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군의사 노아
늦은 밤, 마을은 깊은 적막에 잠겨 있었다. 집집마다 불빛은 이미 꺼졌고, 이따금 멀리서 들려오는 귀뚜라미 소리만이 어둠을 간지럽혔다. 그 적막을 비추는 옅은 달빛 아래, 마을 한켠에서는 종군 의사 노아가 홀로 남아 오염된 붕대와 감염된 자락들을 태우고 있었다.
매번 선배 의사들이 도와주겠다며 나섰지만 그때마다 노아는 고개를 저었다. 이제 제법 어른 티가 나는 나이가 됐기에 이런 사소한 일까지 남에게 맡길 순 없다는 자존심이 컸다. 불을 다루는 모습이 어설플지라도 이 마을 안에서 그보다 불에 익숙한 사람은 없었다. 타닥거리며 타오르는 불꽃 너머로 피어오르는 매캐한 연기가 코끝을 찔렀지만 이젠 익숙한 광경이었다. 장작더미에 조심스럽게 불씨를 옮기며 남은 오염물들이 붉은 불길 속으로 천천히 사라지고 나서야 노아는 숨을 길게 내쉬었다.
모닥불이 꺼져갈 무렵, 노아는 무릎을 꿇고 앉아 닳아빠진 목각인형을 꺼냈다. 손때로 닳아 있는 거인 전사의 형상을 한 인형은 그의 손길에 따라 자연스레 움직였다. 나뭇결 사이로 스미는 추억은 불빛만큼이나 따뜻했지만 그 안에는 묘한 쓸쓸함이 깃들어 있었다.
"이제야 마무리한 게냐?"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든 노아는 멋쩍게 웃으며 대답했다.
"네, 스승님. 보시는 것처럼 말끔히 끝냈습니다.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다니까요."
노아는 웃음을 머금었지만, 어느 쪽인지 모를 민망함에 살짝 눈을 피했다. 불빛 너머에서 다가온 안톤은 이곳 종군 의사들을 이끄는 최고참이자 대륙에서 손꼽히는 명의로 불리던 인물이었다. 세월이 흘러 백발이 성성했지만 그 실력만큼은 누구도 따라갈 수 없었다.
"오늘은 내가 자리를 비워서 일손이 모자랐을 텐데, 그 사이 꽤나 일이 있었나 보구나. 이 잔해가 그 결과물인가?"
안톤은 검게 그을린 바닥을 가리키며 물었다.
"별일 없었어요. 환자분 몸을 감싸던 붕대 하나가 나뭇가지에 닿아서 오염돼서 그걸 정리하는 데 조금 시간이 걸렸을 뿐이에요."
"그래? 그 정도면 다행이지."
안톤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노아 맞은편의 나무 의자에 앉았다. 아직 온기가 남은 작은 불씨가 퍼뜨리는 열기를 느끼던 안톤은 모닥불을 잠시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불 가지고 장난치다 뇌관이나 터뜨려 먹던 꼬맹이가 이제는 마무리까지 맡길 수 있는 의사가 되었구나. 물론 우리 중에 불을 너만큼 다루는 사람도 없으니, 그건 인정해야지."
"에이, 스승님... 그건 너무 옛날 얘기잖아요."
노아는 얼굴이 화끈해진 걸 숨기려 애쓰며 억지로 웃어 보였다. 당황한 표정이 엿보였지만 그 속에는 어딘가 기분 좋은 뿌듯함이 살짝 묻어 있었다.
그는 이그니카 출신이었다. 불의 신 바트라를 섬기는 이그니카의 주민들은 불을 다루는 데 타고난 재능을 지녔다. 그중에서도 노아의 가문은 불의 대사제를 대대로 배출한 명망 높은 집안이었다.
모닥불의 마지막 잔열이 사그라들며 희미하게 일렁였다. 노아는 잠시 손을 멈춘 채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조용히 쏟아지고 있는 별빛 아래의 하늘은 끝없이 깊고 어두웠고, 그 어둠 속에서 머릿속에 묻어두었던 오래된 장면들이 다시 떠올랐다.
