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모네타 베스푸치에서 카트린 드 메디치까지
파리를 거쳐 유럽의 다른 도시로 갈 거라던 지인의 이야기를 들은 게 얼마 전이었는데 낯익은 사진 한 장이 왔다.
파리 근교에 있는 '샹티 성(Château de Chantilly)'사진이다.
샤를 드골 공항에서 차로 30여분이면 갈 수 있는 위치에다 볼거리도 많아 파리를 들고 나는 이들이 즐겨 찾는 명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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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인은 파리에서 환승시간이 8시간 정도 남아 이곳을 찾았노라는 짤막한 설명을 함께 보내왔다.
나는 그가 왜 이곳을 찾았는지 안다.
그곳엔 지인이 연모하는 여인의 초상화가 있기 때문이란 것을.
'그녀를 보고 싶어 간 거네.'
누구?
바로 이 여인 '시모네타 베스푸치(Simonetta Vespucci:1453-1476)'다.
15세기 당시 피렌체 최고의 미녀로 손꼽히던 여인이다.
그러나 현실이라고 하기에 너무 좋으면 그건 좋은 것이 아님을 우리는 안다.
피렌체에서도 '미인박명'이란 사자성어는 예외가 아님을 증명이라도 하듯 너무 젊은 나이인 23세에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난 비운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그녀의 모습은 보티첼리의 명작 '비너스의 탄생'에서도 볼 수 있고 그 외 다수의 보티첼리 작품 속에 남아 있다.
그녀를 혼자 연모했던 르네상스 대표 화가 산드로 보티첼리(Sandro Botticelli: 1445~1510)는 그의 명작 곳곳에 그녀를 그려 넣었다.
그녀의 모습이 낯설지 않은 이유다.
그런데 그녀를 생각할 때 이 사람을 빼놓을 수 없다.
당시 르네상스 전성기를 이끌던 메디치 가의 '로렌초 데 메디치(Lorenzo de' Medici:1449~1492)'의 동생 '쥴리아노 데 메디치(Giuliano de' Medici:1453~1478)'다.
그녀와 동갑내기였던 '쥴리아노'는 이미 유부녀였던 그녀에게 최고의 미인이라는 호칭을 공개적으로 선사하면서 공공연한 연인 관계가 되었던 인물이다.
'쥴리아노'도 '시모네타'가 사망한 2년 뒤 25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다.
왜?
그는 피렌체의 정권을 장악하기 위한 가문 간의 싸움에 휘말려 1478년 4월 피렌체 대성당에서 반대파 파치 (Pazzi) 가문에 의해 살해당해서다.
그런데 공식적으론 미혼이던 그에게 세상을 떠난 지 1개월 뒤에 그의 사생아 '줄리오 데 메디치(Giulio de' Medici:1478-1534)'가 태어난다.
여기까지만 들으면 무슨 막장 드라마 같은 전개인데 이제부터 더 흥미 있는 이야기들이 이어진다.
'줄리아노'의 형 '로렌초 데 메디치'는 동생의 사생아 '줄리오'를 데려다가 친아들처럼 교육시키고 보살폈다.
그는 후에 1523년, 219대 교황에 선출된다.
교황 '클레멘스 7세'다.
그런데 그 보다 10년 앞서 1513년, 217대 교황으로 선출된 이가 있다.
역대 교황들 중 가장 사치스러운 교황이었다는 교황 '레오 10세'다.
메디치 가에서 두 명의 교황이 나왔다는 이야기는 많이들 아는 이야기 일 것이다.
그럼 '레오 10세'도 메디치 출신?
그렇다.
'로렌초 데 메디치'의 세 아들 중 가장 똑똑했다는 둘째 아들 '조반니 디 로렌초 데 메디치(Giovanni di Lorenzo de' Medici: 1475 - 1521)'가 교황 '레오 10세'다.
이 두 교황은 사촌지간으로 불과 10년의 시차를 두고 한 가문에서 두 명의 교황이 탄생했으니 역시 대단한 메디치 가문이다.
그러나 이 두 교황은 가문의 명성만큼 훌륭한 업적을 남기진 못했던 것 같다.
