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의 모략
지상 아래의 으슥하고도 깊숙한 곳, 태양의 손길이 닿지 않는 영원의 어둠 아래에는 숨겨진 도시가 있다.
카타디오.
그곳은 과거 지상에서 소외된 자들이 마지막으로 선택한 땅이었다. 대륙의 기반암을 그대로 깎아 만든 듯한 검은 석조 기둥들이 버티고 선 도시 중심부는 오래전에 사라진 문명의 폐허 위에 세워진 흔적들이 남아 있었다. 폐허 곳곳에 새겨진 문양들은 시간이 흐르며 닳아 희미해졌으나 여전히 과거의 잔재를 지워내지 못한 채 잔존해 있었다.
카타디오의 하늘이라 부를 수 있는 거대한 공동(空洞)의 천장 위로는 대륙의 심장부까지 이어지는 암반층이 겹겹이 쌓여 있었고, 간혹 균열 사이로 대륙의 눈물처럼 희미한 지하수의 방울이 떨어져 반짝였다. 도시의 외곽으로 갈수록 건물들은 점점 더 무너져 내려, 폐허가 된 시장터, 부서진 다리,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성벽의 잔해가 어둠 속에서 희미한 형체를 이루고 있었으나, 이곳 또한 기이한 인광(燐光)을 내뿜는 버섯 군락들이 불빛처럼 깜박이며 누군가 살아가고 있음을 알려주는 공간들이 있었다.
균열처럼 끝없이 얽힌 골목들과 아득한 통로 속에서는 거친 숨소리와 낮은 말소리가 가늘게 흘러나왔다. 피부와 시각이 암흑에 적응한 인간들, 다양한 외관의 수인, 혼종, 그리고 오래전부터 지하에 뿌리내린 토착 생물들이 함께 살아가는 도시. 그들은 서로를 경계하기보다는 자연스럽게 도시에 스며들어 어둠을 공유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아이들은 태어날 때부터 빛이 아닌 어둠을 보며 자랐고 그들에게는 낮과 밤의 개념조차 없었다. 출신도, 종족도 중요하지 않았다. 누구도 다른 이의 과거를 묻지 않았고, 누구도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증명할 필요가 없었다. 누군가는 주어진 운명을 받아들이고, 누군가는 보이지 않는 위계를 따라 움직이며, 또 누군가는 이곳에서도 여전히 거래를 하고,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샤비트는 대로를 따라 움직이며 그 모든 장면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소리를 남기지 않는 발걸음과 몸을 감싼 짙은 남색의 망토는 그림자처럼 흐르며 주변과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지나가는 길목마다 은밀한 시선들이 조용히 샤비트를 따라 움직였다. 카타디오에서는 누구도 다른 이의 지나침을 오래 바라보지 않았지만, 일부는 예외였다. 좁은 골목 어귀에서 혼혈의 소년이 입술을 깨물며 몸을 웅크렸다. 한쪽 벽에 기대 있던 노파는 눈을 가린 채 작은 목소리로 다른 사람에게 속삭였고, 가죽 두건을 뒤집어쓴 장정은 본능적으로 반걸음 물러섰다. 어둠 속에 적응한 이들조차 사도의 존재를 무시할 수 없었다. 샤비트는 그런 시선을 의식하지 않았다. 아니, 의식할 필요가 없었다. 이곳에서 자신을 함부로 막을 자는 없었고, 설령 있다 한들 지금은 상대할 가치가 없었다. 그가 향하는 곳은 정해져 있었다. 도시 깊숙한 곳, 무너진 문명의 잔해 속에 숨겨진 회담의 자리.
어느덧 발걸음은 도시의 가장 깊고 거대한 구덩이 가장자리에 닿았다. 한때 그곳은 도시의 모든 오물과 죽은 자들의 시신이 버려져 소각되는 곳이었지만 지금은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구덩이의 중앙, 형상조차 모호한 짙은 아우라 위로 거대한 무언가가 희미한 인광을 내뿜으며 드러나 있었다. 카타디오의 지하 깊숙한 곳에서 발견된 그것은 마치 뒤틀린 심장, 혹은 끔찍한 자궁을 연상시키는 거대한 생명의 요람이었다. 수십 개의 거대한 핏줄 같은 촉수들이 구덩이 벽면에 달라붙어 희미하게 고동치는 요람을 공중에 고정하고 있었다. 반투명한 막으로 표면이 덮여 있는 요람의 안에서는 거대한 인간의 형상을 한 무언가가 희미하게 꿈틀거렸다. 더 끔찍한 것은 그 요람을 반쯤 감싸고 있는 기괴한 구조물이었다. 마치 살아있는 생물의 내골격과 점액질로 뒤엉켜 만들어진 듯한 둥지는 벽면 전체에 퍼져나가며 요람의 심장소리에 맞춰 맥동하고 있었다. 둥지 곳곳에 뚫린 수많은 구멍 속에서는 인간의 키와 맞먹는 거대한 노래기들이 혐오스러운 다리를 꿈틀거리며 기어 나왔고, 그것들은 둥지와 요람의 표면을 오가면서 무언가를 토해내고 다시 빨아들이는 끔찍한 행위를 반복했다. 그곳에서 피어오르는 지독한 독기는 주교의 권능으로 구현된 살아있는 그림자들이 거대한 장막처럼 둘러싸, 카타디오의 다른 곳으로 퍼져나가는 것을 간신히 막고 있었다.
