과 달랐다. 무뚝뚝함에 가려 있던 그림자가 옅어지고, 엘라마와의 공명으로 일깨워진 새로운 결이 은은히 번져 나와 있었다. 그의 걸음은 서두르지 않았으나, 한걸음 한걸음이 어쩐지 더욱 또렷이 각인되었다.
시즈의 눈에는 그가 단순히 다가오는 것이 아닌, 빛의 파편을 딛고 자신을 향해 약속된 길을 건너오는 것처럼 보였다. 한순간 아로스의 어깨를 감싼 달빛이 일렁이더니 반딧불이 주위를 맴돌며 흔적을 남겼다. 그 모습에 시즈는 가슴 깊숙이 알 수 없는 떨림을 느꼈다. 그것은 오랜 친구를 다시 마주한 듯한 기묘한 그리움이자, 낯선 이가 새로운 의미로 다가오는 듯한 감정이었다.
아로스가 점점 가까워지면서 시즈 또한 무의식처럼 이끌리듯 발걸음이 조금씩 빨라졌다. 마침내 눈앞에서 멈춰 선 그의 모습은 예전의 무뚝뚝함을 덮고 있던 무거운 그림자를 벗겨낸 듯했다. 표정에는 말없이 드러나는 결연함이 있었고, 그 속에는 알 수 없는 따스함까지 깃들어 있었다.
"귀공... 괜찮으신가요?"
시즈의 목소리는 조심스러웠지만 깊은 떨림을 감추지 못했다. 아로스는 그런 시즈를 바라보며 대답 대신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그 단순한 움직임마저 이전과 달리 무언가 바뀐 듯한 울림이 담겨 있었고, 순간 시즈의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가 드디어 변화를 받아들이고 있다는 사실이 눈빛 하나에도 고스란히 스며 있었기 때문이다. 간신히 눈가의 물기를 눌러 삼킨 그녀는 억눌린 감격을 미소로 바꾸었다.
그 광경을 바라보던 라사리아는 곧 다시 고개를 돌려 엘라마를 바라보았다. 달빛과 반딧불이 교차하는 환상적인 풍경 속에서 가면에 가려지지 않은 그의 입매는 눈에 띄게 굳어 있었다. 그것은 마치 예상치 못한 진실을 마주한 자의 흔들림처럼, 한순간 숨결조차 멈춘 듯한 그림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