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의 곡소리를 뒤로 하다.

by 한냥이

"갑자기 대학원은 왜?"

남편이 물었다.


"원래 하던 거잖아."

내가 대답했다. 왜 자신감 없는 목소리가 나왔을까?


"해서 뭐 하려고?"

남편이 재차 물었다.


다짜고짜 대학원 박사과정 복학을 하겠다고 하니 남편은 의아했다.

책임져야 할 어린아이가 둘이나 있는 마당에, 나의 부재는 곧 남편의 수고를 의미했기 때문이다.

신혼 때 대학원 다니던 상황처럼 마냥 응원해 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지만 남편은 나를 만나 개화된 사람이었고, 나의 복학을 받아들였다.


복학한 학기에 3과목을, 그다음 학기에 4과목을 들었다.

대학원생이 한 학기에 최대로 들을 수 있는 과목이 4과목인 것을 고려하면, 난 정말 풀타임 학생처럼 달렸던 것이다.


수업은 어찌어찌 들었다.

아침 일찍 첫째 아이를 유치원에, 둘째 아이를 어린이집에 등원시키고 바로 학교에 갔고, 하원 시간인 3시 반에 맞춰 집에 돌아왔다. 그야말로 시간 맞춰 애 데리러 바삐 뛰어가는 '애데렐라'의 삶이었다. 또는, 남편이 퇴근하고 돌아온 후에 저녁 수업을 들으러 갔다가 아이들이 잠든 후에 돌아왔다.


문제는 저녁에 집을 나설 때였다.

엄마 가지 말라며 울고 불고 떼쓰는 아이들을 뒤로한 채 학교에 가는 길이면, '내가 무엇을 위해, 대체 뭐가 되려고 이렇게 아이들과 남편을 희생시키고 있는 거지?', '아직 만 4살, 만 2살의 어린아이들을 두고 다시 공부하겠다고 마음먹었던 게 너무 섣불렀던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더욱이, 돈 버는 일도 아니고 언제 끝날지 모르는 이 학업을 위해 아이들을 힘들게 하는 일은 나를 엄청난 죄책감에 휩싸이게 했다.

첫째 아이는 엄마가 학교 가는 날이면 전날부터 불안해했고, 차라리 내게 회사를 다니라고 말했다. 자기도 유치원에 가있는 낮에 회사를 갔다가 저녁에는 돌아오라는 것이다.

둘째 아이는 엄마와 떨어지는 것이 너무 힘든지 잘 다니던 어린이집 등원 거부를 보이기 시작했다.

남편과 시댁의 눈치도 보였다. 무책임하게 아이들을 두고 취미생활 하러 가는 엄마처럼 보였다.


어느 날은 아이들의 곡소리를 들으며 문을 나서다 이 소용돌이치는 마음을 주체하지 못 한 채 친정엄마에게 전화를 했다.

아이들이 나에게 '짐'이라고 말했다. 이 정도 키워줬으면 된 거 아니냐고, 내가 언제까지 아이들한테 매여있어야 하냐고 하소연했다.

아이를 낳고 뭐 하나 쉽게 선택할 수 없는 내 삶이 너무 답답했다. 그냥 내가 하고 싶은 것만 하며 살 수는 없었다.


양육과 학업을 동시에 하는 것은 생각보다 버거웠다.

외부 도움 없이 오로지 남편과 둘이서 아이들을 돌보고, 집안일하고, 학교 수업에 다녀오고, 아이들이 잠든 10시 넘어서 과제를 시작하면 새벽 2시에 잠들기 일쑤였다.


힘들었지만,

다시 펼쳐진 나의 삶에 활기를 얻었고 행복했다.

'가정'이 아닌 다른 곳에 소속되어서 좋았다.

함께 건설적인 대화를 나누는 동료들도 있어서 좋았다.

오랜만에 안 쓰던 뇌를 쓰는 느낌도 좋았다. '고뇌'라는 것을 얼마 만에 해보는가.


열심히 공부했고, 실제로 연구를 수행했고, 저명 학술지에 게재까지 했다.

그렇게 내가 원하는 도파민 폭발하는 삶을 다시 살기 시작했다.


일과 가정을 동시에 병행하는 내 모습에 스스로가 감탄했다.

그런데, 너무 자만했었나 보다.

그 해가 끝나갈 무렵, 암 진단을 받았다.

내 나이 서른셋. 다시 삶이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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