주교는 다가올 전쟁을 위한 준비라는 말을 끝으로 자세한 설명을 덧붙이지 않았다. 샤비트는 잠시 그 압도적인 광경을 바라보다가, 이내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샤비트는 거대한 광장을 지나 높은 계단을 오른 후 신전의 잔해 속으로 들어섰다. 벽을 타고 흐르는 물줄기가 축축한 공기를 머금었고, 희미한 분홍빛 불꽃이 서린 등불들이 무너진 회랑의 기둥에 놓인 채 어둠을 밝혔다.
그 안쪽에는 원형으로 이루어진 회담장이 있었다. 이곳은 공허의 신앙을 따르는 고위 계층들의 중대한 논의가 이루어지는 자리였다. 샤비트가 모습을 드러내자 회담장의 끝에 앉아 있던 말가드가 고개를 들었다. 흉터가 깊이 파인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왔군, 샤비트. 기다리고 있었다."
말가드의 낮고 거친 목소리가 회담장을 울렸다.
"일찍들 와계셨군요. 제가 너무 늦은 것이 아닌가 모르겠습니다."
샤비트가 남아있는 마지막 빈자리를 채우면서 말하자, 그의 오른편에 있던 세르비안이 두 손을 조용히 맞잡으며 덧붙였다.
"신경 쓸 것 없소. 다들 도착한 지 그리 오래되진 않았으니까. 이제 모두 모였으니, 회담을 시작하도록 하지."
세르비안의 반대편에서 등을 기댄 채 앉아 있던 나우레스가 손가락으로 의자의 팔걸이를 두드렸다.
"그렇다면 어디 한 번, 본론으로 들어가 보도록."
그의 목소리는 장난기 어린 듯하면서도 진지함을 잃지 않은 묘한 억양을 지니고 있었다. 회담의 시작과 동시에, 말가드가 단도직입적으로 입을 열었다.
"지난번에 했던 이야기로 바로 넘어가지. 그날에도 누누이 말했지만, 용인들의 세력과 협력한다는 건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니다. 그들은 우리가 쉽게 다룰 수 없는 존재들이니까."
세르비안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하지만 이 결정은 이미 주교께서 내리신 것. 우리야 감히 그 뜻을 함부로 판단할 이유가 없지 않소?"
나우레스가 가볍게 웃으며 손을 턱에 괴었다.
"그야 그렇지. 하지만 그 무식한 짐승들을 믿을 수 있나? 놈들이 벌써 그 협약을 어겼다고 들었다만."
샤비트는 조용히 그들의 대화를 지켜보았다. 용인들과의 동맹은 비디아가 오래전부터 예상했던 흐름이었지만 여전히 사도들 사이에는 미묘한 의구심이 떠돌고 있었다.
"믿든 믿지 않든, 주교께서 결정하신 바가 아니겠습니까."
샤비트가 낮은 목소리로 말하자, 말가드는 두 손을 깍지 낀 채 샤비트를 바라보았다.
"그대는 용인들을 신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신뢰라기보다... 저희 또한 그들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죠. 불편한 동맹임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용인들의 몸 안에 흐르는 고룡의 힘은 가벼이 넘길 것이 아닙니다. 언제나 한정적인 자원으로 싸워왔던 저희에게 있어서는 가뭄의 단비와도 같은 것과 다름없죠."
샤비트의 말에 회담장 안의 분위기가 잠시 가라앉았다. 불편한 동맹. 사도들 모두 그 의미를 이해하고 있었다. 잠깐의 침묵이 흐른 뒤, 세르비안이 주제를 바꾸듯 조용히 적막을 깨뜨렸다.
"그렇다면 동맹에 관한 이야기는 잠시 접어두고, 일전에 못다 한 이그니카에 대해 다시 논의를 해보도록 하지. 우린 아직 불꽃의 고원을 뚫을 방법을 찾지 못했소."
말가드가 거친 손으로 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불의 장벽을 말하는 건가. 만약 서쪽 대륙에 많은 인력을 사용하지만 않았더라면... 그렇다고 이제 와서 땅굴을 파기에는 너무 늦었어."
나우레스가 덧붙였다.
"울루니아들은 원체 멋대로 움직이니 어찌할 방도가 없고... 아무래도 파도의 악마들이 불길에 막힐 것을 예상하지 못한 게 문제로군. 그 괴물들도 겁을 먹을 줄 아는 건가? 벌써 15년이나 흘러서 얼마나 버틸지도 모르고 말이야."
"두려움이 문제가 아니오. 그 불길은 단순한 화염이 아닌 과거 '불의 심판'을 일으킨 신의 잔재니까. 한 번 타오르면 멈추지 않는 불길이지."
