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폭풍 속에서도 꽃은 피어나고

남편이름은 죽손이

by 하얀 나비
집구석


내가 결혼을 하기로 하고 상견례도

끝나고 난 뒤 가족이 모인 자리에서


갑자기 새엄마는 굳어진 표정으로

결혼식에 이불 하나 외에는 10원도

도와줄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


10원도 줄 수 없다는 말이 단호했다.

아버지는 말없이 그 옆에 계셨다.


나는 깜짝 놀랐다.

갑자기 이게 무슨 말이고 왜 그러시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는 새엄마나 아버지에게

뭘 부탁한 적이 없었고 도와달라고

말씀드린 적도 없었는데 그런 말을 하셔서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하필 내가 도움이 제일 필요한 순간에

관계를 그만 끝내려고 손을 뿌리치시는

것처럼 느껴졌다.


사실 나는 23살이고 어려서 결혼에 대해서

뭐가 필요한지도 알지 못했다.


단지 지금의 외로운 현실에서 벗어나고만 싶었다.



결혼식 후에도 축의금 명단도 보여 주지 않으셔서

친구들이나 회사 직원들이 얼마를 냈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음식값과 교통비로 다 썼다는 한마디가 다였다.



어쨌든 나는 모아둔 적은 돈으로 살림살이를

싼 걸로 사고 작은 엄마 며느리의 도움을 받아

예단을 준비했다.



새엄마가 10원도 보태줄 수 없다고 말할 때

작은엄마와 며느리가 같이 있었지만

모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나를 도와주신 것 같았다.



옷을 만드느라 잠도 못 자는 와중에도

시간을 내어 나를 도와주셨다.

나를 도와주기 위해 누군가 보내준 천사 같았다.



시댁에서는 결혼식 비용과 신혼여행 비용

그리고 잠실에 작은 아파트까지 마련해 주셨다.



그 후로 시어머님은 집에 올 때마다 말씀하셨다.


“우리 아들은 이렇게 작은 집에서 살아 본 적이 없는데.”


“냉장고가 너무 작아”


그 냉장고는 내가 모시던 전무님이 고맙게도 보내주신 거였다.



시어머님의 그 말은 우리 친정에 대한 아쉬움이었다.


그때마다 나는 말없이 고개를 떨궜다.



그때는 나의 사정을 모르셨기에 아마 우리 친정 쪽에서도 돈을 보태서 좀 더 큰 집을 사기를 바라셨던 것 같았다.



시아버님은 건설회사 회장으로 월급을 받고 일하셨다.

건축 쪽의 오랜 경험으로 일을 잘 해결하셔서

회사의 주인인 사장이 아버지처럼 믿고 의지 했다.



시아버님은 황해도에서 태어나시고 일본에서

대학을 나오신 후 학교 교장도 하시고

여러 가지 사업을 운영하신 자수성가하신 분이시다.



따뜻하고 인품이 좋으셨다.


기억력이 좋으셔서 돌아가실 때까지 전화번호를 하나도 적어놓지 않으시고 다 외우셨다.


히로시마 원자폭탄의 후유증으로

황반변성을 앓고 계셨다.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러시아어를

급하게 배우셔서 놀라운 기지로 같이 있던

여러 명의 목숨을 구하셨다고 했다.


그때 도움을 받으신 분들은 아버님을 생명의 은인이라고 말씀하시며 항상 친형제처럼 지내셨다.



항상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셨지만

사기도 잘 당하셨다고 한다.


그래서 시어머니는 시아버님보다

사람을 보는 눈이 더 날카로워지셨다.


그래서 언제나 아버님이 못 보는 부분을 짚어 내셨다.


시아버님이 돈을 벌으셨지만 그 돈을 지켜낸 건 시어머님 이셨다.



시아버님은 자주 양손에 고기와 과일을 들고

우리 집에 오셨다.


우린 언제나 받기만 하고 살았다.


남편이 어렸을 때 시아버님은 언제나 남편이 깨기 전에 일하러 나가시고 잠들면 들어오셨다고 했다.



그래서 남편이 어렸을 때 아버지를 보면 낯설어서 울었다고 했다.


그러다 보니 남편은 어릴 적 아버지와 함께한 추억이 거의 없는 것을 아쉬워했다.


시댁에 처음으로 인사하러 가던 날

남편은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지금 우리 집에 가는 이유는 허락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고 그냥 인사를 하러 가는 거야.”



“내가 벌써 가족에게 결혼할 거라고 말했어.

내가 정하면 그거로 결정된 거야.”



