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 전의 고요
덮개가 열리자, 두 번째 액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앞서의 것과는 뚜렷이 달랐다. 첫 번째가 깊고 짙은 어둠 속에서 본능적 거부감을 일으켰다면, 이번 것은 한층 정제된 듯 부드럽게 일렁였다. 은은하게 빛이 맺힌 모습은 마치 길들여진 야수처럼 고요했으나 그 중심은 여전히 어둠의 심연을 감추고 있었다.
"이것은 정제된 그분의 정수입니다."
비디아는 손끝으로 그릇을 가볍게 돌리며 나직이 말을 이어갔다.
"무작위적이고 파괴적인 변이가 아닌, 보다 유용한 형태로 다듬어진 물질이지요. 원하신다면 이걸로 당신의 아이들을 더 강하게 만드는 것도 가능할 것입니다.”
목소리는 평온했으나, 그 저변에는 스스로 빚어낸 걸작을 감상하는 예술가와 같은 오만한 여유가 흐르고 있었다. 그 말에 사브라트는 가볍게 턱을 까딱였고, 황금빛 시선은 곧바로 남은 한 마리의 용인을 향했다.
이번에는 주저함이 없었다. 용인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릇을 받아 들자마자 액체를 들이켰다. 어김없이 몸이 떨리기 시작했으나, 이전처럼 극심한 경련이나 찢어지는 비명은 없었다.
혈관을 타고 흐르는 기운은 전혀 다른 양상으로 퍼져나갔다. 피부와 비늘은 서서히 윤기를 머금었고, 육체는 정련된 강철처럼 단단히 압축되며 기이할 정도로 굵직하게 변모했다. 변화를 감지한 용인은 주먹을 쥐었다 펴며 새로운 힘을 시험했다. 움직임은 한층 유연하고 강력했으며, 이내 입을 벌려 내뿜은 화염의 위력은 오베디안의 숨결에 버금갈 정도로 뜨겁고 날카로운 화염이었다.
"보십시오."
비디아는 흡족하다는 듯 중얼거리며 손을 뻗었다. 그러자 용인의 몸속에서 막 흡수된 액체가 그의 의지에 응답하듯 꿈틀거렸다. 검은 실 같은 선이 혈관을 따라 흐르며 서서히 피부를 뚫고 밖으로 스며 나왔다. 빠져나온 검은 기운은 용인의 몸을 떠나 비디아의 손끝으로 모여들었고, 마치 생명력을 가진 기생충처럼 가늘고 유려한 실이 손가락을 감싸 돌다가 이내 서서히 응집되며 작은 방울로 되돌아갔다.
"이것이 그분의 정수가 지닌 진정한 가치입니다. 용인들에게 새로운 힘이 될 수도 있고, 그렇지 않다면 이처럼 다시 회수해 원하는 방향으로 쓰일 수도 있지요."
비디아는 손바닥 위에서 맴도는 액체를 다시 그릇 안으로 흘려보냈다. 사브라트는 그 과정을 끝까지 흥미롭게 지켜보았다. 그것은 단순한 파괴의 도구가 아닌 무궁한 가능성을 품은 힘이었다.
하지만 오베디안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언제든 힘을 부여하고, 다시 거두어들일 수 있다는 절대적인 통제권. 저 힘을 받아들이는 순간, 그것은 힘을 얻는 것이 아닌 주교의 손아귀 안에서 놀아나게 되는 것일지도 모를 터. 방금 전의 참혹한 죽음을 목격한 눈빛은 선명한 경계심이 서려 있었고, 그 시선을 알아차린 비디아는 가면 아래로 노골적인 비웃음을 흘렸다.
「추후, 협력이 필요할 때 다시 찾아와라. 때를 보아 그 힘을 사용토록 할 것이다.」
사브라트의 말에 비디아는 몸을 살짝 기울여 공손히 답했다. 그러나 그 몸짓에는 예의뿐만이 아닌 은근한 우월감이 함께 배어 있었다.
"기꺼이 따르겠습니다. 저희는 언제든 협곡의 지배자와 함께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의 손끝이 그릇 위를 스치자, 바닥의 어둠이 일렁이며 각각의 액체가 담긴 그릇들이 다시 주인의 품으로 돌아갔다. 자리에서 물러서던 비디아는 부드럽게 덧붙였다.
