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안가의 흉계
날 선 질문에 벨라미는 순간 말문이 막힌 듯 눈을 굴리다가, 곧 억지로 웃어 보이며 손사래를 쳤다. 말끝은 얼버무리는 듯 흘러갔고, 그의 웃음은 얇게 번졌지만 눈빛만큼은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때, 산허리 너머에서 자갈이 사락사락 미끄러지는 소리가 바람에 실려 내려왔다. 누군가 천천히 골짜기를 따라 내려오고 있었다. 아로스의 손이 무의식적으로 칼자루를 더듬었다. 본능적인 긴장이 손끝을 타고 흘러 칼자루를 움켜쥔 악력에 힘이 실렸다. 그러나 바람을 가르고 드러난 모습은 예상과 전혀 달랐다.
허겁지겁 내달리던 것은 많아야 열둘 남짓으로 보이는 소년이었다. 먼지와 피에 엉겨 붙어 있는 헝클어진 머리칼, 초점조차 제대로 잡히지 않는 깊게 패인 눈. 갈라진 입술 사이사이로는 피가 비집고 있었고, 어딘가에 걸려 길게 찢어진듯한 더러운 옷 아래로는 굶주림으로 말라붙은 갈비뼈가 솟구쳐 나와 있었다. 신발조차 신지 않은 발바닥은 자갈에 긁히며 핏자국이 가득했고, 그 아래로 오래된 상처가 겹겹이 터져 있었다. 마치 무언가에게 쫓기는 듯 비틀거리던 소년은 아로스와 벨라미를 보자마자 곧장 앞으로 고꾸라졌다.
"어이, 어이! 정신 차려!"
벨라미가 놀라서 허둥지둥 달려가 쓰러진 소년을 부축했다. 삐쩍 마른 어깨가 그의 팔에 매달리듯 축 늘어졌다.
"이봐, 꼬맹이! 정신 차려 인마!"
벨라미가 허리춤을 뒤져 꺼낸 작은 물가죽부대에서 몇 모금 남지 않은 물을 소년의 입에 흘려 넣자, 소년은 죽음에 매달리듯 물에 달려들었다. 갈라진 입술이 떨리며 물방울을 탐하듯 빨아들였고, 손끝은 아직 남은 한 방울이라도 놓칠세라 부들부들 떨며 벨라미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물이 목으로 넘어갈 때마다, 갈라진 숨소리가 짐승처럼 새어 나왔다.
"너, 저 산 위에서 내려온 거 맞지? 도대체 어떻게 내려온 거야?"
벨라미가 부축한 채 다급히 묻자, 소년은 그저 고개를 저으며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울먹이기만 했다. 목소리 대신 터져 나오는 것은 끊어진 현을 긁는 듯한 흐느낌뿐이었으며, 눈동자는 여전히 산 위 어딘가의 끔찍한 광경을 붙든 채 굳어 있었다.
그 눈빛은 끔찍한 무언가를 마주한 자의 것처럼 겁에 질린 모습이었다. 작은 어깨가 공포에 움찔이며 흔들릴 때마다 굶주림과 피로로 이미 고갈된 몸이 다시 무너져 내릴 듯 휘청거렸다.
소년을 진정시키려던 벨라미는 문득 그의 모습을 더 자세히 살폈다. 시선은 손목과 바닥에 끌린 오른쪽 발 뒤꿈치에 닿았다. 그곳에는 살이 녹아내린 끔찍한 화상의 흔적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그 흔적을 확인한 순간 벨라미의 얼굴이 굳어졌다. 대체 무슨 일을 겪고 내려온 것인지 더 이상 물을 필요조차 없었다.
"...무슨 일이지?"
아로스가 낮게 묻자, 벨라미가 대답했다.
"...쓸모가 없어진 거야."
"알아들을 수 있게 제대로 말해."
아로스의 시선이 날카롭게 파고들자, 벨라미는 격앙된 목소리로 내뱉었다.
