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원의 빛이여 꽃의 영광이여
살다 보면 문득 마음이 텅 빈 것 같은 날이 있다.
무엇을 채워야 할지,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어 그저 가만히 앉아 흘러가는 시간을 바라만 보게 되는 그런 날.
화려했던 꿈도, 뜨거웠던 열정도 한풀 꺾인 것 같아 괜스레 서글퍼질 때, 나는 오래된 기억에서 이 시를 꺼낸다.
영원할 줄 알았던 “초원의 빛”이 사라진 뒤에도 삶은 계속된다고 말해주는 윌리엄 워즈워스의 고백이다.
《초원의 빛》
윌리엄 워즈워스 (William Wordsworth)
한때는 그렇게도 밝았던 광채가
이제 영원히 사라진다 해도
초원의 빛이여 꽃의 영광이여
그 시절을 다시 돌이킬 수 없다 해도
우리 슬퍼하기보다 차라리
뒤에 남은 것에서 힘을 찾으리
지금까지 있었고 앞으로도 영원히 있을 본원적인 공감 속에서…
인간의 고통에서 솟아 나오는
마음의 위안을 주는 생각과
죽음 너머를 보는 믿음에서
사색의 마음을 가져오는 세월 속에서…….
나탈리 우드(Natalie Wood)와 워렌 비티(Warren Beatty)가 나오는 영화 초원의 빛에 워즈 워스의 시
《어린 시절의 회상으로부터 영생불멸을 깨닫는 노래(1807년)》 중 일부이다.
사랑과 고통, 청춘의 불확실함과 이별의 슬픔으로 가득했던 영화다.
내가 태어나기 바로 전에 나온 영화지만 어릴 적 보았던 그 영화는 아련한 아픔으로 가끔 내게 다가온다.
그 영화가 나오고도 20년정도 지났을 때가 1980년대 초,
우리 시대에는 여전히 테스(Tess 1979년)라는 영화가 나오고 순결을 목숨같이 생각했다.
우리 부모님 세대가 얼굴도 못 보고 결혼하던 시대였다면 우리 세대는 거기서 조금 나아졌지만 여전히 순결을 중요시했다.
지금은 세상이 너무 많은 변화를 거쳐왔고 어찌하다 보니 나는 구시대적 생각을 아직도 고집하는 옛날 사람이 되었다.
그래도 이 영화가 마음속에 남아 있는 건 그런 사랑이 고귀하게 느껴져서가 아닐까?
시를 가만히 읽다 보면 마음이 차분해진다.
시인은 "꽃의 영광"이 사라졌다고 해서 인생이 끝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오히려 그 빛이 사라진 자리에 비로소 들어차는 것들이 있다고 말한다.
젊은 날에는 미처 몰랐던 타인의 아픔에 대한 “공감”.
소란스러운 세상 속에서도 중심을 잡게 해주는 “사색의 마음”.
어쩌면 우리는 찬란한 빛을 잃어가는 것이 아니라, 그 빛이 남긴 온기를 품고 더 깊은 사람이 되어가는 과정 중에 있는지도 모른다.
오늘따라 마음속 광채가 흐릿하게 느껴진다면, 너무 슬퍼하지 마라.
우리에겐 여전히 “남겨진 힘”이 있고, 세월이 선물한 깊은 사색이 곁에 있으니까. 사라진 빛보다 더 단단한 마음으로 오늘을 살아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