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수 없는 두려움에 누명을 씌우지 말라.

이름 없는 두려움이라는 인간의 무지

by 이건

쌀쌀한 날씨에는 따뜻한 국물이 생각나기 마련이다.

편의점으로 들어가 오댕과 함께 뜨거운 국물을

들이키려는 순간 내 앞에 있는 어떤 여자분이 갑자기

자신의 머리를 툭툭 치기 시작했다.

어딘가 불편하신 분이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고

나는 계속해서 국물을 홀짝 거렸다.


그리고 갑자기 숙이고 있던 얼굴을 드는 순간

물감을 칠한 것처럼 차갑게 변한 파란얼굴

입에서 흘러내리는 하얀거품

이마의 핏줄

기마자세로 경직 된듯한 몸짓과 들어올린 손

그리고 외마디 비명....


재빨리 무슨일인지 알아차리기도 전에 나는

겁에 질려버렸다. 간질발작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것은 그로부터 20~30초 가량 지났을

무렵이었다. 사람들이 모두 도와주고 싶은 얼굴

이었지만, 쉽사리 다가갈 수 없었다.


잠시뒤 엠뷸런스를 부르고, 입을 벌려 혀를

깨물고 있지는 않은지 확인하고 안정을

취하게 한 뒤 응급실에 옮겨진후 편의점은

다시금 공포스런 상황에서 안정을 되찾아갔다.

모두 의자에 앉아 숨을 몰아쉰 후 놀란 가슴을

쓰러내렸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사람들의 얼굴에는 공통된 감정이 떠올랐다.

도와주고 싶지만 다가갈 수 없는 표정.

그건 잔혹함이 아니라, 본능이었다.

‘두려움’이라는 본능이 우리 발목을 잡고 있었던 것이다.


그 장면이 오래도록 머릿속에 남았다.

도움을 주지 못한 죄책감보다,

내 안에 있던 ‘두려움’의 정체를 바라보는 게 더 괴로웠다.

나는 공포영화를 볼 땐 태연한데,

현실의 공포에는 너무나 쉽게 굳어버린다.

그건 아마도 ‘알 수 없음’ 때문이다.

인간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을 만나면

본능적으로 도망치거나 멈춘다.


생각해보면, 옛날 사람들은 이런 일을 보면

“귀신 들렸다”고 했을 것이다.

지금은 ‘발작’이라 부르지만,

그때는 ‘신내림’이나 ‘저주’였다.

그들은 이해할 수 없는 두려움에 정의를 내리기 위해 ‘굿’을 했다.

두려움을 몰아내기 위해 북을 치고,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세상에 이름을 붙였다.

그건 미신이 아니라,

두려움을 견디는 인간의 방식이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날 편의점에서 본 장면을 떠올리며,

문득 ‘굿’이라는 행위가 조금은 이해됐다.

두려움의 정체를 알 수 없을 때,

우리는 그것을 의식화해야만 견딜 수 있다.

지금의 나는 ‘의학’이라는 이름으로 이해하지만,

그때의 사람들은 ‘귀신’이라는 언어로 받아들였다.

이름이 다를 뿐, 두려움을 다루는 방식은 같다.


그러나 때로를 그렇게 섣불리 이름을 붙여서는 안되는

상황이 허다하다. 그리고 삶이 불편해진다.

어릴적 귀신을 쫓아내야 한다며 박수무당에서

한시간 가량을 두들겨 맞은 적이 있었다.

그리고 집에와서 몸져누워 이틀간 골골 댄 적이 있었다.


알지 못하는 두려움은 때로 타인을 고통속으로 몰아넣을 때도 있다.

마치 마을의 수호신에게 인간재물을 바쳐야 하는 경우처럼

우리의 일상에서도 누군가의 평안을 위한 재물이 되어야 하는

상황은 역사에서도 계속되어왔다.


하지만 문제는, 그 과정에서 진짜로 아픈 사람이

‘귀신 들린 사람’, ‘불길한 존재’로 낙인찍히는 상황이다.

결국 그 사람은 위로가 아니라 폭력을 받게 되고,

때로는 가족이, 때로는 마을이,

그 사람을 ‘공동체의 평안을 위한 희생양’으로 만들어버리기도 한다.

공포가 만든 집단의 자기합리화는 그렇게 다른 이름으로

붙여져 불리게 된다.


“귀신들린 사람”이라 불리는 이유는 간질이었고,

“마녀”라 불렀던 것은 약초꾼이었으며,

“이상한 사람”이라 부르는 이는 사실 힘들어하는 누군가 일 수도 있다.

알지 못하는 두려움은 언제나 누군가를 제물로 삼았다.

중세엔 마녀가, 조선엔 귀신이,

지금의 세상엔 ‘이상한 사람’이 그 역할을 맡는다.

인간은 불안을 통제하기 위해 이름을 붙이고,

그 이름이 틀리면, 또 한 사람이 상처 입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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