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지
끔찍한 광경과 연이은 괴물들의 등장으로 시즈의 심장은 본능적으로 바싹 옥죄듯 요동쳤다. 긴장감과 두려움이 손끝을 타고 솟구쳤고, 반사적으로 이능을 일으키려던 그 찰나에 오미누스가 그녀의 양손을 단단히 붙잡았다.
"쉬이......"
속삭임과 함께 침묵의 손짓이 입술 앞에서 날카롭게 세워졌다. 오미누스의 눈빛이 날 선 검처럼 꽂히자 시즈는 억눌린 듯 움직임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검은 망토가 두 사람의 위를 덮고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천이 아니었다. 세상의 인과율을 벗어난듯한, 그림자의 장막과도 같은 은신의 결계였다. 시즈는 떨리는 숨결을 고르며 그저 망토의 미세한 틈으로 바깥을 들여다보는 것 밖에 할 수 없었다.
울루니아들의 울음이 폐허 위를 가득 메우며 길게 늘어졌다. 형체를 알 수 없는 사지와 뒤틀린 육체가 이리저리 고개를 젖히며 주변을 탐색했다. 질척거리며 바닥을 지나가는 기분 나쁜 소리와 코끝을 스치는 역한 숨결이 점점 가까워졌다가 다시 멀어졌다.
그렇게 긴 시간이 흐른 듯한 순간들 끝에, 놈들은 끝내 아무것도 찾지 못한 채 균열을 향해 몸을 돌렸다. 뒤엉킨 사지와 흐물거리는 육편이 다시금 검보랏빛 틈새 속으로 돌아가자, 폐허에는 불길한 적막만이 남았다.
모든 그림자가 완전히 사라지자 오미누스는 망토를 거두었다. 짙은 천이 걷히는 순간, 시즈는 억눌러왔던 숨을 거칠게 토해냈다.
"......대체, 저 괴물들이... 어떻게 신들의 관문에......?"
떨리는 음성과 거친 호흡은 진정되지 못한 채 끊기며 흩어졌다. 오미누스는 그런 시즈를 잠시 바라보다가 짧게 시선을 돌렸다.
"...관문 근처 해안가에 내가 머물던 작은 동굴이 있어. 부패가 그곳을 덮치지 않았다면, 잠깐 지내는 데 문제없을 거야."
오미누스의 담담한 말과 함께, 시즈는 떨리는 손끝을 움켜쥔 채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잿빛 바람이 스치는 폐허를 뒤로한 채 관문 가장자리의 황폐한 길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서쪽 하늘에 땅거미가 내려앉을 무렵 길 끝에서 바다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고, 그 앞으로 쭉 펼쳐진 해안가 절벽을 따라 난 좁은 길을 따라가자 바위틈에 작은 동굴 하나가 나타났다.
동굴 안은 한기가 서린 듯 서늘했다. 구석에는 과일과 약초가 담긴 바구니가 놓여 있었고, 어울리지 않게 은엽이끼가 촘촘히 깔린 침상이 포근하게 자리해 있었다. 시즈가 오슬오슬 떨며 두 팔을 끌어안자 오미누스가 모닥불의 잿더미를 툭툭 걷어내더니 부싯돌을 꺼내 불씨를 살렸다.
잠시 후, 타오른 불길이 동굴 안을 붉게 밝히며 차가운 기운을 밀어내자 오미누스는 바구니 속에서 붉게 익은 사과 하나를 집어 들어 아무 말 없이 시즈 쪽으로 던졌다. 시즈는 반사적으로 그것을 받아 들고는 잠시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예상치 못한 호의에 눈을 깜빡이던 그녀는 조심스레 중얼거렸다.
"...감사합니다."
사과를 베어 무는 순간, 아삭거리는 소리와 함께 시원한 과즙이 입안에 퍼졌다. 상큼한 단맛이 피와 연기, 부패의 잔향으로 메말랐던 감각을 잠시나마 씻어냈다. 그녀는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묵묵히 다시 한 입을 베어 물었다.
조용히 사과를 씹던 시즈는 문득 고개를 들어 오미누스에게 물었다.
"...그 망토 말인데요. 대체 어디서 난 건가요? 저희가 들키지 않은 게...... 그 망토 때문이잖아요."
