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 알레르기 확정 후 손을 자주 씻게 됐다. 녀석을 쓰다듬고 나면 곧장 비누칠을 해 손을 씻었다. 그러다 보니 내가 하루 종일 우리 고양이를 얼마나 자주 만졌는지 알게 됐다. 그동안 녀석이 귀찮을 만했다.
병원에서 고양이와 데면데면하게 지내라는 처방을 받은 후에 나는 녀석과의 관계가 지금보다 서먹해지진 않을까 우려했다. 그래서 그토록 우울했던 것이다. 하지만 세상만사 새옹지마라고 했던가. 정말 어처구니없게도 함께 지낸 그 어떤 때보다 살가운 관계를 유지하게 됐다. 아무리 고양이 놈들을 이해하는 것을 포기해야 한다고는 한다지만 처음에 나는 진심으로 황당했다.
황당함이 이어지다 문득 깨달았다. 어떤 관계도 적당한 거리가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그리고 내가 녀석과의 관계를 일방적으로 생각했던 것도. 알레르기 확진 이후로 크게 하나 또 배운 것이다. 이제 내 삶은 고양이 알레르기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쓸데없이 거창) 돈 주고도 못 사는 무엇보다 값진 것은 경험이라더니…아 아니네. 알레르기 검사 비용은 지불했으니 3만 9천 원을 주고 관계의 물리학을 몸소 배웠다.
이전의 나는 퇴근 후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기도 전에 괴성을 지르며 녀석에게 달려갔다. 세상에 마상에 손도 안 씻고. 우리 고양이가 얼마나 깔끔한 냥인데…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미안해 죽겠다.
요즘에 나는 원거리에서 손을 흔들어 인사를 하고 가방을 내려놓고 일단 옷을 갈아입는다. 물로 가볍게 손을 헹구고 한 손가락만 사용해 머리만 쓰다듬어주고 비누로 손을 다시 씻는다. 그리고 다음 손 씻을 텀까지는 녀석을 가만히 두는 것이다. 나는 내 할 일을 하고 고양이는 고양이 할 일을 하고.
이전의 나는 쓰다듬기 파워도 과했다. 너무 귀여워서란 변명이 통할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너무 귀여워서 그랬다. 귀부터 얼굴을 감싸 토끼처럼 만들기도 했고 볼을 죽 잡아 늘어뜨리기도 했으며 발가락 꼬순내를 맡는 답시고 킁킁 대지를 않나. 열심히 그루밍해둔 털을 역방향으로 쓰다듬었다. 쓰다 보니 변태 같은 이미지를 지울 수가 없네. 이 세상 모든 집사가 이렇지는 않습니다.
말 못 하는 녀석의 입장에서는 괴로웠을 일이다. 우리는 같은 언어를 쓰지 않는 생명체이기 때문에 내가 귀여워서 그러는 건지 저를 싫어해서 괴롭히는 건지 알 수 없었을 거다.
그걸 짐작 못 했던 건 아니지만 제어가 안 됐던 건 사실이다. 나만 생각했다. 나는 지금 우리 고양이를 예뻐하는 중이라면서. 지금의 나는 최소한의 힘만 사용해서 한 손가락이나 세 손가락으로 이마나 턱만 살금살금 쓰다듬어 준다. 우리 고양이는 그제야 알았겠지 내가 자신을 예뻐해 준다는 걸.
나는 이 간단한 사실을 고양이 알레르기씩이나 걸려야 깨닫는 어리석은 인간이다.
어쩌면 육아도 형태는 비슷하지 않을까. 물론 비교 불가로 더 힘들다는 것쯤은 안다. 스스로 대소변을 가리는 것도, 가고 싶은 방향으로 걸어 다니는 것도, 밥도 물도 알아서 척척 잘 먹는 것도, 고양이 쪽이 압승이다. 몇 배는 수월하다. 하지만 둘 다 말을 못 알아 듣는 장르는 같으니까.
혼자서 사랑을 담뿍 준다고 판단할 게 아니라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몸짓으로 설명할 것. 역지사지 바디랭귀지를 쓸 것. 그런 생각으로 이어졌다.
고양이와 2년 동안 함께 지내며 몇 년 앞당겨 느낀 감정은 또 있다. 어느 날은 우리 고양이가 가장 좋아하는 간식을 자주 달라고 조르기에 엄마가 한 번 크게 화를 낸 적이 있다. 냉장고 앞에서 울어대는 녀석에게 엄마가 외친 대사는 "너 이렇게 계속 먹으면 뚱보 돼! 먹고 싶은 것만 다 먹고살면 아파요!"
내가 듣기엔 한없이 귀엽지만 녀석이 느끼기엔 무서웠을 목소리 톤. 개냥이인 녀석은 바로 기가 죽어서 문턱에 턱을 괴고 엎드려 눕는다. 귀는 엄마 쪽으로 향해있지만 고개는 다른 쪽을 보고 있다. 그리고 큰 눈을 끔뻑이다가 이내 감는다. 큰소리로 뭐라고 하면 어떤 반응인지 알기에 자주 혼내지는 않지만, 배부르게 먹고도 또 식탐을 부릴 때는 종종 혼을 내야만 한다. 귀엽다고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체중을 늘리는 것도 학대다.
풀이 죽어있는 녀석을 두고 엄마는 방으로 들어갔다. 내가 곧장 따라 들어가 현 상황을 보고해줬는데 엄마가 거의 1분마다 지금 가서 달래줄까? 표정은 어때? 하는 것이다.
그 모습에서 어린 시절 내가 혼나던 모습이 떠올랐다. 엄마가 나를 혼내고선 이런 마음으로 방으로 들어갔구나. 이렇게 안절부절못했구나. 이런 마음으로 내가 반성하길 기다렸구나. 그러다 내가 반성하는 것 같으면 나를 다시 불러서 혼을 낸 이유를 말해주고 너를 미워해서 그런 게 아니라며 안아주고는 했구나.
어쩌면 내가 아이를 낳아봐야 느낄 수 있는 감정을 우리 고양이 덕분에 몇 년은 미리 보기 한다. 그러나 이 글도 출산 이후에 보면 코웃음 칠지도 모른다. 웃기고 있네! 짐작하긴 뭘 짐작했냐면서. 나는 지금도 나의 어리석음을 계속 발견하는 현재 진행형 코찔찔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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