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사람을 보면 처음 말투부터 까칠한 이들이 있다.
눈빛은 경계 모드, 말투는 공격 모드, 몸가짐은 “다가오지 마시오” 모드.
우리 옆집에도 그런 아저씨가 있었다.
술만 마시면 일단 동네가 시끄럽고,
그 유명한 시그니처 멘트가 터진다.
“뭐어—얼 봐!”
그게 신호탄이다.
그리고 바로 이어지는 행동은
멱살 잡기 혹은 목덜미 잡기.
(나는 두 버전 다 체험했다.
고객 경험이 아주 풍부하다.)
하지만 다음 날이면 꼭 사과를 한다.
그걸 보면 더 애매해진다.
무서워해야 할지, 불쌍해해야 할지.
사실 그런 사람들을 보면 마치
온몸에 유리 파편을 붙여놓은 사람 같다.
가까이 가면 스스로 베이고, 상대도 베이게 만든다.
어릴 적 학교 담벼락 위에 올려둔 깨진 병조각처럼,
그들도 그렇게라도 해야 자신을 지킬 수 있었던 건 아닐까 싶다.
도둑을 막기 위해 올려둔 유리조각은
결국 그 집을 지키지만,
담벼락 아래를 지나는 사람에게는 괜히 심장이 철렁 내려앉게 만든다.
까칠한 사람들도 비슷하다. 세상을 견디기 위해 날카로워졌지만,
결국은 그 날카로움 때문에 스스로도 피 흘리며 산다.
그래서 나는 요즘 그런 사람을 보면
먼저 이런 생각을 한다.
‘아… 저 사람도 언젠가 크게 베였구나.’
누군가에게 상처를 너무 깊게 받아서, 그 자리에 유리조각을 붙여놓고 버티는 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면 마음이 조금 누그러진다. 그래서 나는 요즘 가끔 이렇게 속삭인다.
“괜찮아요. 당신이 그렇게 날카로운 건… 그냥 살아남으려던 거잖아요.”
그리고 사실 그 말
타인에게 하는 척하지만 결국 나에게 하는 말이다.
나 역시 꽤 오랫동안 온몸에 유리조각을 달고 살았으니까. 까칠함은 나를 보호했지만, 동시에 사람들을 하나둘 밀어냈다.
그래서 나는 이제 그 조각들을 하나씩
떼어내는 연습을 하고 있다.
물론 그렇다고 세상이 갑자기 마시멜로처럼 폭신해지는 건 아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조각을 떼어낼 때마다 오래 눌러놨던 슬픔이 조금씩 흘러나온다.
그건 나쁜 일이 아니다.
슬픔이 나가야, 사람이 들어오니까.
까칠함이 슬픔을 배웅할 때, 우리는 조금 더 사람다워진다.
그건 거창한 변화가 아니다.
그냥 “괜찮아요.”라는 말을 자연스럽게 내 마음에서부터 꺼낼 수 있는 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