그러나 오미누스는 시즈의 물음에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불길을 응시하는 그의 눈빛은 변함없이 차가웠지만, 잠시 다른 무언가를 꺼내려는 듯 시선이 미세하게 시즈를 향해 움직였다가 다시 모닥불을 향했다. 내키지 않는 듯, 혹은 불편한 듯한 망설임이 스쳐 지나갔지만 결국 그의 얼굴은 다시 굳은 무표정 속으로 가라앉았다. 시즈는 그 변화를 어렴풋이 느꼈음에도 감정을 좀처럼 드러내지 않는 그에게서 아무것도 읽어낼 수 없었다. 그녀는 사과를 내려놓고 고개를 숙였고, 모닥불이 타들어가는 소리만이 동굴 속을 메우며 두 사람 사이의 침묵을 더욱 길게 늘여갔다.
오미누스는 불길을 지켜보는 시선조차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그의 얼굴은 불빛에 드리운 그림자 속에서 단단히 닫혀 있었고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시즈는 베어 물던 사과를 잠시 멈춘 채 그의 무표정을 바라보다가 결국 또 한 번 고개를 숙였다. 모닥불이 타들어가는 소리만이 동굴 속을 메우며 적막을 더욱 길게 늘여갔다.
그렇게 적막이 길어지던 순간, 오미누스가 문득 침묵을 깨뜨렸다.
"......움직일 수 있겠어?"
"그렇게 피곤하지는 않은데... 무엇 때문에 그러시죠?"
시즈가 눈을 들고 바라보며 대답했지만 그는 이번에도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짧은 정적이 흐른 뒤에야 입을 열었다.
"아까 그 수인을 따라가던 길... 산 전체의 기운이 심상치 않았어."
오미누스는 품에서 낯익은 혈석을 꺼내어 불빛 앞으로 내밀었다. 돌 안쪽에 아른거리던 빛은 며칠 전까지만 해도 바닷가에서 희미한 빗줄기를 내뿜고 있었으나 그 흔적은 사라져 있었다. 청록빛 잔향조차 깜박이며 힘겹게 흔들릴 뿐이었다.
혈석을 바라보던 시즈는 불길한 징후가 현실로 다가온 듯 가슴이 서늘해졌고, 손끝이 알게 모르게 떨렸다. 그런 그녀를 곁눈으로 스친 오미누스의 목소리는 한층 무겁게 가라앉았다.
"적어도 산맥 어딘가에는... 그 인간을 찾을 단서가 있을지도 몰라."
그 말이 닿자, 시즈의 가슴이 크게 요동쳤다.
아로스. 그 이름만으로 가슴이 저리게 울컥 솟아오르는 감정이 밀려왔지만 시즈는 이를 삼키듯 숨을 고르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불이 꺼지면서 동굴 속을 휘돌던 마지막 불씨가 잦아들자, 어둠이 다시 두 사람을 감쌌다. 시즈와 오미누스는 발길을 돌려 수인의 손에 이끌려왔던 그 길을 거슬러 산속으로 되돌아갔다. 검은 바람이 썩은 나뭇가지 사이를 스치며 불안한 소리를 냈고, 관문에서 퍼져 나온 부패의 잔향이 아직도 산허리에 얽혀 있었다.
산속 길은 생각보다 험했다. 아니, 애초에 길이라고 부를 만한 흔적조차 거의 없었다. 바위틈은 비스듬히 벌어져 발을 디딜 때마다 자갈이 우수수 흘러내렸고, 독기로 눅눅해진 돌덩이는 조금만 힘을 주어도 미끄러졌다. 구불거리는 오솔길은 진흙탕처럼 질척였으며, 그 뒤로는 숨이 막힐 듯 오르막과 낭떠러지가 쉴 새 없이 교차했다.
한참을 오르던 중, 시즈의 발목이 돌부리에 걸리며 몸이 앞으로 기울었다. 균형을 잃고 허공으로 쏠리려는 순간 오미누스의 손이 그녀의 팔을 붙잡자, 시즈는 숨을 고르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짧은 대답 뒤에도 그런 순간은 몇 번이고 반복되었다. 가파른 경사에서 발이 미끄러질 때, 썩은 나무뿌리 아래 구덩이에 빠질 뻔할 때마다 오미누스의 손은 묵묵히 그녀를 붙들어냈다. 말없이 이어지는 그 손길은 무뚝뚝했지만 차갑게만 느껴지던 기운 속에서 묘한 안도감을 남겼다. 그렇게 한참을 올라 어느 지점에 이르자, 공기에서 느껴지는 변화가 분명해졌다. 불쾌하게 퍼져있던 부패의 독기가 점차 옅어지더니 매캐한 냄새는 바람에 실려 희미하게 흩어졌다.