15년 전, 노아는 형 데미안과 함께 처음으로 카노라스를 찾았다. 그 당시에는 키가 형의 허벅지에도 채 닿지 않는 작고 말 많은 아이였고, 데미안은 갓 성년이 되어 처음으로 동생에게 세계의 중심 도시를 보여줄 기회를 가졌었다. 처음 본 카노라스는 숨 막히게 거대했다. 신들의 도시라 불릴 만한 성벽과 하늘을 찌를 듯한 첨탑들. 어린아이의 눈에 비친 카노라스는 후끈거리고, 단단하고 투박한 이그니카와 달리 너무도 눈부시고 화려한 세계였다.
하지만 여행의 즐거움은 오래가지 않았다.
파도의 악마들이 도시를 습격한 것이다. 포효와 함성, 무너지는 건물, 사람들의 비명으로 도시는 한순간에 혼돈으로 물들었으며 그 혼란 속에서 데미안은 어린 노아를 품에 안고 달렸다. 사람들은 서로를 밀치며 도망쳤고, 끝없이 몰려드는 인파는 제어할 수 없는 파도가 되어 골목과 계단을 휩쓸었다. 결국 두 사람은 광장의 계단 아래에서 함께 굴렀고 그 충격에 형의 손이 미끄러졌다.
정신없이 휘몰아치는 군중 속에서 노아는 데미안의 손을 끝내 놓치고 말았다.
"형아——!!"
목이 터져라 울부짖었지만, 그 소리는 아수라장의 소음 속에 묻혔다. 팔을 뻗어도 아무도 받아주지 않았고, 결국 노아는 그 자리에 주저앉은 채 울기만 했다. 그렇게 미아가 된 노아를 구해낸 건 종군 의사들이었다. 전장을 떠돌며 병자와 부상자들을 돌보던 이들은 혼란 속에서도 그를 발견했고, 무너져가는 카노라스를 빠져나와 남쪽으로 향했다.
이후의 기억은 흐릿했다. 수레 위에서 웅크린 몸을 감싸주던 의사들의 낯선 손, 그리고 그 손끝에서 느껴졌던 따뜻한 온기만이 오래도록 남았다.
남쪽에 정착한 뒤로 노아는 그들 품에서 자라났다. 처음엔 '형이 아니면 싫다'며 갖은 떼를 다 썼지만 시간이 흐르며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특히 안톤은 노아에게 아버지이자 할아버지 같은 존재였고, 어느 순간부터 그의 곁에 머무는 것이 당연해졌다. 자연스레 의술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생명을 살리는 법도 익혀갔다. 처음엔 어렵고 무서웠지만 환자들이 고개를 숙이며 감사 인사를 전할 때마다 노아는 자신이 하는 일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알게 되었다. 그 순간만큼은 자신이 의사가 된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하지만 그 마음도 언제부턴가 점차 흐려지기 시작했다. 부패병에 걸린 환자들은 나아지질 않았다. 도려낸 상처는 다시 썩었고, 입술이 파랗게 질린 아이들은 하루도 못 넘기고 죽어갔다. 어떤 약도 듣지 않았고, 어떤 정성도 통하지 않았다. 노아는 매일같이 그 무력감과 싸워야 했다. 기껏 품에 안아 일으켜 세운 환자가 몇 시간 뒤 숨을 거두는 모습을 반복해서 지켜보면서 스스로의 손이 점점 무기력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그런 근심 가득한 노아의 표정을 본 안톤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네가 우리와 함께 의술을 시작한 지도 벌써 십 년이 넘었구나. 세월이 이렇게나 빠른데도... 나는 아직도 네가 처음 환자를 살려낸 날을 기억한다. 그때 네 눈빛 말이다. 생명을 살렸다는 기쁨과 자부심이 뒤섞였던... 그날의 눈빛을 난 잊지 못한단다."
모닥불이 흔들리며 안톤의 주름진 얼굴을 어슴푸레 비췄다. 그의 눈빛은, 마치 그때로 돌아간 듯 멀고 무거웠다.