"더는 노예로도 안 써먹는다는 거지! 손발을 지져서 도망칠 힘조차 못 쓰게 만든 다음에 괴물들 먹이로 내던져 버리려는 거야!"
소년의 몸을 붙든 채 한동안 이를 악물고 있던 벨라미는 숨을 몰아쉬며 낮게 말을 이었다.
"인간들을 노예로 부려먹는 놈들은 이 산맥에서 아주 오래 살아온 익인들이야. 이 산자락 어딘가엔 무너져 내린 서쪽 신계의 관문이 있는데, 그곳에는 15년 전 대지 밑바닥에서 기어 나온 괴물들이 들끓고 있지."
그는 곁눈질로 아로스를 흘겨보며 말을 이었다.
"왜 그런 짓을 하는지는 나도 몰라. 하지만 분명한 건, 익인들이 주기적으로 괴물들에게 먹이마냥 인간들을 던져준다는 거야. 마치 길러낸 가축에게 먹이를 주듯이 말이지."
벨라미의 어조는 비웃음처럼 들렸지만, 그 밑바닥에는 오래 묻어둔 분노와 혐오가 서려 있었다. 소년의 말에 아로스는 잠시 숨을 고르듯 눈을 감았다. 여정 곳곳에서 마주해 온 추악한 단면마다 그는 등을 돌리고 싶었으나, 그때마다 매번 곁에서 고집스럽게 발을 멈추던 이가 있었다.
만약 그녀가 지금 이 자리에 있었다면... 결코 가만히 있지 않았을 것이다. 굶주림에 떨다 쓰러진 소년을 뒤로하고, 괴물에게 먹이로 내던져지는 이들을 두고... 절대 눈 감고 지나치지 않았을 것이다.
'고통받는 이들을 외면하는 무녀가 된다면, 저는 저 자신을 용서할 수 없을 거예요.'
시즈가 한때 뱉었던 말이 귓가에 다시금 울려 퍼졌고, 아로스는 목발을 고쳐 짚으며 고개를 들어 소년을 바라봤다.
"...너, 어디서 내려온 거지?"
소년이 떨리는 손가락을 들어 산맥 중턱을 가리키자, 벨라미가 화들짝 놀라 눈을 치켜떴다.
"잠깐, 설마... 형씨, 그 몸으로 대체 뭘 어쩔 셈이야? 지금도 간신히 목발로 서있는 거잖아!"
아로스는 잠시 발을 멈추고 소년의 얼굴을 내려다보다가 시선을 산으로 옮겼다. 한참 동안 산을 바라보던 그는 낮게 혼잣말을 흘렸다.
"......이 자리에 계셨더라면, 당신의 선택은 오직 하나겠죠."
"갑자기 뭔 소릴 하는 거야? 이봐, 형씨! 형씨!! 어디 가는 거야!? 미쳤구만. 그 몸으로 뭘 할 수 있다고—"
벨라미의 다급한 외침이 뒤에서 따라붙었지만, 아로스는 더 이상 멈추지 않았다. 헐거운 숨결 사이로 묵직한 결심이 굳어져 있었고, 청록빛 눈동자는 이미 어둠이 내려앉은 산맥의 깊은 곳을 꿰뚫고 있었다.
멀찍이 오두막 그늘에서 그 광경을 바라보던 에드바르의 손끝이 잠시 멈췄다. 구겨진 양피지가 바람에 흩날려 발치에 굴렀지만 시선은 오로지 아로스에게 머물렀다. 아직 꺼지지 않은 불씨가 저렇게 몸부림치는 모습을 본 것은 오랜만이었다.
오래전 잿더미 속에 묻어둔 무언가가 희미하게 되살아났다. 한때 스스로 내디뎠던 걸음의 기억, 불길에 스러져 가던 순간조차 버티게 했던 누군가를 위했던 미약한 감정. 그러나 그것은 곧 불편한 듯 찡그려진 눈매에 가려졌다. 가슴 언저리에 스쳐 간 감각을 그는 곧장 끊어내듯 부정했고, 남은 것은 다시금 깊게 가라앉은 냉소뿐이었다.