그러나 숨이 틔인 듯한 안도도 잠시, 시야에 펼쳐진 광경은 다른 의미의 불안을 자아냈다. 산허리를 가득 메웠어야 할 나무들이 모조리 잘려나간 듯 사라져 있었던 것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생명의 숲 깊숙한 곳에서 나무의 숨결과 잎사귀의 속삭임을 온몸으로 느끼며 걸었던 시즈였다. 그 때문일까, 황폐해진 산허리의 풍경은 더욱 도려내듯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공허하게 벌어진 사면 사이로 바람이 휘몰아치며 흙먼지만을 말아 올렸고, 잘려나간 줄기마다 남은 그루터기들은 피멍처럼 벌겋게 드러난 채 스산한 기운을 뿜어냈다.
그때, 위쪽에서 미세하게 기척이 내려오자 시즈의 몸이 순간적으로 굳어지며 반사적으로 손이 오미누스를 향했다. 손끝에서 퍼져나간 은밀한 기운이 두 사람의 기척을 삼켜 감추자 바위 그늘 속에 드리운 어둠이 옷자락처럼 스며들었고, 이내 좁은 길을 따라 내려오는 형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새의 얼굴을 한 수인, 익인이었다. 눈은 매섭게 빛났으나 낡아 빠진 스케일 아머를 덧댄 간소한 갑옷은 이미 여기저기 금이 가 있었고, 손에 쥔 창 또한 녹이 잔뜩 올라 푸른빛조차 바래 있었다. 등 뒤에는 접혀 내려앉은 날개는 마치 잎맥처럼 쭈글어 들어 퇴화한 흔적만을 남긴 모습이었다. 바람에 스칠 때마다 미세하게 떨렸지만, 그 날개가 다시는 창공을 가르지 못하리란 사실은 누구나 알 수 있었다.
익인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주위를 살피다가 바위 틈새를 뒤적였지만 별다른 수확이 없는 듯 곧 다른 곳으로 발길을 돌렸다. 발톱이 바위를 긁으며 울리는 마찰음이 서서히 멀어지고, 그 형체가 완전히 사라지자 시즈는 천천히 손을 거두었다. 가려졌던 기척이 풀리며 공기 속의 긴장이 흐트러졌다.
잠시 눈빛을 교환한 두 사람은 익인이 내려왔던 길목을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좁고 구불거리며 이어진 계단은 날 선 바위와 바람 사이로 이어져 있었고, 위로 오를수록 불길한 기운이 길목을 삼켜내고 있었다. 그러던 중 바위틈 사이로 옆으로 꺾여 들어가는 그늘이 눈에 들어왔다. 마치 산이 숨기듯 움푹 패인 구석이었고, 가까이 다가서자 어둠 속으로 이어지는 입구가 모습을 드러냈다. 시즈가 발걸음을 멈추자 오미누스의 무언의 고갯짓과 함께 두 사람은 말없이 그 길로 들어섰다.
안쪽은 숨을 삼키는 듯한 암흑이었다. 손끝조차 보이지 않을 만큼 깊은 어둠이 이어졌고, 시즈는 낮게 숨을 고른 뒤 손끝에서 푸른빛의 빛줄기를 흘려보냈다. 은은하게 번진 광휘가 좁은 벽을 타고 퍼지자 거칠게 깎인 바위 통로가 드러났으며, 그 빛에 비친 바닥에는 커다란 검은 깃털들이 드문드문 흩어져 있었다. 날마다 쏟아진 흔적이 아닌, 마치 한때 거대한 날개에서 떨어져 나온 파편처럼 보였다.
어느덧 통로가 넓어지자, 두 사람은 어스름한 빛을 따라 발을 들였다. 돌 틈마다 박힌 암녹색 광석의 어렴풋이 빛나는 반짝임이 어둠 속의 실루엣을 비추고 있었다. 방 가운데에는 바위로 깎아 만든 의자가 하나 놓여 있었으며, 그 의자는 알 수 없는 이유로 앞부분이 깊게 움푹 패여 있는 뱀모양으로 조각된 팔걸이를 가진 의자였다. 가까이 다가서자 먼지의 매캐한 냄새와 더불어 피의 비릿한 향이 남아 있었고, 패여있는 앞부분과 그 아래의 바닥에는 검게 바랜듯한 진홍빛 얼룩이 음습하게 스며 있었다. 그것은 급히 닦아낸 흔적이 아닌 오랜 세월 동안 뭔가가 반복된 끝에 새겨진 자국처럼 보였다.