"오늘의 교훈을 마음에 새기셨다면, 앞으로 이 힘을 어떻게 쓰실지도 곧 정해지겠지요."
온화한 목소리 밑에는 조소와 확신이 어른거렸으나, 사브라트는 그 말에 굳이 답하지 않았다. 다만 고개를 들어 보이며 그의 퇴장을 허락할 뿐이었다.
어둠 속으로 걸음을 옮기는 비디아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자, 협곡에는 다시 적막이 내려앉았다. 그제야 오베디안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정말로 주교를 믿으시는 겁니까?"
사브라트는 표정변화 없이 황금빛 눈을 내려 오베디안에게 고정했다.
「믿음과 이용은 별개의 문제다.」
담담한 의식 속에는 이미 확신이 깃들어 있었다. 사브라트는 단순히 이 힘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머무는 것이 아닌 어떻게 다루고, 어디까지 끌어올릴 것인가를 처음부터 고민하고 있었다. 용인들은 그의 피를 이어받은 자들이었다. 만약 그들이 이 힘을 온전히 흡수할 수 있다면, 그 가능성은 어디까지 뻗어 나갈 수 있을까.
우선은 어린 유생들이 적합했다. 아직 미숙한 육체에 큰 부작용 없이 스며든다면 차츰 상위의 용인들에게까지 넓혀갈 수 있을 것이며, 그 끝은 사브라트 본인일 터였다.
그는 자신의 피를 의심하지 않았다. 이 땅에서 가장 오래 살아온 생명중 하나이자, 과거 하늘을 지배했던 패룡이었기에 언젠가 날것의 힘조차 삼킬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것은 파괴를 동반하는 동시에 무한한 가능성을 품고 있었다. 정제된 힘은 그 일부를 길들인 것에 불과했으나 본질은 심연의 힘을 온전히 담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속을 알 수 없는 주교의 꿍꿍이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다만, 아직 이곳이 준비가 덜 되었을 뿐.」
오베디안은 더 이상 토를 달지 않았다. 눈앞의 위대한 존재는 자신이 미처 헤아리지 못한 몇 수 앞을 이미 내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모습을 확인한 사브라트는 낮게 으르렁이며 덧붙였다.
「하찮은 족속들에게 심판을 내릴 날이 머지않아 다가올 것이다. 어리석음을 깨닫지 못한 배신자들, 벼락을 빼앗아 스스로를 신이라 칭하는 오만한 무리들... 놈들에게는 한 점의 자비도 허락되지 않으리라.」
숲에서의 하루는 찰나처럼, 때로는 영원처럼 느리게 흘렀다. 헌과 미사가 숲 안쪽에서 약초를 정리하는 사이, 시즈와 아로스는 조금 떨어진 고목 아래 나란히 앉아 있었다. 나뭇잎 사이로 부서져 내리는 햇살이 두 사람의 어깨 위로 조각보처럼 내려앉았고, 찻잔에서 피어오르는 김이 나른하게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이 차... 향이 참 독특하네요. 첫맛은 쌉싸름한데 끝맛은 달아요."
시즈가 투박하게 깎인 나무 찻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쥐며 나직이 중얼거리자, 아로스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잔을 내려다보았다.
"헌 님께서 쑥을 우려낸 물에 말린 과일 껍질을 곁들였다고 했습니다."
"역시... 헌 님 답네요. 무엇이든 만들어내는 분이시니까요."
시즈는 옅게 미소 지으며 숲의 전경을 바라보았다.
"귀공, 기억나세요? 예전에 저희가 처음 만났을 때... 그때는 대화 한마디 나누기도 힘들었잖아요. 귀공은 늘 단답형이셨고, 저는 어떻게 말을 걸어야 할지 몰라 쩔쩔맸구요."
"......기억합니다."
아로스의 짧은 대답에, 시즈는 입술을 삐죽 내밀며 짐짓 서운한 기색을 내비쳤다.
"보세요. 지금도 그러시잖아요. 조금 더 길게 말씀해 주시면 어디가 덧나나요?"