“그러니 긴장하지 말고 편안한 마음으로 우리 집에 가”



꽃을 한 다발 들고 갔다.


반갑게 맞아주셨고 모두들 나에게 관심이 많으셨다.



시아버님이 종이를 가져오셨다. 한자로 이름을 써보라고 하셨다.


내 글체를 보시더니 우리 아들보다 낫다고 하시며 웃으셨다.



시아버님은 너무 솔직하셔서 시어머님이 언제나 옆구리를 찔러서 말을 멈추게 하셨다.



시어머님도 아들이 데려온 내가

마음에 드신 것 같았다.



뉴코아 예식장에서 결혼식을 했는데 하객이

300명이 훌쩍 넘어 앉을자리가 없었다.



그리고 결혼하고 1년이 되어갈 때쯤부터 남편은 회사에 가기 싫다고 했다



상사의 정의롭지 못한 행동을 보조하는 게 견디기 힘들다고 했다.


착하고 성실하던 그는 점점 예민해지고 얼굴에

그늘이 지기 시작했다



남편은 결국 사표를 냈다.


그 순간부터 우리의 집은 어둠이 드리워졌다.



시어머니는 매달 남편의 월급만큼

우리에게 생활비를 보내 주셨다.


그 돈을 받으면서부터 우리의 삶에는

또 다른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시어머님은 우리 집의 모든 것을 관여하셨고

불시에 오셔서 냉장고도 열어 보셨다.



남편은 위가 자주 아팠고


무엇을 먹어도 맛이 없다고 했다.


신경안정제를 먹기 시작했다.



시어머니는 어느 날 화가 나셔서 나에게 말하셨다.



“네가 들어오고 집안이 되는 게 없다”



그리고는 물으셨다


“너희 엄마가 진짜 엄마가 맞느냐?”



남편과 부모님에게는 말씀드리지 않기로 했던

비밀이었는데 그 말이 나의 가장 아픈 자리에 박혔다.



-----------@-----------



그러던 어느 날 시어머니가 멀리에 있는

단골 치과에 가신다며 남편에게 운전을 부탁하셨다.


나도 동행했다.



가는 길 내내 이상하게 졸음이 쏟아졌고 창문에 머리를 부딪히며 억지로 눈을 떴다.



시어머니의 진료가 끝난 후 의사는

내 이도 봐주겠다고 하셨다

사랑니가 안에 있다면서 뽑는 게 좋겠다고 했다.


그렇게 갑작스레 이를 뽑고 항생제를 한 봉지 받아 왔다



그 무렵 생리가 늦어졌다 알고 보니 임신이었다


졸음도 어지럼도 모두 그 때문이었다

하지만 항생제를 먹은 탓에 결국 아이를 지워야 했다

“미안하다”


그 한마디가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아

속으로 수백 번 되뇌었다



그 뒤로 나는 아이를 간절히 기다렸다.

새엄마처럼 아기가 생기지 않으면 어쩌나 두려웠다


새엄마가 예전에 했던 말이 떠올랐다

“생리를 시작하면 그냥 울었어 또 임신이 안 됐구나 싶어서”


똑같은 입장에 서니 그 마음이 이해가 되었다



몇 번의 실망 끝에 드디어 원하던 임신이 되었고

우리는 행복했다.


그러나 임신의 기쁨도 잠시 모든 관심과 걱정은

다시 남편에게 쏠렸다.



결혼 후 남편은 계속 불안해했다.


소화가 안 되고 신경이 예민해졌다.

의사는 신경쇠약이라고 했다.



젊었을 때 유도를 하다가 척추뼈가

분리되어 대 수술을 했다고도 했다.

그 일로 평생 허리에 긴 흉터를 갖고 살았다



겉으로 보기엔 건강했지만 늘 약한 부분이 자리하고 있었다.


회사 일로 인한 스트레스와

고부간의 갈등이 더해져 몸과 마음이

동시에 무너져 내린듯했다



시어머님이 내게 안 좋게 하실 때마다

나는 새엄마를 보는 듯했고 쉽게 좌절했다.



그 모습을 계속 지켜보는 남편도 힘들기는 마찬가지였을 게다.



친정에도 말할 사람이 없던 나는

남편에게 하소연을 하곤 했다.



하지만 내가 나중에 깨달은 것은 남편도

27살밖에 안된 모든 일을 나처럼 처음 겪는

어린 남자였다는 거다.


내가 기대기엔 너무 약했다.



나는 임신기간 동안 태교는커녕 힘들 때마다

할머니를 그리워하며 우는 날이 많았다.



