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흐, 미뉴에트 1번을 배우다.
늦게 배운 바이올린
바이올린에 대한 로망을 가진 적은 없다. 아름답거나 예민한 소리를 내는 악기라고 생각했다. 잘 사는 집 아이들이 돈과 시간을 많이 들여 배우는 악기라는 이상한 편견이 있었다. 어쨌든 나와는 인연이 없는, 없을 악기.
바이올린과의 첫 번째 인연은 아이 때문에 생겼다. 아내는 아이에게 바이올린을 권했다. 나는 별로 탐탁지 않았다. 굳이? 전공할 것도 아닌데? 그런데 따지고 보면 악기를 전공하기 위해서 배우는 건 아니다. 난 왜 바이올린을 가르치는 게 별로라고 생각했을까. 내가 은연 중에 드러낸 반감은 바이올린이 클래식 악기라는 데에서 나오는 것 같았다. 들어도 들어도 작곡가와 음악 제목을 기억하지 못하는 클래식, 수년을 배워도 초심자를 벗어나지 못하는 클래식 악기는 가르쳐봐야 잊혀진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던 것 같다. 차라리 피아노나 기타가 일상을 음악과 함께 하기에 더 좋은 악기가 아닐까. 또 바이올린은 아이가 집에서 연습하면 시끄러울 것 같기도 하고.
어쨌든 아이는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했다. 옆에서 구경하는 재미는 있었다. 조그마한 손으로 현을 짚고 활을 써가며 소리를 낸다는 것이 신기했다. 나와 바이올린의 인연은 여기까지라고 생각했다.
두번째 인연은 드라마 연출 제안이었다. 내가 존경하는 어떤 드라마 작가님이 바이올린을 소재로한 드라마는 어떻겠냐고 물어오셨다. 음악 장르로서의 클래식이나 생활 반경으로서의 클래식은 나와 가까운 편이 아니었지만, 클래식 소재의 이야기에는 깊은 관심이 있었다. 재능, 욕망, 좌절, 질투, 순수, 교감, 우정, 사랑 등이 섞여 있곤하는 배경이다. 그 제안 덕분에 바이올린과 클래식에 대해 조금 더 구체적인 관심을 가져보고자 했다. 여전히 입문의 문턱에 있는 정도였지만. 하지만 결국 이 제안은 구체화되지 못한 상태에서 흐지부지 되었다. 대신 바이올린 자체에 대한 호감이, 이게 남의 악기만은 아니라는 실감이 생겼다.
세 번째 인연은 바이올린을 직접 들게 만들었다. 같이 하는 극단에서 내게 바이올린 연주 장면이 짧게 들어가 있는 배역을 제안한 것이다. 연기를 직접 하는 것도 내게는 무척 낯선 영역인데, 바이올린 연주 장면까지 있으니 이건 굉장히 큰 도전이었다. 다행히 연극 내 바이올린 장면은 내가 맡은 캐릭터가 ‘바이올린을 켤 줄 아는 사람’이라는 느낌만 잠시 주면 되는 수준이었다. 처음엔 악기만 어디서 빌려서 대충 어떻게 넘길까 싶기도 했다. 대학 과방에 굴러다니는 기타를 들고 선배에게 코드 몇 개를 배울 때처럼. 그러나 곧이어 바이올린이란 악기를 그렇게 다루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난 아이와 아내에게 물어 아이의 바이올린 구매처로 찾아가 내 바이올린을 샀다. 그리고 바이올린 레슨을 등록했다. 내게 바이올린이 도대체 웬말인지. 그래도 유약이 곱게 칠해져있는 바이올린 나무통의 유려한 곡선은 예쁘고 우아했다. 그렇게 늦어도 너무 늦은 바이올린 교육이 시작 됐다.
목표는 모차르트의 ‘작은 별’이었다. 초심자가 그나마 연주하는 흉내라도 낼 수 있는 곡이기 때문이다. 기초를 건너뛰고 기초 겸 연주를 바로 배우기 시작했다. 턱으로 악기를 받친다. 왼손으로 현을 짚기 위해 손목을 꺾는다. 활을 가볍게, 초심자 관점에선 좀 이상하게 잡고 끼긱 거리는 소리가 나지 않게끔, 칼집에서 칼을 뽑듯 직선으로 내린다. 이 모든 과정이 신기했다. 이걸 내가 하고 있다는 게 특히 신기했다. 나는 바이올린을 켜는 신체로 들어서고 있었다. 선생님은 말씀하셨다. ‘바이올린 안에 원래 들어 있는 소리를 개방시킨다고 생각하세요.’ 조용히 갇혀 있던 소리를 세상에 풀어준다는 상상은 아름다웠다. 이런 표현은 초심자가 벌써 듣기엔 너무 수준이 높다고 생각했다. 선생님은 내가 전문 연극 배우라고 생각하시는 것 같았다. 해명을 좀 더 하고 싶었으나 그럴 여력이 없었다. 말이 너무 길어질 설명이었다. 그래서 그냥 작은 별에 집중했다. 반짝 반짝 작은 별 아름답게 비치네.