바다는 끝을 알 수 없는 회색빛 파도를 쉼 없이 토해냈다. 모래 위를 덮고 사라지는 흔적은 매번 달라졌지만 어디에도 아로스의 발자취는 남아 있지 않았다. 하얗게 부서지는 포말 속에서 녹아든 염기만이 하루하루를 갉아먹듯 되풀이되었고, 그 긴 시간 동안 바닷가를 거닐던 발걸음은 결국 공허한 궤적만 남겼다.
저녁빛이 수평선 너머로 기울어 갈 때마다 시즈의 가슴속은 더 무겁게 내려앉았다. 언젠가 다시 마주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보다 눈앞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 더욱 선명히 다가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미누스가 손에 쥔 혈석은 여전히 꺼지지 않았다. 미약한 청록빛은 바람과 파도에도 사그라지지 않고 깜빡이며 살아 있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그 빛이야말로 버틸 수 있는 유일한 이유였다. 그렇지 않았다면 벌써 무너져 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불안은 여전히 틈만 나면 스며들어 폐부를 죄어 왔고, 그때마다 입술을 깨물며 흔들리는 마음을 억눌렀다. 오미누스의 무표정한 옆모습이 스쳐갈 때마다 자신이 내뱉는 작은 한숨조차 불필요한 자극이 될 수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걱정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으나 드러내어서는 안 되는 감정이었다. 동요가 조금이라도 번져나가면, 그것은 아로스를 찾는 길에 도움이 되지 않을 뿐 아닌 곁에서 함께하는 이를 불쾌하게 만들 따름이었다. 그렇기에 시즈는 흔들리는 심장을 깊숙이 눌러 담고, 쏟아 오르는 조바심을 안으로 삼켰다.
말없이 발걸음을 옮기던 두 사람 앞에 해안선의 풍경이 서서히 달라졌다. 바람에 실린 비린내는 더 짙어졌고, 부서진 배들이 해변에 널브러져 있었다. 햇빛에 바래 하얗게 변색된 목재는 마치 부러진 갈비뼈처럼 삐죽 솟아 있었고, 녹슨 못과 갈라진 틈새마다 소금기가 하얗게 뭉쳐 있었다. 물에 반쯤 잠긴 채 방치된 그물과 통발에는 썩은 해초가 엉겨 붙어 있었으며, 틈새를 오가는 바다 게들이 그 속을 파고들다 사라졌다. 마치 오래전 생명을 잃고 방치된 시체처럼 해안가 전체가 고요한 잔해로 뒤덮여 있었다.
모래 언덕을 넘어가자 폐허로 변해 버린 마을이 드러났다. 소금기와 바닷바람에 갉힌 벽면은 회색 먼지처럼 바스러졌고, 지붕은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었으며 창문은 오래전에 깨져 어둠만 드리워져 있었다. 바닷바람에 찢어진 그물이 거미줄처럼 늘어져 있었고, 녹슨 철사가 창틀마다 얽혀 있었다.
시즈는 폐허를 지켜볼 때마다 아로스를 찾아 헤맨 지난날이 떠올라 가슴은 다시 조여왔다. 흔적 없는 바닷길에서 무력감을 삼켜야 했던 기억이 눈앞의 광경과 겹쳐졌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마을 안쪽으로 깊숙이 발걸음을 옮기자 바람이 휘몰아치며 낡은 문들이 삐걱이는 소리를 냈다. 그리고 그 틈새에서 그림자가 스쳐 지나갔고, 낡은 지붕 아래의 깨진 창문 너머로 희미한 실루엣이 번뜩였다. 오미누스의 푸른 눈동자가 날카롭게 그 모습들을 주시했고, 곧이어 붕대로 칭칭 감긴 손이 등허리에 걸린 칼날의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누군가 있어."