사도들의 이야기를 조용히 듣고 있던 샤비트는, 뭔가를 떠올린 듯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그 불길을 잠재울 방법을 찾아야겠지요."
"뾰족한 수가 있나?"
"최근, 평원의 협곡 어딘가에 이그니카의 불길이 일어난 흔적들을 발견했습니다. 그 힘은 단순한 마법이 아니었지요."
"불의 사제일 가능성이 있다는 말인가?"
"그럴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확실한 것은 아닙니다."
"설령 그 흔적이 불의 사제의 것이라 한들, 그것이 지금과 무슨 관련이 있다는 것이오?"
샤비트의 시선이 회담장을 가로질렀다.
"여기 계신 모든 분들이 아시다시피, 이그니카는 지금 혼란을 겪고 있습니다. 그 덕분에 아트마라는 세력이 생겨 대외적으로 약해졌다는 것도 잘 알고들 계실 겁니다."
"그거야 뭐, 이제 와서 깨달을 것은 아닌 것 같은데. 꽤나 오래된 일이 아닌가."
"맞습니다. 하지만 그 이유를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까?"
"이유라...?"
"도시를 지탱하던 사제들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짧은 침묵이 회담장에 내려앉자, 샤비트는 다시 말을 잇기 시작했다.
"이그니카를 유지하는 힘은 단순한 군사력이나 방벽이 아닌, 그곳을 지탱하는 신앙과 그 중심이 되는 사제들입니다. 하지만 지금의 혼란을 보면 그들이 더 이상 남아있지 않다는 뜻 아니겠습니까?"
나우레스가 피식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배신을 했다는 말인가?"
"가능성이 높습니다."
샤비트는 조용히 말을 이었다.
"또한, 얼마 전 동쪽 해안에서 불을 다루는 자들에 대한 정보를 들었습니다."
말가드가 흥미를 보이며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그들도 사제들이라고 생각하는 건가?"
"아직 확실하진 않습니다. 하지만 만약 정말 불의 사제들이라면, 그들에게 불의 장벽을 없애달라고 부탁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회담장에 앉아 있던 사도들이 각자 생각에 잠겼다.
"말을 듣지 않는다면... 강제로 하게끔 만들어버리면 그만입니다. 방법은 많습니다."
샤비트의 말에, 세르비안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나쁘지 않은 제안이오."
"제법 흥미로운 접근법이야. 그들과 접촉할 수만 있다면 불의 장벽을 지워버리는 것은 시간문제겠군."
"만약 그 계획이 성공한다면... 제아무리 이그니카라 해도, '그것'이 깨어나는 순간 용인들과 파도의 악마들의 협공을 막아낼 수 없을 테지."
회담장의 공기가 바위처럼 가라앉았고, 사도들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샤비트에게 향했다.
샤비트는 조용히 눈을 감으며 4개월 전의 실패를 떠올렸다.
시스테나 전선. 그리고 모든 것을 훼방 놓았던 거인. 원래 계획대로라면, 그날 전선은 완전히 붕괴되었어야 했다. 무녀는 자신의 손에 넘어왔어야 했고, 전선의 병력은 재정비조차 하지 못한 채 몰살당했어야 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거인의 등장으로 모든 것이 어그러졌다. 카브르를 희생해서 만들어낸 괴물은 거인의 손에 무참히 도륙당했고 무녀마저 놓치고 말았다. 물론 완전히 실패한 것은 아니었다. 결과적으로 놈들은 전선을 버리고 남쪽으로 도망쳤으며, 언젠가는 파도의 악마들이 엘라리모스로 이동할 수 있는 초석이 되었다.
그러나 샤비트는 만족할 수 없었다. 이번 계획까지 실패한다면, 주교의 눈에 들 만한 새로운 구실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천천히 다시 눈을 뜨는 순간, 회담장의 시선은 여전히 자신에게 향하고 있었다. 그 시선들 속에는 익숙한 질투심이 섞여있었다. 샤비트는 꽤 오래전부터 일부 사도들이 자신을 탐탁잖게 여기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말가드나 세르비안 같은 핵심 사도들은 여전히 샤비트의 영리함과 행동력을 높게 샀으나 구석에 앉아 있는 몇몇 능구렁이 같은 무능력자들은 생각이 달랐다. 위험한 최전선에 나서지도 않으면서 입으로만 교리를 읊어대는 자들이 다소 냉담한 태도를 보인 지 오래였기에, 일전의 전선에서 있던 일을 구실 삼아 무녀를 확보하지 못한 점을 문제 삼을지도 몰랐다.
'손 하나 까딱하지 않는 멍청한 작자들이 나를 평가할 자격이라도 있나?'
무능은 배신보다 더한 죄악이다. 교리의 그림자 뒤에 숨어 떨어진 부스러기 권력에 만족하는 쥐새끼들. 놈들이 어둠 속에서 찍찍거릴 때, 길을 만드는 것은 결국 자신과 같은 피를 묻히는 자의 손이다. 역사는 주둥이가 아닌 칼자루를 쥔 자만을 기억할 테지만 샤비트는 그 생각들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지금은 입을 다물고, 다시금 자신의 가치를 입증해야 할 때였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