의자 너머에는 투박하게 다듬어진 바위 탁자가 있었는데, 그 위로 두툼하고 낡아빠진 일지 하나가 놓여 있었다. 해묵은 먼지로 얼룩져 있던 표지는 수많은 손길이 스쳐간 듯 모서리가 헤어져 있었다. 시즈는 손끝을 조심스레 그 위에 얹었다. 잠시 숨을 고른 그녀는 천천히 그 책장을 펼쳐 들기 시작했다.
처음 드러난 것은 보지도 듣지도 못한 낯선 글자였다. 선 하나하나가 기묘하게 얽혀 있었고, 문양 같은 곡선들이 나열되어 있었지만 그 어떤 언어와도 닮아 있지 않았다.
시즈의 눈빛이 당혹스레 흔들렸다.
"...읽을 수가 없네요."
속삭이듯 중얼거리며 곁눈질로 오미누스를 바라보았다. 책장을 기울여 그에게 보이자, 오미누스는 잠시 묵묵히 들여다보고는 고개를 돌렸다.
"난 글을 몰라."
당연하다는 듯 단호하게 내뱉은 말에 할 말을 잃은 시즈는 다시 책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페이지를 넘길수록 뚜렷한 규칙이 보였다. 곳곳에 찍힌 듯 적힌 숫자들, 그것만이 유일하게 알아볼 수 있는 흔적이었다. 그러나 글의 의미는 여전히 감춰져 있었고, 그녀는 불안한 손끝으로 조급하게 페이지를 넘겨나갔다. 그러다 불현듯, 글자 사이에 그림이 끼어들었다.
작고 연약한 형체가 삐뚤삐뚤한 선으로 그려져 있었다. 그것은 분명 익인의 어린 모습을 묘사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림을 보는 순간, 시즈의 숨이 목에 걸렸다. 작은 날개만은 어쩐지 또렷하게 그려져 있었으나 그 외의 부분은 기묘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길게 찢어진 눈, 뒤틀린 손가락, 몸통에서 비정상적으로 솟구친 뼈. 페이지마다 다른 형체가 이어졌고, 선 하나하나가 서투른 듯하면서도 섬뜩한 집요함으로 새겨져 있었다.
'다음 장...'
시즈의 손이 떨리며 책장을 넘겼다. 또 다른 아기 익인의 모습, 그리고 또 다른 기형의 그림. 어쩌면 삽화라 할 수도 있었지만, 그 불길한 실루엣은 단순한 기록 이상의 무언가를 말해주고 있었다.
손이 페이지를 빠르게 훑고 지나갈수록 그림은 점점 더 잔혹해졌다. 머리와 몸이 거의 분리된 형체, 부리 대신 구멍만 뚫린 얼굴, 차마 형상화할 수 없었는지 비명처럼 휘갈긴 검은 선들. 그러나 모든 그림 속에서 유일하게 변하지 않은 것은 날개였다. 매 장마다 날개만은 정성스레 그려져 온전하게 펼쳐져 있었고, 그것이 오히려 소름 끼치는 대조를 만들어냈다. 그렇게 한 장을 더 넘긴 순간, 그곳에는 흠 하나 없는 검은 깃털을 가진 익인의 아기가 그려져 있었다.
온전한 부리와 얼굴, 몸. 그리고 역시나 완전한 날개. 떨리는 시선으로 페이지 구석마다 적힌 숫자들을 다시 훑었다. 단순히 숫자를 적은 것이 아니었다. 그 이어진 숫자들이 가리키는 것은 수백, 어쩌면 그보다 더 긴 세월임이 분명했다.
시선은 자연스레 의자로 향했다. 움푹 패인 중앙과 그 아래에 겹겹이 스며 있던 진홍빛 얼룩이 겹치며 이곳이 일지 속 생명들이 태어난 장소란 것을 깨달은 순간 눈빛은 경악으로 굳어졌다. 시즈의 굳은 표정을 본 오미누스 또한 손을 뻗어 책을 낚아채 빠르게 훑었다. 완전한 아기 익인의 그림 뒤로 책장을 휘리릭 넘겼지만 페이지들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었고, 마지막 페이지에 영문 모를 거대한 방주하나가 그려져 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