그 장난 섞인 타박에 아로스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투박하지만 진심이 담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때는... 무녀님께서 저를 어려워하시는 것 같아서 불필요한 말을 삼가는 게 예의라 생각했습니다."
"어려워했다기보다는... 신비로워 보였죠. 그리고 조금은 슬퍼 보이기도 했고요."
시즈의 시선이 아로스의 옆얼굴에 머물렀다. 항상 차가운 투구 속에 감춰져 있던 그의 얼굴이 햇살 아래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흉터가 남은 뺨과 다부지면서도 날렵한 턱선, 그리고 자신을 향한 올곧은 눈빛.
"앞으로는 투구도 좀 자주 벗어주세요. 이렇게 얼굴을 보니... 좋잖아요."
시즈는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지만, 아로스가 고개를 돌려 시선이 정면으로 마주치자 순간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그녀는 황급히 고개를 돌려 저 멀리 호수를 바라보며 애써 찻잔을 만지작거렸다.
"......노력하겠습니다."
아로스 역시 칭찬이나 위로에 익숙하지 않은 듯 귓가가 붉어졌다. 그는 대답 대신 찻잔을 만지작거렸다. 그것은 비어 있는 침묵이 아니었다. 무언가를 지키기 위해 꽉 다물고 있는 입술 사이로, 따스한 온기가 흐르고 있었다.
"이곳을 떠나면... 다시 험한 길이 기다리고 있겠죠?"
"그럴 겁니다."
"그래도 예전만큼 두렵지는 않아요. 어제 호숫가에서 귀공이 해주신 말씀 덕분일까요. 끝에 무엇이 있든,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만으로도... 꽤 든든하거든요."
시즈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그 끝에 묻어나는 신뢰는 견고했다. 아로스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마주 보았다. 가면 너머의 푸른 눈동자가 흔들림 없이 자신을 담고 있었다. 그는 충동적으로 손을 뻗어 그녀의 흩어진 머리카락을 넘겨주고 싶었지만, 주먹을 쥐며 그 마음을 찻잔과 함께 내려놓았다.
"저 또한... 그렇습니다."
그 짧은 한마디에 담긴 무게를 알기에, 시즈는 더 바랄 것 없다는 듯 환하게 웃었다.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그녀의 미소는 아까 보았던 숲의 여명보다 더 눈부셨다. 아로스는 그 모습을 눈에 담으며 갑옷 안쪽 깊숙한 곳에 닿아 있는 미세한 이물감을 의식했다. 헌이 건네주었던 노란 수선화. 거칠고 차가운 갑옷 속에서 바스라질까 조심스레 숨겨 둔 그 꽃잎이, 마치 자신의 심장 박동에 맞춰 떨리는 것만 같았다.
'나는 당신의 것.'
헌이 알려주었던 꽃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지금이라면... 전할 수 있을까. 거창한 맹세나 유려한 말솜씨는 없더라도, 이 투박한 꽃 한 송이라면 서툰 진심을 대신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아로스는 마른침을 삼키며 조심스레 손을 들어 갑옷의 틈새로 가져갔다. 손끝에 보드라운 꽃잎의 감촉이 닿았다.
"무녀님."
"네?"
시즈가 고개를 갸웃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아로스는 망설임을 끝내고, 품 안의 꽃을 꺼내기 위해 입을 열었다.
"...제가 드릴 것이—"
그때였다.
후두둑—
청명하던 하늘이 일순 잿빛으로 바뀌면서 예고도 없이 굵은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어? 비다!"
멀리서 미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갑작스러운 소나기에 헌과 미사가 약초를 챙기느라 분주하게 움직이는 모습이 보였다. 시즈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의아해했다.
"갑자기 웬 비죠? 방금 전까지 화창했는데......"
하지만 아로스는 비를 피하지 않았다. 빗방울이 갑옷을 때리는 소리 사이로, 그의 감각이 섬뜩한 이질감을 포착했다. 그것은 살기도, 적의도 아니었다. 그저 세상의 색채가 한 톤 낮아지는 듯한 탁함. 빗물에 섞인 음습함과 함께 숲의 생기가 순식간에 죽은 듯 가라앉고 있었다. 무언가가 잘못되었다는 직감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아로스는 입을 굳게 다물며 꺼내려던 꽃을 다시 갑옷 깊숙한 어둠 속으로 밀어 넣은 뒤, 망설임 없이 옆에 놓아두었던 투구를 집어 들었다. 차가운 금속음과 함께 그의 얼굴이 다시 단단한 투구 속으로 감춰지면서 전해지지 못한 고백은 빗소리에 묻혔다.