"하지만, 지금 세상은 그때와는 너무도 달라졌지. 솔직히 나도 믿고 싶지 않고 말이다. 상상조차 하기 싫지만, 만약 종말이라는 게 존재한다면... 어쩌면 그건 이미 우리 곁에 와 있는지도 모르겠구나."
노아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고개를 끄덕이지도 않았지만 안톤의 말은 말없이 그의 마음 깊숙한 곳으로 스며들었다.
카노르 평원이 부패에 잠식된 뒤, 노아와 안톤을 비롯한 종군 의사들과 기사들은 전선을 떠나 남쪽 엘라리모스로 내려왔다. 지난 몇 년 동안 그들은 시스테나 전선에서 처절한 싸움을 이어갔지만 전선은 점점 남쪽으로 밀려났고, 함께했던 동료들 중 일부는 부패에 휘말려 목숨을 잃었다. 결국 전선에서 활동하던 의사들 중 일부는 부상과 소모가 누적되면서 후방의 작은 마을로 물러났다. 노아도 그들 중 하나였다. 의술은 능숙했지만 아직 어린 나이였던 만큼 전선에 계속 머무는 것은 무리였다. 그를 후방으로 보내는 결정은 안톤을 비롯한 상급자들의 배려이자 판단이었다. '이 아이마저 저 참혹함 속에서 잃을 수는 없다'는, 차마 입 밖에 내지 못한 노의사의 마음이었으리라.
후방에서 맡게 된 역할은 전장에서 실려 온 병자들을 돌보는 일이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환자들은 도착하자마자 손쓸 새도 없이 숨을 거두었다. 대다수가 부패에 깊이 잠식되어 있었고, 그들에게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죽음을 조금 늦추는 것뿐이었다. 의사로서의 역할은 점점 왜곡되었고, 노아는 자신이 가진 지식과 기술이 아무 소용없다는 사실을 매일같이 마주해야 했다.
지쳐갔다.
모두가 지쳐가고 있었다.
노아도 마찬가지였다. 의연한 척했지만 그 감정의 무게는 쉬이 감출 수 없었다. 그래서일까, 최근 들어 그는 자주 목각 인형을 꺼내 들었다. 카노라스에서 형이 준 손바닥만 한 거인 전사의 목각인형.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담긴 그 인형은 이제 여기저기 흠집투성이였지만 노아에게 있어 그것만큼은 아직 온전한 유년의 조각이었다. 형은 언제나 자신을 보살펴주었고, 보호해 주었다. 그 따뜻한 손길이 아직도 느껴지는 듯했다. 노아는 이따금씩 대륙 어딘가에 여전히 형이 살아있을지도 모른다는 망상을 품었다. 언젠가... 어딘가에서 형을 다시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안톤은 그런 노아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카노라스 길바닥에서 울고 있던 꼬맹이는 어딜 가든 그 목각인형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한 번은 그 인형을 도랑에 빠뜨려 울고불고 악을 쓰며 주으러 내려갔다가 악어에게 물려갈 뻔한 적도 있었다. 그 기억을 떠올리며, 안톤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가족이 보고 싶은 것이냐?"
안톤의 물음에 노아의 목각인형을 손끝으로 천천히 쓰다듬었다. 한동안 말이 없던 그는 약간의 텀을 두고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바쁜 부모님을 대신해 갓난쟁이 때부터 자신을 업어 키운 것은 형이었기에, 노아에게 가족의 그리움이란 곧 형을 의미했다.
"...형이 보고 싶어요. 벌써 10년도 넘게 지났지만, 그 얼굴은... 아직도 또렷하게 기억나요."
노아는 언젠가 이그니카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했지만 매번 그 바람을 마음속에 묻었다. 자신을 이끌어준 스승과 가족과도 같은 동료들, 그리고 지금도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한 이 마을의 사람들을 떠날 수는 없었다. 그들의 곁에 머무는 것, 그곳에서 자신이 힘이 되는 것. 그것은 노아의 선택이었다.
안톤은 한숨 섞인 숨결을 내쉬며 불길을 바라보았다.
