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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드림폴 Oct 23. 2018

치약 전쟁

김이쁨과 이멋짐



야간근무하는 날이라 아침에 외출하는 아내를 배웅한 뒤 금붕어와 구피 그리고 발톱개구리 어항에 밥을 넣어 주고, 베란다 창가에 놓인 화초들에게 물을 주고는 조금 늦은 아침밥을 먹고 나서야 양치질을 하러 욕실에 들어갔다.  


세면기 위에 아무렇게나 쥐어짜져 꽈배기 모양이 되어버린 치약이 툭 던져져 있다. 아무 생각 없이 뚜껑을 열고 칫솔에 치약을 짜내어 묻힌 뒤 이를 닦다가 피식 웃음이 났다.


신혼 때 치약 짜는 것 때문에 아내와 종종 다투었던 기억이 났기 때문이다. 아내는 치약을 손에 쥐고 중간부터 아무렇게나 꾹 눌러 짜고 아무렇게나 던져두었고, 나는 끝에서부터 잘 눌러서 짠 후에 치약 두는 곳에 가지런히 놓아두었었다.

욕실에 들어가서 내가 잘 짜서 가지런히 놓아둔 치약이 마구 눌러진 채 아무렇게나 내동댕이 쳐져 있는 것을 보면 확 짜증이 났다.


아, 쫌 치약 좀 잘 짜라고
왜 아침부터 짜증이야? 급하면 그럴 수도 있지. 자기 양말이나 뒤집어 벗어 놓지 마


매일 아침저녁으로 양치는 해야 하니 꼭 다툼으로 번지지는 않았지만 매일 아침저녁으로 욕실에 들어가면 화를 삭이며 뭉그러진 치약을 예쁘게 다듬고는 했다.

아! 그리고 대충 걸려 있는 수건도 끝 단을 잘 맞추어서 수건걸이에 다시 거는 일도 거의 매일 했었다.



오래 전에 심혜진 씨와 최민수 씨가 주인공으로 나온 '결혼 이야기'라는 영화가 있는데, 영화에는 치약 짜는 것 때문에 부부싸움을 심하게 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 영화를 보면서 '아니 뭐 저런 걸로 저리 싸우나'라고 굉장히 어이없어했는데 막상 내가 결혼을 하고 정말 치약 하나 때문에 싸우게 되고 보니 참 기가 막혔다. 결혼 전까지 몸에 배어있던 습관이 쉽게 고쳐질 리 없다. 어찌 보면 별 일 아닌 것도 같은데 왜 그리 눈에 거슬리고 화가 나는 건지 내 감정을 이해하기도 어려웠다. 가지런히 정리를 해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던 건지. 사실 내 성격상 반듯하게 각을 잡고 정리 정돈을 해야 직성이 풀리는 면이 있기는 하다. 음... 피곤한 스타일이긴 하지만 우선 주변이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어야 안정이 되고 일에도 몰입할 수 있는 편이다.

  


어쩌면 결혼생활 내내 이어질 것 같던 '치약 전쟁'은 의외로 쉽게 해결되었다. 어느 날인가 하도 화가 나서 '에잇!' 하면서 나도 치약을 꽉 움켜쥐었는데 어찌나 세게 눌렀던지 뚜껑도 날아가고 치약이 한 반통은 쏟아져 나왔다. '아이씨'를 연발하면서 쏟아진 치약을 수습하고 분노의 칫솔질을 한 후에 '그래 너도 한 번 얼마나 짜증이 나는지 한 번 당해 봐라'하는 마음으로 뭉그러진 치약 통을 아무렇게나 던져두었다. 그런데, 아내가 욕실에 들어간 지 한참이 지났는데도 조용하더니 나와서도 별 반응이 없다. 화장대에 앉아 열심히 얼굴을 토닥이고 있던 아내에게 침대에 옆으로 누운 채 물었다.


자기 양치했어?
응.
치약 봤어?
응. 왜?
나도 치약 아무렇게나 짜고 놓아두었는데?
그래? 몰랐어. 근데 그게 왜?
아니야. 나도 이제 치약 막 짠다.
맘대로 해.


이런 시답잖은 이야기는 통 관심이 없다는 듯이 시큰둥하다. 나 혼자서만 치약 때문에 속을 끓이고 스트레스를 받았던 거다. 치약이 가지런히 잘 정돈되어 있든, 아무렇게나 짜져서 던져져 있든 그것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각자의 성격대로 방식대로 느끼는 것이 받아들이는 것이 달랐던 것이다. 음.. 역시 내가 피곤한 스타일이야. ㅠㅠ


이후부터 나도 치약을 대충 잡아 꾹 짠다. 처음에는 내가 하고도 눈에 거슬리고 왠지 다시 끝에서부터 예쁘게 밀어 올려 모양을 잘 정돈해야만 할 것 같은 생각에 마음이 불편하기도 했지만, 어느새 아무 생각 없이 무의식적으로 잡히는 대로 꾹 짜버리게 되었다. 아무렇게나 집히는 데로 짜고 대충 던져두는 것이 이렇게나 편한데 말이다. 그리고 괜히 하지 말라는 짓 더 하며 어깃장을 놓을 때 느끼는 묘한 재미 비슷한 감정도 살짝 있다. 완벽한 일상의 긴장감을 흔드는 작고 소심한 일탈이 주는 흥분 같은 것이라고 할까?


아무튼 이후로 더 이상 치약 때문에 다투는 일은 없어졌다. 이십몇 년, 삼십몇 년, 혹은 그 이상의 인생이 만나 서로의 삶에 차츰 스미어 드는 것. 그것이 결혼 생활인가 싶다. 그러면서 부부는 닮는가 보다. 서로의 삶에 조금씩 녹아들면서.


아내가 돌아오기 전에 설거지 하러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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