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세계의 주인> 후기
평단과 관객 모두에게 극찬을 받은 영화. <세계의 주인>. 나에게도 올해 가장 오래 남는 작품이었다.
영화는 성폭행 피해자인 여고생 주인이가 사건 이후의 삶을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섬세하게 따라간다. 성폭행 피해를 단순히 사건으로 소비하지 않고, 사건 이후의 일상 속에서 드러나는 상처와 변화들을 깊이 있게 담아낸 점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우리는 성폭행의 심각성은 알고 있지만, 피해자의 그 이후 삶에 대해서는 놀라울 정도로 무지하다. 영화 속에서 수호는 성폭행 피해자들을 위한 서명운동을 진행하며 '피해자는 씻을 수 없는 트라우마를 갖는다'고 적는다. 이에 주인이는 그 문장이 틀렸다고 반발하고, 결국 자신이 성폭행 피해자임을 드러내게 된다. 이 장면은 내가 얼마나 좁은 시각으로 세계를 보고 있었는지 돌아보게 만들었다.
성폭행 피해자임을 밝히자 주변인들의 시선과 태도가 바뀌고, 익명의 쪽지가 전달 되기도 한다. 그렇다고 해서 수호나 유라가 작중 악역이거나 한 것은 아니다. 이 영화에는 누구도 절대악으로 그려지지 않는다. <모든 인물은 저마다의 상처를 가진 ‘세계의 주인’으로서 서로를 오해하고 상처를 주고 받는다.> 그래서 이 영화가 더욱 특별하게 다가온다.
영화는 트라우마가 정말 씻을 수 없는 것인지 질문을 던진다.
감독은 벽의 그을림, 마술로도 사라지지 않는 쪽지 같은 연출로 '없던 일로 만들 수 없는 상처'를 시각화한다. 특히 사과(果)는 영화 전반에 상징적으로 등장한다. 주인이는 사과를 보기만 해도 몸서리치는데, 그동안 얼마나 많은 사과(謝過)를 강요받아왔을까. 또 사과는 선악과의 의미도 지닌다고 볼 수 있다. 사랑(관계)하고 싶지만 한 걸음 내딛기 두려운 주인이의 모습은, 용서와 관계의 경계를 넘지 못하는 상처받은 마음을 비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절망으로 끝나지 않는다.
주인이는 수호와 유라에게 용서를 받고, 용서하며, 장래희망란에 다시금 <사랑>을 적는다.
그 한 단어는 주인이가 다시 살아가고자 하는 의지이자, 사랑과 관계 속에 머무르고 싶다는 소망이다.
<세계의 주인>은 상처를 숨기려 애쓰는 우리 모두에게 묻는 영화다. 트라우마는 사라지지 않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낼 수 있을까, 사랑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