말이 끝나자 무너진 지붕 뒤편에서 또 다른 형체가 꿈틀거렸다. 어둠 속에서 눈동자가 번뜩였고, 두 사람이 마을 안쪽으로 더 깊이 발을 들일수록 웅크리고 있던 그림자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어떤 이는 천천히 집 밖으로 걸어 나왔고, 어떤 이는 좁은 골목길에서 기웃거리며 기척을 내비쳤다.
바람에 낡은 외투와 옷자락이 너울거렸다. 그 사이로 드러난 것은 짐승의 형상을 지닌 귀와 꼬리, 털이 듬성듬성 빠진 수인들이었다. 그들의 모습은 타리안에서 보았던 검은 늑대들의 위엄과는 전혀 달랐다. 명예와 품격을 잃지 않던 그들과 달리 눈앞의 수인들은 오랜 핍박과 소외 속에 내몰린 자들의 형상이었다. 눈빛은 움푹 꺼져 있었고, 제 모양을 잃은 손톱과 비쩍 마른 팔다리가 세월의 잔혹함을 웅변하듯 드러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던지는 시선에는 단순한 두려움만이 담겨 있지 않았다. 허기와 불안, 그리고 불길한 탐욕이 얽혀 들어 있었다. 조용히 두 사람을 훑는 그 눈빛들은, 마치 이방인의 가치를 저울질하는 듯 묘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사지가 멀쩡한 인간들은 오랜만인데."
수인 중 하나가 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오랫동안 말을 삼켜온 듯 갈라지고 떨리는 음성이었다. 그 한마디를 신호로 골목 구석과 낡은 천막 아래, 허물어진 집들 뒤편에서 다른 수인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그럴싸한 꼬맹이랑 계집 하나."
"애새끼는 육질이 부드러울 테니... 그놈들이 좋아하겠어."
"여자는 예쁜데. 무녀인가?"
거칠게 갈라진 입술과 주둥이 사이로 조악한 웃음들이 새어 나왔다.
"부드럽게 다뤄줄 필요 있겠어? 어차피 넘기면 끝인데."
"넘기기 전에 맛만 봐도 되잖아? 이 얼굴이야, 딱 그거잖아."
"하, 시끄럽게 울려나?"
누렇게 썩은 송곳니가 드러난 웃음 속엔 죄책감도, 머뭇거림도 없었다. 오직 두 사람을 어떻게 '처리할지' 음흉한 기색만이 번졌고, 흘끔거리던 눈빛은 곧 노골적인 탐욕과 조롱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그 비릿한 웃음은 오래가지 못했다. 시즈를 훑어보던 수인들의 시선이 오미누스에게 닿는 순간, 가장 앞에 서있던 수인 하나가 코를 벌름거리더니 미간을 찌푸렸다.
"......잠깐."
그가 손을 들어 동료들을 제지했다. 탐욕에 젖어 있던 눈빛이 순식간에 경계심으로 탁하게 변했다.
"이 꼬맹이...... 냄새가 이상해."
수인은 짐승 특유의 예민한 감각으로 공기 중에 섞인 이질적인 체취를 핥아냈다. 인간들은 맡지 못하는, 하지만 본능적으로 털을 곤두세우게 만드는 서늘하고 눅눅한 악취.
"틈새의 괴물들...... 놈들에게서 나는 썩은 내가 나."
그 말에 주위의 수인들이 일제히 움찔하며 오미누스를 다시 보았다. 그제야 그들의 눈에 기괴한 광경이 들어왔다. 제 키보다 훨씬 거대한 붕대 감긴 칼날. 성인 남성조차 들기는커녕 짓눌려 숨조차 쉬지 못할 법한 쇳덩이를 오미누스는 마치 깃털을 멘 듯 무표정한 얼굴로 서 있었다.
"저것 좀 봐. 저만한 크기를 아무렇지 않게 메고 있어."
"분명 보통내기가 아닐거야. 저놈 눈빛 좀 보라고. 절대 겁먹은 눈이 아니라니까?"
수인들은 본능적으로 뒷걸음질 치며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섣불리 덤벼들었다가는 뼈도 못 추릴지 모른다는 짐승의 직감이 경고음을 울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