남편도 불안증 때문에 자기 몸 하나도 어쩌지 못했다.



시어머님이 생활비를 보내주시는 것도 미안했고

그렇다고 배가 불러오는데

일을 하러 나갈 수도 없었고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길을 잃었다..



내가 친정에서 사랑받지 못하는 걸 알아버린

시어머니는 나를 고아와 다름없다고 생각하셨고

모든 나쁜 일이 나 때문이라고 생각하셔서

모든 감정을 나에게 쏟아부으셨다.



배가 제법 불렀을 때 남편과 함께 시댁을 방문했다.


그날도 나는 남편뒤에 숨어있었다.



“너는 왜 혼자서는 우리 집에 못 오니? 내가 잡아먹기라도 하냐?”



그리곤 신발도 벗기 전에 바로 옆에 있는 화장실을 청소하라고 하셨다.



화장실은 반짝반짝 먼지 하나 없었다.


그래도 타일 벽과 타일 바닥을 수세미로 비누칠을 하고 손잡이가 긴 바가지로 물을 떠서 벽에 뿌렸다..



순간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전구가 터젔고 창문이 없는 화장실은 암흑으로 변했다.


나는 한 발짝도 못 움직이고 소리쳐서 남편을 불렀다.



시아버님이 장례식이나 안 좋은 곳을 다녀오시면


시어머님은 시아버님을 화장실로 먼저 들어가게 하셨다.


나쁜 운을 떨쳐 버리라는 의미라고 했다.



그래서 나에게도 올 때마다 그렇게 하셨지만 그 사건 이후로는 화장실 청소를 시키지 않으셨다.



배가 점점 불러올수록 나도 남편도 두려움이 커졌다 결국 예정일을 며칠 앞두고 더 예민해진 남편은 시어머니의 손에 끌려 어디론가 가서 입원을 했다.



출산 날짜가 다가와서 우리가 시댁에 머물렀었는데 시어머니는



“이제 아들도 집에 없으니 우리 집에 있을 이유가 없으니 친정에 가던지 집에 가있거라”



나는 자존심을 다 버리고 무릎을 꿇는 마음으로 그럴 수가 없다고 말씀드렸다.



나 혼자 있는 게 무서웠다.


엄마처럼 혼자 애를 낳게 될까 봐 무서웠다.


결국 시어머니도 나를 더는 밀어내지 못하셨다.



남편이 없는 밥상에서 내 입맛은 왜 이리 좋은지

눈치를 보면서도 밥그릇을 비웠다.



엄마의 눈치를 보며 밥을 먹던 순간과 겹쳐 보였다.


남편이 입원을 하고 며칠 후 나는 혼자 방에 있으면서

진통이 시작됨을 느꼈다.

배가 수축되다 멈추다를 반복했다.


조금 더 잦게 진통이 와서

두려운 마음에 심장도 두근거려서 시부모님이

주무시는 방문을 똑똑 두드렸다.

밤 12시가 지나고 있었다.


시아버님이 자던 얼굴로 뛰어나왔다.

"아가야 무슨 일이냐?"

"제가 배가 아파지고 있어서요"

"아 그래?" 시아버님이 몹시 걱정스러운 모습으로 말씀하셨다.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시어머니가 시아버님을 방 안으로 당기셨다.


"당신은 들어가 있어"



그리고 방문을 조금만 열고 피곤한 얼굴로 말씀하셨다.

"아직 멀었다"

"아침에 병원에 가보자"


그리고 방문이 닫혔다.


나는 슬프고 무서웠지만 방으로

다시 돌아와 시계를 보고 진통 간격을 확인하며 밤을 새웠다.


혼자 남겨진 방 안에서 조용히 배를 만졌다 괜찮아 아가야 다 잘될 거야 작게 중얼거렸다.


울고 싶었지만 지금은 그럴 여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시어머님은 아기를 5명이나 낳으셨다.

그중에 딱 한번 막내아들을 낳을 때만 남편이 옆에 계셨다고 했다.

그래서 그때가 제일 행복했다고 하셨었다.


시어머님 말씀대로 아침까지 진통은 견딜만했다.


아침에 시어머님과 함께 병원으로 향했다. 그분도 나만큼 힘들어 보이셨다.


아들이 병원에 있으니 힘드실 거라 이해했다.


머리가 아프시다고 했다. 혈압도 높으셨다.



병원에 도착하고 몇 시간이 지나도 진전이 없었다.