우선 교황 '레오 10세'는 면죄부 판매로 1517년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키는데 결정적 원인 제공을 했다.
교회의 면죄부 판매가 처음 있는 일도 아니고 성 베드로 대성당 건축 기금 마련이라는 대외적인 명목이 있기는 했지만 루터의 폭풍 개혁은 그에게는 불운이었다.
교회 역사를 보면 면죄부는 11세기 십자군 전쟁 당시 처음 등장했다고 한다.
이슬람과의 전쟁 참여를 독려하기 위해 처음에는 전쟁에 참여하면 죄를 사해 준다는 명목으로 면죄부를 발행했지만 후에는 전쟁에 참여하지 않고 돈만 내도 면죄부를 살 수 있게끔 변질되어 남발되었다.
그러다 16세기 들어와 교황 '율리오 2세'가 바티칸 대성당 공사(1506~1626)를 시작하면서 공사기금 마련이란 명목으로 면죄부가 다시 등장했다.
교황 '율리오 2세' 뒤를 이은 사치스러웠던 교황 '레오 10세'가 면죄부를 본격적으로 판매한 것이다.
교황 '클레멘스 7세'의 재임 시절은 또 어떤가?
그의 우유부단한 결정장애 때문에 전대미문의 '사코 디 로마(Sacco di Roma)'로 불리는 '로마 약탈'이 벌어졌다.
역사적으로 '로마 약탈'이란 사건도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지만 1527년 교황 '클레멘스 7세' 당시에 일어난 '로마 약탈'은 로마에는 대재앙이었다.
교황과 황제 간의 세력 다툼이 원인이었는데 이탈리아 반도에서 신성 로마 제국의 힘이 커지는 것에 불안감을 느낀 교황은 프랑스를 비롯 몇몇 강력한 도시 국가 들과 함께 신성 로마 제국에 대항하는 연합전선을 형성했으나 신성 로마 제국의 '카를 5세(Karl V:1500-1558)'에게 대패하고 만다.
전쟁이 진행 중이던 1527년 5월 6일 일부 신성 로마 제국의 용병들이 로마를 약탈하기 시작한 것이 '로마 약탈'의 시작이었다.
루터교 신자들인 독일 용병 '란츠크네히트(Landsknecht)'들의 무차별 약탈과 살인등으로 아비규환인 가운데 교황은 '파세토 디 보르고(Passetto di Borgo)'라 부르는 바티칸의 비밀 통로를 통해 800여 m 떨어진 산탄젤로 성(Castel Sant'Angelo)으로 피신했다고 한다.
이때 교황청은 스위스 근위대 용병들이 지키고 있었는데 교황을 지키다 모두 전사했다고 한다.
그런 연고로 지금도 교황청의 방위는 스위스 근위대가 맡고 있다.
'란츠크네히트'는 돈만 주면 오늘의 적이 내일의 동지가 되기도 하던 용병들로 '로마 약탈'도 그들의 밀린 임금이 원인이 되었다고 한다.
약탈이 일어난 한 달 만에 교황은 '카를 5세'에게 항복하고 산탄젤로 성에서 자진하여 7개월의 억류 생활을 했다.
로마는 점령군에 9개월 정도 점령되어 있다 다음 해 1528년 2월 그들이 철수하고 그해 10월 교황이 로마로 돌아옴으로 일단 평온을 찾는 듯했으나 로마는 이미 초토화된 뒤였다.
약탈 전 54,000에 이르던 로마 인구 중 12,000명에 달하는 사상자가 나왔다니 심각했던 상황이 가히 짐작이 된다.
로마에는 16세기 시에나의 금융 재벌이었던 '아고스티노 키지(Agostino Chigi)'가 1506-1510년에 라파엘을 비롯 당대의 명장들에 의뢰하여 지은 '빌라 파르네시나(Villa Farnesina)'가 있다.
이 빌라에는 당시 점령군들이 남긴 교황을 조롱하는 낙서가 남아 있다.
내용은 '로마가 제국군에게 짓밟히는데 교황은 도망가고 없구나.'라고 한다.
