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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장산 호랑이 Oct 05. 2019

<<20 VS 80의 사회>>

<<20 VS 80의 사회>>, 리처드 리브스  

국민들이 '조국 후보자 사태'를 바라보는 눈자위엔 '당혹스러움'이 스며있다. 386 진보 지식인이 자녀에게 사회적 지위를 물려주기 위해 그악스럽게 편법과 탈법을 동원한 모습은 부유층이 부를 세습하기 위해 사납게 안간힘을 쓰는 것과 다르지 않다. 조국 후보자는 강남 좌파의 진정성을 믿어달라지만 공직자 조국이 진정 강남 중상류층의 정체성을 벗어버릴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자신의 자녀가 하향 이동을 할 가능성이 현실적으로 충분히 존재한다고 느낀다면 하향 이동을 할 때 연착륙을 할 수 있게 해 주는 정책에 더 열린 태도를 갖게 될 것이다." <<20 vs 80의 사회>>의 고갱이를 한 줄로 압축하면 이런 내용이다. 중상류층 부모가 자녀의 계층 하향 이동 가능성을 인정해야 그 부모도 진보적 재분배 정책을 진심으로 성원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많은 사람들이 조국 후보자에 대해 당혹감을 느끼는 지점이 이 책의 고갱이와 맞닿아 있는 것 같다.

리처드 리브스는 <<20 vs 80의 사회>>에서 상위 19%를 겨냥한다. 상위 19% 계층 사람들은 그동안 상위 1% 계층에게 부와 자원이 편중된다며 도덕적 알리바이를 주장했지만 리처드 리브스가 볼 때 상위 19%의 책임은 결코 가볍지 않다. 브루킹스 연구소 연구원으로 중상류층의 일원인 리처드 리브스는 "적어도 약간은, '우리'는 비난받아야 한다"고 말한다.  

왜 비난을 받아야 하는지, 현상부터 보자. 우선 경제다. 계층간 '판의 이동'이 가장 격렬하게 일어나는 단층선은 상위 20%와 나머지 80%다. 상위 20% 가구가 소유한 부는 1983년부터 30년 동안 83% 증가했다. 반면 나머지 사람들의 부의 증가 폭은 미미하다. 상위 1%로 부가 집중했다고 단정지을 수도 없다. 1%를 제외한 나머지 19%는 미국 전체 부의 절반 이상을 소유하고 있다.

또 다른 현실은 사회 계층이다. 미국 사회는 세대간 계층 이동이 거의 없는 경직된 사회다. '부'를 기준으로 상위 20% 가구에서 태어난 아이의 절반이 상위 20%에 그대로 머무른다. 상위 20%가 부지불식간에 울타리를 만들어 부를 세습하고 있는 것이다. 시계열 종단면이 아니라 미국 사회의 횡단면을 살펴봐도 상위 20%의 폐쇄성은 현저하게 나타난다. 상위 20% 계층은 '같은 수준'에서 배우자를 고르고 비슷한 사람들끼리 이웃을 맺는다. 네트워크로 형성된 인적 자산이 상위 20% 계층에 머물고 다른 계층으로 이전되지 않는다.

리처드 리브스는 계층간 이동성이 현저히 떨어지는 이유를  '유리 바닥'과 ‘기회 사재기’라는 용어로 설명한다. 중상류층 부모는 자녀의 계층이 추락하지 않도록 유리 바닥을 만들어준다. 중상류 계층이 부모로부터 물려받는 것은 '부'에 국한되지 않는다. 중상류층 자녀는 여행과 책 등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경험치가 저소득층 자녀와 다르다. 사회성, 자기 규율은 물론 심지어 노동 윤리까지 소득과 부의 원천이 되는 습성이 공기처럼 부모에서 아이에게 옮아간다.

중상류층은 자녀가 성년이 된 이후엔 인맥을 활용한 '인턴 경험'을 만들어줌으로써 원활한 노동 시장 진입을 돕는다. 인턴을 할 수 있는 시간과 여력조차도 중상류층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성인이 생업에 종사하지 않고 오롯이 미래를 위해 시간을 투자하는 것 역시 흔치 않은 기회다. 이른바 ‘기회 사재기’다
 
그럼에도 상위 20% 계층은 '나의 지위는 나의 능력에 따른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그러나 중상류층의 지위는 결코 스스로의 노력에 의해 '획득'되는 것이 아니라 '세습'된다. 중상류 계층이 자녀 교육을 위해 돈과 시간, 그 밖의 자원을 투자하는 행위의 동기를 비난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그 결과로 자신의 자녀가 특혜를 입게 되는 현실은 인정해야 한다. 뉴욕 대학의 철학자 새뮤엘 셰플러의 말마따나 "어떤 사회적 환경에서는 자녀를 위하는 부모의 바람직한 행위로 여겨지는 것이 다른 사회적 환경에서는 용납될 수 없는 특혜이자 부패로 여겨질 수 있다"

리처드 리브스는 공공 담론 영역에서 주도권을 쥐고 있는 중상위 계층이 바뀌지 않으면 거대한 불평등 구조를 바꿀 수 없다고 역설한다. 중상류층이 지금보다 손해를 볼 각오를 해야 한다. '우리 아이'가 아이비리그 대학에 가는 것보다 공립대학에 진학하는 것에 만족하는 상황을 감수하자는 거다.  

책의 결론 부분은 다소 허무하다. 하버드 대학교 등의 동문 자녀 우대 제도를 폐지하자는 주장은 지나치게 '미국적'인 문제 인식과 대안 제시다.  

대신 지극히 한국적 상황인 조국 후보자의 사례를 짚어본다. 조국 후보자는 딸이 공평하게 기회를 얻었고, 과정은 공정했다고 항변하고 싶을지 모른다. 그러나 국민은 그것을 '정의'라 부르지 않는다.

"사람들이 계급 사다리에서 자신이 어느 칸에 있게 될지 모르는 상태에서, 그 사회의 구조에 동의할 수 있는 사회" 리처드 리브스가 인용한, 존 롤스가 말하는 공정한 사회는 이런 것이다. 국민들이 진정 원하는 '정의'도 이런 것이 아니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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