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둘과 서른넷, 그리고 네 살
초등학교를 다니던 무렵, 하교 시간에 부모님이 집에 안 계실 때면 현관문 문고리에 달려 있던 우유 주머니 안에서 열쇠를 찾아 문을 열고 들어가곤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꽤 용감한 방법이지만, 그땐 모두가 그렇게 열쇠를 사용했다. 내가 10살쯤 되었을 때, 엄마는 나에게 목걸이에 달린 집열쇠 하나를 내어주며 절대 잃어버리면 안 된다고 신신당부했다. 알 수 없는 책임감과 불안감에 혹시라도 잃어버릴까 봐 주머니 속의 열쇠를 한 시간에도 몇 번씩 만지작 거렸다. 그래서 밤에는 늘 손에서 쇠 냄새가 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 집은 그 시절 다른 집들이 그러하듯 편리함의 유행에 맞춰 열쇠를 도어록으로 변경했다. 차가운 금속들이 철컥거리며 돌아가는 소리보다는 산뜻한 전자음이 더 듣기 좋았고 무엇보다 열쇠를 더 이상 들고 다니지 않아도 된다는 점에서 얼마나 큰 해방감을 느꼈는지 모른다. 그렇게 열쇠는 내 인생에서 많이 멀어졌었다.
지구 반대편으로 이주한 첫날, 잊고 살았던 열쇠의 존재를 다시금 마주했다. 부동산 업자는 나에게 열쇠를 한가득 주며 절대 잃어버려선 안되고, 잃어버릴 경우에 발생하는 비용에 대해서 구구절절 설명했다. 아파트에 들어올 때 써야 할 열쇠와 집 현관문을 여는 열쇠, 우체통을 여는 열쇠를 다 따로따로 하나씩 설명해 주었다. 그리고 내 손에 열쇠꾸러미가 내려놓아지는 순간, 한참을 잊고 살았던 책임감과 불안함이 엄습해 왔다. 유럽은 아직도 열쇠를 더 많이 쓰고, 도어록을 믿지 못한다고 듣기는 해왔던 터라 놀랍진 않았지만 이 열쇠라는 것이 꽤나 내 삶에서 성가실 것을 너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나와 케이에겐 현관문을 닫기 직전에 서로에게 열쇠 챙겼냐고 묻는 습관이 생겼다. 언제나 만져지는 곳에 두고 싶어서 가방 안 보다는 바지 주머니 한쪽이나 재킷 안쪽 주머니에 넣고 다닌다. 잘그락 소리와 함께 무게감이 느껴진다. 처음에는 전자식 도어록을 쓰지 않는 이 아날로그 도시에 대해 불평하기도 하고, 신발까지 다 신고 열쇠를 깜빡한 걸 알게 되어 신발을 신은 채로 껑충껑충 집안까지 들어갔다 오기도 했다. 친구 브이에게선 열쇠를 들고 나오지 않아서 열쇠공을 집으로 불러서 꽤 큰돈을 지불했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시간이 조금 흐르니 고양이는 나와 케이가 저 아래층부터 계단을 올라오며 열쇠를 짤랑거리는 소리에 귀를 쫑긋 세우고는 현관문 코 앞까지 나와 배를 까고 기다리게 되었다. 산뜻한 전자음은 아니지만, 여러 금속이 마찰하며 내는 짤그락 거리는 소리가 고양이에게는 하루 중에 가장 기다리는 시그널이 되었다. 그래서 번거롭긴 하지만 늘 계단을 올라오면서 미리 열쇠를 꺼내 올라가고 있다는 소리를 내는 습관도 생겼다.
이곳에서의 첫 주말, 중고 자전거를 구입하기 위해 자전거 플리마켓을 찾았다. 케이는 케이와 꼭 맞는, 나는 나다운 자전거를 하나씩 골랐다. 자전거 자물쇠가 워낙 비싸다고 들은 탓에 서울을 떠나기 전 다이소에서 다이얼식 자전거 자물쇠를 사 왔었고, 그걸 보고 지나가던 남자가 우리한테 말했다. 다음 달에도 자전거를 사러 올 예정이냐고. 그런 다이얼식 자물쇠는 누구나 쉽게 다 풀 거고, 이 도시는 자전거 훔쳐가기로 악명이 높다고. 그렇게 내 열쇠 꾸러미에는 세상에서 가장 아날로그 한 형태지만 튼튼한 자전거 자물쇠 열쇠가 추가되었다. 케이의 스페어 열쇠도 함께.
이곳에서 4개월 차인 나는 현재 총 7개의 열쇠가 달린 꾸러미를 언제나 주머니에 넣고 다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