내 배역 정체성의 큰 부분이 바이올린으로 설명되었다. 삶을 직면하지 못하고 바이올린에만 골몰하는 어리석고 소심한 인간이었다. 그러니 바이올린 연주만큼은 꽤 실력과 자부심이 있어야 하는 캐릭터였다. 실제로는 ‘작은 별’도 제대로 못 켜면서 마음으로는 바이올린 전문가인 양 생각하는 상태가 공연 기간 내내 이어졌다. 그렇게 공연이 끝나고 나니, 그간 나의 상상에 약간의 보상과 근거를 주고 싶었다. 여기까지 배운 게 억울해서 최소한의 기초까지는 더 배우고 그만두고 싶어진 것이다. 그렇게 나는 바이올린 기초부터 다시 레슨을 시작하게 됐다.
그러면서 깨달았다. 바이올린은 몇 달 연주한다고 들을만한 소리가 나는 악기가 아니었다. 현을 짚는 위치에 손가락을 올리는 것만으로 경련이 왔다. 음정을 맞추며 고운 소리를 내는 것 자체가 곡예였다. 왼손을 신경 쓰면 오른팔이 난리가 나고 오른팔을 신경 쓰면 음정이 어그러졌다. 삐걱삐걱 이걸 어떻게 연주하는 거지?
기초 연습의 어느 날이었다. 활에 송진을 바른 후, 내 왼쪽 어깨와 턱 사이에서 현 위로 지나가는 활을 내려보는데, 송진가루가 곱게 피어오르고 활과 현의 진동이 눈으로 보이면서 얼굴로 전해졌다. 순간, 이것이 숨겨져있던 소리가 개방되는 순간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의 물리적 조건이 내게 개운한 몰입감을 주었다. 정확한 왼손의 파지, 오른팔의 적절한 궤적, 현과 나무통과 활의 조화가 내는 진동이 내 귀와 턱과 얼굴과 손끝 마디마디에 전해져왔다. 섬새한 쾌감이었다.
코난 도일이 쓴 셜록 홈즈는 문무예를 겸비한 전인같은 인물이다. 셜록은 생각이 꼬일 때면 바이올린을 연주한다고 설정되어 있다. 바이올린을 잘 켜지 못하더라도 가끔 이렇게 집중해서 음계 연주를 하는 것만으로도 환기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다보면 셜록 홈즈 같이 명석한 생각을 해내는 사람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지만 특별한 목표 지점 없이 무작정 레슨을 계속하는 것도 좀 어이없는 일이었다. 매 등록 기간이 끝날 때마다 그만 둘까 고민 됐다. 그런데 늘 좀 아쉬웠다. 한 번만 더 하자. 여기서 그만 두면 배워봤다고 말하기도 부끄럽잖아. 여전히 음정도 소리도 엉망인데. 그런데 이거 몇 년을 배워야 기초라도 한 느낌이 나게 되는 걸까. 그렇게 긴 시간을 배울 가치가 있나? 지금 내가? 연습도 제대로 못하는 주제에?
이런 마음에 안정감을 주는 연습곡이 나왔다. 바흐의 미뉴에트 1번이었다. 내가 내는 초심자의 엉망인 소리가 음악의 넓고 깊은 세계와 맞닿을 수도 있겠다고 느껴지는 곡이었다. 소리를 더 곱게, 더 정확히 내고 싶어졌다. 다른 사람 앞에서 연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의 그 순간을 위해서. 어떤 우주 앞에 서서 망원경을 들여다보는 마음으로.
어제는 베를린 오케스트라의 공연을 보았다. 이제 오케스트라의 소리가 다르게 들린다. 예전에는 오케스트라 소리는 응당 아름답겠거니했다. 이제는 그 소리가 얼마나 많은 단련 끝에 나오는 탁월함인지를 구체적으로 상상할 수 있게 됐다. 그리고 악기 별로 그 탁월함을 향한 제련의 시간과 인간적 노력이 그려진다. 그 시간과 노력들이 모여 다성악을 이루는 과정 또한 내 나름으로 그려진다. 그리고 그 폴리포니를 설계하는 작곡가의 위대한 순간도 그려진다. 그 순간이 가능하게 하기 위한 평생의 공부와 노력, 그리고 재능과 질투, 좌절과 명예의 순간들도 그려진다.
난 남은 생 동안 바이올린 연주에서 탁월함의 경지에는 결코 이르지 못할 것이다. 아직 교본의 1권들도 넘어가지 못했다. 한 4,5권까지 배움을 진행하는 것조차 내 인생에서는 사치에 가까울 것이다. 그리고 내가 이 곳에 시간을 쓰며 성과를 내기를 바라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내게 바이올린 연습은 아무런 목적도, 추가적인 의미도 없는 시간이다.
그러나 그 시간을 통해 탁월함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어린이 쳔재 연주가들의 소리에 온 마음으로 경탄할 수 있게 되었다. 오케스트라의 연주에 더욱 감동할 수 있게 되었다. 난 바이올린에 입문한 신체를 갖기 시작함으로써 아주 약간 다른 존재가 되었다. 그것만으로 삶의 새로운 신비에 조금 다가섰다. 고맙게도.
그리고 남은 생 동안 내가 가닿을 수 있는, 혹은 가닿고 싶은 탁월함의 경지라는 것이 어디에 있을까도 생각해보게 된다. 내게 과연 그런 것이 있을까. 나는 그런 삶을 살아왔나. 나는 그런 삶을 살아갈까. 나는 그걸 원하나. 혹은 어떤 삶을 원하나. 바흐의 미뉴에트를 더듬더듬 연주하며 상상한다. 지금의 나의 삶과, 그리고 그와는 조금은 다른 삶을.
(마르크 샤갈의 그림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