이어서 반사적으로 검자루에 손을 올린 그 순간—
"떠나야 한다."
등 뒤에서 낮게 깔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화들짝 놀란 시즈가 뒤를 돌자, 그곳에는 라사리아가 서 있었다. 발소리도, 기척도 없었다. 마치 처음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그림자처럼, 그는 빗줄기 속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
시즈가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그를 바라보았지만 라사리아의 시선은 두 사람이 아닌 숲 너머의 허공을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었다. 평소의 초연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가면 아래 드러난 하관이 미세하게 경직되어 있었다. 떨림은 없었으나, 그가 내뿜는 기운은 평소보다 훨씬 예리하게 벼려져 있었다.
"시간이 없다. 당장 떠나야 한다."
"떠나라니요?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로스의 물음에, 라사리아는 대답 대신 천천히 고개를 들어 숲의 경계를 바라보았다. 가면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지만 그의 시선은 걷잡을 수 없이 흔들리고 있는 듯했다.
그것은 공포에 가까운 전율이었다.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숲의 기운을 짓누르며 다가오고 있었다. 형체도, 이름도 알 수 없었으나 그것이 가져오는 기운만으로도 숲의 안식이 위협받고 있었다. 숲의 주인조차 불안에 떨게 만드는 기척.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 생명의 근원을 말라비틀어지게 만드는... 알 수 없는 음험한 시선. 저 보이지 않는 그림자가 숲의 가장자리를 핥는 순간, 엘라마의 안식은 영원한 침묵으로 바뀔 것이라는 공포가 본능을 잠식했다.
라사리아의 경직된 모습에 시즈는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끼며 마른침을 삼켰다.
"설명할 여유 따윈 없다. 지금 당장 이곳을 떠나지 않으면... 숲 전체가 위험해진다."
라사리아의 목소리에는 설명할 수 없는 절박함이 묻어 있었다. 그의 뒤로 오미누스가 나타났다. 쥐도 새도 모르게 나타난 그 역시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표정으로 라사리아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헌과 미사가 비를 뚫고 달려왔다.
"무슨 일입니까?"
"갑자기 분위기가 왜 이래요? 저... 숲의 주인분은 왜......"
미사가 겁에 질린 표정으로 시즈에게 물었으나, 라사리아는 그들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허공을 향해 나직이 읊조렸다.
"너희가 이곳에 더 머무르면, 엘라마조차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지금 당장 이곳을 떠나거라."
"지금 당장이라니요... 저희는 아직 마음의 준비도......"
시즈가 당황하여 말끝을 흐리자, 라사리아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준비할 시간 따위는 없다."
상황의 위급함을 직감한 헌이 나섰다. 신이라 불리는 존재가 저토록 긴장할 정도라면, 보통 일이 아님을 본능적으로 깨달은 것이다.
"알겠습니다. 뜻이 그러하다면 따라야겠지요."
헌은 아쉬운 표정으로 아로스의 어깨를 두드렸다.
"하루라는 시간이 참 짧군요."
아로스는 말없이 그저 고개를 숙였고, 뒤이어 미사가 울먹이는 표정으로 시즈의 손을 잡았다.
"어제 딴 과일로 만든 화채, 아직 다 먹지도 못했는데... 이렇게 가버리는 게 어디 있어요."
"......"
"그래도... 무사해야 해요. 알겠죠? 나중에 꼭 다시 만나요. 그때는 내가 더 맛있는 거 많이 해줄 테니까."
"네, 약속할게요. 두 분도... 꼭 건강하세요."
"기사님, 무녀님 꼭 잘 지켜주셔야 돼요!"
미사의 말에 아로스는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그렇게 짧지만 깊은 작별이 오가는 사이, 라사리아는 네 사람의 인사가 끝난 것을 확인한 뒤 아로스와 시즈를 향해 가까이 오라는 듯 손짓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