(23. 라파엘의 걸작을 품은 티베르 강변의 저택: https://brunch.co.kr/@cielbleu/244)
시스티나 성당에 그려진 미켈란젤로의 대작들은 시스티나 천장화는 교황 '율리오 2세'의 명으로 로마 약탈 이전인 1508~1512년에 그려졌고, 최후의 심판은 교황 '클레멘스 7세'의 명으로 1536-1541년에 완성되었다.
역사에 엄청난 족적을 남긴 두 교황의 재임기에 또 한 명의 역사적 인물이 등장한다.
프랑스 왕비가 된 최초의 이탈리아 여인.
교황 '레오 10세' 형의 손녀인 '카트린 드 메디치(Catherine de Médicis :1519~1589)'다.
항렬로는 교황 '클레멘스 7세'의 손녀도 된다.
그녀는 결핵과 매독으로 태어난 지 한 달도 안 되어 부모를 일찍 여의었다.
사생아를 제외하고 메디치 가의 유일한 적통인 '카트린 드 메디치(Catherine de Medici :1519-1589)'는 두 교황의 극진한 배려 속에 자라게 된다.
할아버지 벌인 교황 '레오 10세'는 메디치 가문의 유일한 계승자인 그녀를 보호하여 메디치 가의 정통성을 이으려고 그녀를 로마로 불러 곁에 두고 교육을 시켰지만 교황이 갑자기 말라리아로 일찍 서거하고 피렌체에서 메디치 가문이 축출되는 바람에 수녀원을 전전하는 등 어려운 시기를 겪어야 했다.
몇 년 뒤, '클레멘스 7세'가 교황으로 선출되고 메디치 가문이 다시 피렌체의 통치권을 되찾게 되자 그녀는 다시 교황이 있는 로마로 가게 되었다.
당시 프랑스 왕인 '프랑수아 1세(François Ier:1494-1547)'가 신성 로마 제국의 '카를 5세'에게 1525년 '파비아전투(Battle of Pavia)'에서 대패하여 포로로 잡히는 등 수모를 겪고 있던 중 '카를 5세'에게 로마 약탈로 호되게 당한 교황 '클레멘스 7세'는 프랑스와 동맹을 맺고자 카트린의 혼인을 적극 추진하게 된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프랑스로 초청하는 등 이탈리아 문화를 흠모하던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의 둘째 아들 '앙리 2세(Henri II:1519-1559)'와의 혼인이었다.
(3-2. 루아르에 남은 이탈리아 천재 화가의 성:https://brunch.co.kr/@cielbleu/80)
이런 복잡한 시대적 배경으로 프랑스 왕비에 오르게 된 그녀에게는 녹녹지 않은 프랑스 궁정 생활이 펼쳐지게 된다.
그녀는 신중함과 교양 있는 매너에 밝고 활달한 성격이었고 외국어에도 능통하고 여러 분야에 지식을 갖추고 있었으며 문화적 소양도 프랑스 보다 한 수 위였다고 한다.
그러나 왕족이 아니라는 이유로 많은 프랑스 귀족들에게 멸시당하고, 남편 앙리 2세는 20살 연상의 여인과 바람이 났고, 혼인 후 10여 년이 지나도록 왕가의 자손을 얻지 못하는 등 많은 마음고생을 하게 된다.
그녀가 혼인할 당시 메디치 가는 거의 파산 상태로 지참금도 지불하지 못한 왕비였지만 그녀가 가져온 이탈리아 요리사들과 포크를 사용하는 식사 예절등은 이후 미식의 나라 프랑스의 기초를 다지게 했다.
'시모네타'에서 시작한 이야기가 메디치 가문이 배출한 두 교황을 거쳐 프랑스 왕비 '카트린 드 메디치'까지 굵직한 역사의 흐름을 좇아왔다.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니 묵직한 주제보다는 '샹티 성' 사진을 보고 '시모네타'가 아니라 달달한 '샹티 크림'을 떠올렸으면 좋았었겠다는 생각도 든다.
오늘날 우리가 '휘핑크림'이라 부르는 크림의 원조가 바로'샹티 성'이란 재미있는 이야기도 있는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