촉진제를 쓰면서 나의 통증은 점점 심해지고 손과 발에 마비가 왔다


아기가 척추신경을 눌러서 그렇다고 의사가 말했다.


시어머니는 편치 않은 얼굴로 내손과 발을 주무르셨다.



“딸이 애를 셋 낳을 때도 한 번도 안 갔었는데 내가 이게 무슨 일이래”


시어머니가 한숨을 쉬며 말씀하셨다.



시어머니가 자리를 비운 사이 간호사가 물었다.


“친정어머니세요?”


아니라고 했더니 자기들끼리 수군거렸다.


“그럴 줄 알았어”



죽을 것 같은 긴 진통 끝에 제왕절개를 해달라고 사정할 때쯤 간호사가 양수막을 터뜨렸다.



마취로 잠들었다 깨 보니 옆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기가 딸이란 걸 확인하고 시어머니는 바로 가셨나 보다.



내 몸은 바람 빠진 풍선 같았고 나는 더 이상 예전의 내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노른자가 빠져나가고 껍데기만 남은 채 차가운 수술실에 쓰레기처럼 버려진 것 같았다.



분만실에 아무도 없고 나 혼자 남았다.


아기도 어디로 데려가서 없었고 아기의 얼굴도 보지 못했다.



얼마가 지났을까 어렴풋이 남편의 얼굴이 보였다 입원한 병원에서 외출증을 끊고 나왔다고 했다.



그것은 아들에게 힘든 시간을 피하게 해 주려는 시어머니의 큰 그림이었다.



시어머님이 시누이에게 절대 아들이 모르게 하라고 했지만 시누이가 몰래 알려 줘서 왔다고 했다.


남편이 반가웠지만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넋 놓고 무표정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폭풍이 지나간 후의 나는 아직 충격 속에 있었고 다 끝났다는 안도감도 있었다.


엄마가 오래전 겪었을 일을 생각하니 눈물이 났다.


혼자서 얼마나 힘드셨을까?



훗날 남편과 불화가 생길 때마다 그때 힘들 때 곁에 없었음을 이야기했다. 남편이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지만 내겐 너무 큰 아픔이었다.



몇 해 전 전화에 남편 이름을 “죽손이”라고 적었다.


남편이 물었다.


“내가 왜 죽손이야?”



내가 힘들 때마다 곁에 없어서 죽을 때는 꼭 손을 잡아달라는 뜻이라고 말했다.



내가 결혼을 하면서 새엄마는 나에게 아주 많이 부드러워지셨고 아무 일 없던 듯이 다시 가족이 되었다.


새 식구인 사위를 어려워하셨다.



출산 소식에 새엄마가 한걸음에 올라오셔서 애기를 목욕도 시키시고 나에게 미역국도 끓여주셨다.


나의 엄마 역할을 해주셨다.



새엄마는 매우 익숙하게 아기를 씻기셨다.


그토록 갖고 싶었던 당신의 아기를 만지듯이 우리 아기한테 그렇게 해주셨다.



그리고 내가 모유를 수유하는 모습을 사랑스러운 모습으로 바라보셨다.


새엄마의 꿈을 내가 대신 이루고 있는 듯 보였다.



한 달 정도 계시던 새엄마가 시골로 내려가시고


남편은 신경안정제를 계속 먹으며 집에서 아기 돌보기를 도와주고 있었다.



나는 출산의 쇼크와 처음 해보는 육아에 우울증이 왔다. 아기가 울 때마다 걱정이 되었고 내가 뭘 잘못하고 있는지 걱정스러웠다.



그러나 시어머니의 이야기는 계속됐다.


“네가 들어오고 잘된 게 뭐가 있냐?”


그 소리를 하셨다.



그 순간 나는 이제 더는 예전에 내가 아니라는 걸 느꼈다.



“그러면 제가 뭘 어떻게 할까요? 이혼을 원하시면 할게요.”



내가 그렇게 말하자 시어머니는 놀라서 전화를 끊으셨고 그 길로 병원에 입원하였다.



시아버님이 나에게 오셔서 제발 무조건 잘못했다고 빌라고 하셨다.


의사가 어머님이 오래 못 사실 거라고 하셨다고 했다.


나는 병원에 가서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잘못했습니다.”



그날 이후 시어머니는 다시는 그런 말씀을 하지 않으셨다.


아들의 이혼은 원하지 않으셨던 것 같다.



이혼을 하겠다는 것은 공허한 말일뿐 사실 나는 돌아갈 곳이 없었다.

매거진의 이전글13화 이 세상 어디가 숲인지 어디가 늪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