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년 전부터 시작했던 프로젝트를 같이 마무리한 직장 상사가 이번에는 나중에 팀에게 데모할 수 있는 앱을 하나 만들어보자고 했다. 앱 개발 쪽에는 크게 흥미도 없고, 무엇보다 팀이 관심 있어 할 것 같지도 않아서 거절하고 싶었지만 친분 때문에 거절하지 못했다. 결국 매주 미팅이 잡혀버렸다
프로젝트를 빨리 진행할 수 있도록 앱 개발 공부를 해보라며 책을 하나 빌려주셨는데, 아주 기초적인 앱 개발용 프로그래밍 언어 책이었다. 거절 못 해서 그냥 받았다. 문제는 그게 800페이지가 넘는 책이었다는 점이다. 프로그래밍 서적이 대체로 두꺼운 건 알고 있었지만, 역시 두껍더라.
나는 사실 책으로 코딩 공부를 해본 적이 없다. 개발자 진로는 대학교 3학년 때 전공을 바꾸면서 시작됐는데, 수업마다 추천 서적은 있었던 것 같지만 어디까지나 참고용이었고 필수는 아니었다. 수업 자료도 슬라이드랑 튜토리얼이 온라인으로 다 제공돼서 굳이 책까지 볼 필요가 없었다. 인터넷만 잘 찾아봐도 기초는 충분히 잡을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생각해보면 대학교 때도 프로그래밍 언어도 다양하게 배운 건 아니었다. 아주 기초적인 파이썬, 자바, C 정도? 수업마다 그 수업에 맞는 언어를 잠깐 배우고, 오랫동안 안 쓰면 금방 잊어버리고.
알고리즘 같은 건 이론이 중요하니까 <Cracking the Coding Interview> 같은 책이 한때 엄청 유행했지만 요즘은 그것보다 좋은 리소스가 많다는 얘기도 들었다.
두꺼운 서적으로 프로그래밍을 공부한다라... 외워도 금방 잊을 것 같은 진도와 두께, 그런데 또 목차를 보면, 이걸 다 읽으면 정말 앱 개발로 진로를 바꿔도 되겠다 싶을 만큼 세세하긴 하다.
빌려주신 성의가 있으니 조금이라도 읽어봐야겠다는 마음은 들지만, 요즘따라 시간이 짧게 느껴져서 배우기 싫은 걸 억지로 배우고 싶지는 않다. 무엇보다 요즘처럼 인공지능이 판치는 시대에, 새로운 프로그래밍 언어를 깊게 파는 게 과연 얼마나 의미가 있을까. 물론 기본 문법 정도는 알고 있으면 나쁠 건 없겠지만, 배워야 할 게 많다 보니까 이걸 파면 다른 걸 못 배우고. 차라리 쉬거나, 친구 만나거나, 그냥 아무것도 안 하고 누워있는 게 더 좋을 것 같다.
요즘은 기본 문법만 알아도 필요한 건 검색해서 쓰는 시대고, 앱 개발도 워낙 변화 속도가 빨라서 금방 새로운 방식으로 대체되기도 한다. 기술 발달 속도가 너무 빠르다 보니 사실 책으로는 그 속도를 다 따라잡기 어려운 것 같기도 하고. 앱 개발자가 될 게 아니면 굳이 깊게 파야 하나라는 생각이 들긴 한다. 그냥 화면 구성이나 상태 관리 같은 아주 기본적인 것들만 알아두면 나중에 LLM 이용해서 어느 정도는 만들 수 있는 세상이 되어버려으니.
그냥 책 덕분에 잘 배웠다고 하고, 지금 진행 중인 프로젝트는 잘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