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끼니꾸 드래곤, 어쩌면 해피엔딩, 그리고 화사의 굿굿바이
지난 주에 사람 엄청 울리는 극을 이틀 연속 보았다. 하나는 재일교포 이야기를 다룬 시대극인 <야끼니꾸 드래곤>이고 다른 하나는 한국 최초 토니상에 빛나는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이다. 두 개 다 기존에 두세번씩 봤던 것들이다. 그런데도 속절없이 눈물이 터졌다. 어떻게 흘러갈 지 다 알면서도 처음 보듯 엉엉.
<야끼니꾸 드래곤>을 보는 동안 공연은 그대로인데 내가 많이 변했다. 2008년 초연, 11년 재연, 25년 삼연. 이제 아이와 부모의 이야기를 볼 때 느끼는 감도가 달라졌다. 선 자리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과거엔 자식의 입장에서 부모 세대의 삶에 내재한 억울함에 가슴 아파하는 관점이었다면, 지금은 그 슬픔이 근육통처럼 베어나온다. 저 삶 자체는 아니더라도 그 사이의 고통들이 나의 것일 수도 있기에.
코미디 씬들과 대화들, 그리고 훌륭한 아이러니의 운용에도 불구하고 너무 울리려고 작정한 것 같다는 생각이 이번에 처음으로 들었다. 내가 달라져서이기도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 극의 연출적 태도 자체가 익숙해진 코드로 받아들여져서이기도 할 것이다. 주 정서는 돌이킬 수 없었던 삶에 대한 연민에 기댄 슬픔이다. 그러다보니 자기 연민에도 살짝 기대게 된다. 타인에 대한 연민은 필수적이지만 자신에 대한 연민은 쉽게 독이 된다. ‘작정한다’는 생각의 근원은 연극이 그렇다기보다 내 스스로 슬픔에 허우적거리기 위해 자기 연민에 가 닿는다는 경고음이 들렸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다시 보니 예전엔 이야기에 푹 빠져 미처 생각지 못했던 것들이 보인다. 체홉의 영향. <벚꽃동산>와 <세 자매>의 구성과 테마가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우리 읍내>도 느껴진다. 삶의 부조리함과 덧없음 사이사이의 꿈과 사랑과 좌절과... 가족.
<어쩌면 해피엔딩>은 토니상까지 수상하면서 이제 전 세계인의 뮤지컬이 되었다. 취향을 드러내는 나만의 작은 사랑이었던 시점은 이제 먼 과거다. 그러나 이 뮤지컬의 연약하고 소중하고 소박한 정신은 그대로이다. 인간이 아닌 존재의 사랑. 인간이 아닌 존재이기에 더욱 인간의 결을 되새겨보게 하는 사랑. 끝을 알고 시작하는 용기. 그래서 사랑이란 무엇일까.
봐도봐도 울음이 나는 이유를 늘 다시 생각한다. 한 때 이 극의 주인공 전성우는 내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이들이 너무 순수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럼 다시 질문하게 된다. 순수란 무엇일까. 다른 자의식을 갖지 않고 자신의 감정에 집중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타인을 돕는 것을 소명으로 하고 태어났으나 이제는 버려진 헬퍼봇이라는 존재. 그러나 주인의 취향을 자기의 취향으로 발전시키며 나름의 의미를 구하고자 하는 존재. 상실에 마주했을 때 사랑을 추구하기로 한 존재. 그리고 그 사랑마저 상실해야하는 운명에 빠진 존재. 그 과정 과정에 정직하게 임하는 존재. 이건 그냥 인간의 운명 아닌가. 인간의 운명에 전 존재를 걸고 임하는 그 용기가, 자신이 용감한지도 모르는 그 순수가 사람을 울리는 걸까. 이건 어쩌면 순수하지 못한 상태로 그 모든 과정을 겪어내고 있는 자신에 대한 연민이 끌어올리는 눈물은 아닐까.
타인에 대한 연민, 타인을 위한 눈물, 그리고 자신에 대한 연민, 그리고 자신을 위한 눈물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자신을 더 외롭게 만드는 연민과 눈물이 있고, 자신을 덜 외롭게 만드는 연민과 눈물이 있는 것 같다. 닫힌 외로움과 열린 외로움 가운데를 산책하는 일 같이 느껴진다. 이러한 공연들을 보며 눈물을 쏟는 일이.
그러다 산뜻함을 느끼게 된 순간이 있다. 화사의 ’굿굿바이‘ 뮤직 비디오와 청룡영화상 무대. 워낙 유행이자 밈이 되어버리긴 했는데, 이별을 이처럼 산뜻하게 자기 자신을 지켜내면서 타인도 원망하지 않는 방향으로 해석하다니. 살면서 좋은 이별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갈수록 느끼게 된다. 그 이별은 사람을 향한 것이기도 하지만 자신의 지난 시기를 향한 것이기도 하다. 관계와 시간으로부터 떠나와 혼자 남겨진 기분에 대해 화사는 이렇게 노래한다.
세상이 나를 빤히 내려다봐도
내 편이 되어줄 사람 하나 없어도
Don’t worry It’s Okay
난 내 곁에 있을게
I’ll be on my side instead of you
관계와 시절이 이어졌다 깨져나가는 극들을 보며 연민과 눈물을 고민하다가 이 노래를 들으며 삶을 대하는 산뜻한 태도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어쩔 수 없는 일들이 나를 스쳐지나가도 난 내 곁에 있을 수밖에 없고, 있어야만 한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실감난다. <야끼니꾸 드래곤>에서는 이런 대사가 있다.
’이런 날은 내일을 믿을 수 있지.‘
결국 내일을 믿으며 현재에 충실하는 것이 인간이 유일하게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이다. 그러나 그 내일은 현재의 충실의 보상처럼 다가오지는 않는다. 그것이 연민을 불러일으키고 눈물이 나는 이유같다. 삶을 살아내는 단 한 가지 방법이 실패를 예비하고 있기에. 그러나 실패를 의식하지 않고 살아가야 하기에. 한스럽더라도 산뜻하게 현재에서 내 자신이 나와함께.
삶 전체가 굿 굿바이를 향한 발걸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