"카노라스는 오래전에 무너졌지. 그날의 참상을 떠올리면... 살아남은 이가 얼마나 될지 상상조차 어려워. 부패는 사방으로 죽음의 마수를 뻗치고 있지만 북쪽으로 상륙하는 힘은 약하다고 들었다. 그것은 필히 이그니카의 있는 불의 사제들 때문일 게다."
실제로, 부패는 불에 약했다. 어떤 사물이나 생명이라도 순식간에 변이 시키는 부패의 기운조차 불 앞에서는 그 맹위를 잃곤 했다. 안톤은 잠시 뜸을 들이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너는 불의 신을 섬기는 사제의 가문 출신 아니더냐. 그 피는 결코 헛되지 않다. 만약 네 형이 그때 살아남았다면, 분명 지금도 어딘가에서 살아 있을 것이야. 그만한 힘을 가진 사람이라면 부패에 쓰러지지 않았을지도 모르지."
그 말과 함께, 안톤은 품에서 오래된 명패 하나를 꺼냈다. 손바닥만 한 크기의 그것에는 평등과 평화의 징표인 비둘기가 새겨져 있었고, 오래된 금속 테두리에는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과거 카노라스에서 명의로 이름을 떨치던 시절 직접 가르친 수제자들에게만 주었던 증표들의 원형이자, 그가 의술의 길을 걷기 시작할 때부터 간직해 온 가장 오래된 명패였다.
노아는 두 손으로 공손히 그것을 받아 들었다. 말문이 막힌 채, 멍하게 눈을 깜빡이며 안톤을 바라볼 뿐이었다.
"아직도 이 명패를 기억하는 이들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혹시라도 있다면, 이것이 너의 앞날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게지. 언젠가 네 마음의 정리가 끝난다면, 이곳을 떠나 너의 길을 가거라."
안톤은 명패를 건넨 뒤 천천히 돌아서서 숙소로 향했다.
노아는 말없이 그 자리에 남았다. 손에 쥔 목각인형과 명패는 과거와 현재를 잇는 작은 매듭처럼 느껴졌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밤하늘을 가로지르는 유성 하나가 북쪽 하늘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마치, 나아갈 길을 알려주는 이정표처럼.
안식 교회를 떠난 지 사흘째.
길 위에서 두 사람은 예전보다 조금 더 편안한 공기를 공유하고 있었다. 대화는 여전히 짧고 간간이 끊겼지만 그 사이에 흐르던 침묵은 이제 덜 낯설었다.
"다리아는 정말 얌전한 것 같아요. 처음 올라탈 때는 조금 경계할 줄 알았는데... 한 번도 거칠게 움직인 적이 없어요."
"레클레스도 마찬가지입니다. 덩치에 비해 걸음도 부드럽고, 고삐를 세게 당기지 않아도 반응하더군요."
"이상하죠. 왠지 저희한테만 순한 느낌이에요. 다른 사람들에게는, 아마 이렇지 않았을 것 같달까......"
시즈는 다리아의 목덜미를 부드럽게 쓸었다. 다리아는 마치 그 손길을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귀공께서는 말을 자주 타보신 적 있으세요? 익숙해 보이 셔서요."
아로스는 잠시 대답 없이 바람을 가르며 나아가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손이 먼저 움직이는 걸 보면 그랬던 것 같습니다."
짧은 대답이었다. 하지만 그 말엔 스스로도 확신하지 못하는 기색이 담겨 있었다.
"몸이 기억하시는 거네요."
시즈는 그렇게 말한 뒤 작게 웃었다. 그건 담담한 생각인 동시에 조금은 쓸쓸한 이야기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 미묘한 여운 속에서 둘 사이의 침묵은 예전처럼 무겁지 않았다.
그때, 지평선 너머로 마르크가 언급했던 마을의 실루엣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처음에는 지평선 끝 어딘가에 걸친 실루엣이었지만 점점 가까워질수록 마을의 형태가 뚜렷해졌다. 마을 앞을 지키는 목책 앞 병사들의 태도에는 날이 서 있었다. 간이로 세운 초소 뒤로는 활을 든 병사들이 그림자처럼 서 있었고, 마을 안쪽에서도 희미한 인기척이 끊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