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과 현실이 충돌하다
4 연강 후 지치고도 지친 발바닥이 정류장 땅을 밟을 때 외쳤던 말이다.
내 고등학교는 기숙사 학교였다.
고3 9월 모의고사 국어, 원점수 95점. 전교 130등...
3학년이라 전교 등수에 내성이 생긴 줄 알았는데 세 자리 등수는 받아도 받아도 기분이 좋진 않다.
그냥 뭐 그러려니, 내 옆에 있는 친구들이 정말 우수하군. 생각하고 밥 먹으러 갔다.
잠깐 내가 다녔던 고등학교에 대해 설명하자면,
아주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
성적에 굉장한 날을 서며 예민하게 여기는 친구들과 나처럼 그냥 수용하며 다니는 친구들
고등학교 공부란.. 내가 얘보다 3시간 더 공부했다 해서, 얘보다 더 좋은 학원을 다녔다해서, 더 좋은 과외선생님과 함께 했다 해서 성적이 오르는 구조가 아니다.
진정 자신만의 공부 방법을 찾지 못한 채 타의적으로 주어진 문제를 풀고 강의를 듣는 것은 도리어 독이 되기 때문이다.
사실 나도 처음부터 수용과 관용의 스탠스를 취했던 것은 아니다.
당장 중학교 때까지만 해도, 나의 목표는 무조건 전 과목 100점이었으니
중학교에 들어가 첫 시험을 전교 1등으로 문을 열어버리니 그 자리가 아니면 안 될 것 같은. 그 자리는 평생 내 자리가 되어야 한다는 강박에 휩싸였다.
이런 강박은 어느 정도 공부에 원동력을 제공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나에게 올가미가 되었으며 이렇게 공부하다가는 나의 마음도, 나의 성적도 모두 다치리라 생각이 들었다.
그래.. 나를 보호하자 라는 생각으로 서서히 압박을 줄여나갔고
이런 전교 1등이 전국에 모인 학교가 우리 고등학교라는 점을 늘 되새겼다.
내가 1등이 아닌 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야, 계속 1등을 지키려다가는 내가 먼저 지칠 거야
하루아침에 바뀌진 않았지만 계속해서 나를 다독였다.
온전히 나에게 집중하며.. 그렇게 성적을 받아들였다.
돌이켜보면 나의 수험생 시절은 뭐 그렇게 즐겁지도, 힘들지도 않았다.
그저 오늘 아침은 무엇일까 생각하며 식당으로 내려가고, 오늘 풀 실모를 한 아름 품 안에 안고 자습실로 향했다.
그리곤 열심히 시간 맞춰 실모를 풀고 채점하고 좀 잘 봤으면 기분 좋은 하루, 못 봤으면 심란한 하루.. 의 반복이었다.
가끔은 숨이 막히기도 했었다. 뭐 심리적 압박보단 물리적 압박 때문이었는데 좁은 한 반에 36명이 붙어있으니 고밀도의 환경이 조금 버거웠을 뿐.
이런 생활에도 나를 무너지지 않게 지탱해 주었던 것은 마냥 내 뇌가 만들어낸 대학생활의 환상적 미래였다.
대학에만 가면, 이런 반복적인 생활에서도 벗어나고!
급식을 더 이상 먹지 않아도 되며!
정말 하고 싶었던 전공과 교양과목만을 공부할 수 있겠지?
그리고 맨날 보던 이 친구들을 떠나 다양한 사람들을 얼마나 많이 만날 수 있을까
물론 충분히 대학 생활 때 일어나는 일이다.
그런데 한 가지 간과한 것이 있었으니..
내가 자유를 무한으로 얻은 대신, 나는 사회에 막연히 던져진 이제부턴 나 혼자 나를 건설해나가야 하는 유랑자의 신분이었다.
학교는 자유를 조금 억압하는 대신, 매일매일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방향을 제시해 준다.
이 방향이 아니라면 담임 선생님은 친절히 나를 불러 상담을 해주셨고 올바른 루트도 짚어주셨다.
사회는.. 그렇게 해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
지도교수님? 부모님? 아니.. 내가 이젠 너무 커버린 것인지 그분들도 방향을 제시해 줄 순 없으신 실정이니.
내가 마음대로 수업에 가고 싶지 않다면 안가도 되며 (다만 학점은 지하 깊은 곳으로 추락하겠지만)
이 수업을 듣다가 안 맞는 것 같으면 철회해 버리면 된다!
꼭 붙어 다니던 고등학교 무리와 다르게 동기가 불편하다면 그냥 혼자서 다녀도 이상하게 보지 않고
생기부에 구애받지 않고 내가 하고 싶은 동아리를 들어갈 수도 있다.
이렇게만 보면 대학은 유토피아 같다.
진정 꿈을 펼칠 수 있고 그냥 내가 한 일들에 책임만 지면 되는
그런데 생각하지도 못한 것들이 나를 짓누르기 시작했다.
나는 무한한 자유가 상당히 버겁게 느껴지는 사람이었으며
학교라는 틀 안에서 도리어 안정감을 찾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대학에 오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마냥 의문, 또 확신이 안 섰던 순간들이었다.
진정 내가 이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이 맞는지, 이 방향이 틀렸다면 그간 노력과 시간은 어떡하지?
꼬리에 꼬리를 물던 불안과 걱정들이 나의 유토피아를 점점 퇴색시켜 갔다.
남들 눈에는 가고 싶은 학교, 학과를 척척 붙어 그 안에서도 열심히 살아가는 것으로 보이겠지만
실제의 나는 그렇지 않았기에 남과 나. 그 사이 관점의 갭을 인지하고 수용하는 것이 굉장히 힘들었다.
나는 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행복하지 않은데
늘 나에게 무슨 고민 있을 게 있냐는 질문에 씁쓸히 딱히 없다고 거짓을 말한 것도
모두 나를 속여가고 있음을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