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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영준 Jul 21. 2016

#085. 데몰리션

소중한 사람을 잃은 이의 마음은 헤아리기 어렵다.




01.


2년 전, 영화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2014)에 이어 작년 <와일드>(2015)가 연이어 개봉하면서 국내 팬들에게도 조금씩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감독이 있다. 비록 국내에서는 두 작품 모두 큰 흥행을 하지 못했지만, 박스 오피스의 성적과 관계없이 그의 작품들은 언제나 주제의 명확한 지점을 조명하며 관객들에게 많은 이야기들을 전해 주었다. 이번 영화 <데몰리션>의 "장 마크 발레" 감독이다. 이름만 보면 프랑스 출신의 감독처럼 여겨지지만 사실 그는 캐나다 출신의 감독이다. 그의 이름이 프랑스 식 표기를 따르고 있는 것은 그가 퀘벡 주 출신이기 때문. 앞서 이야기 한 것처럼 국내에서는 아직 인지도를 끌어올리지 못한 감독이지만 그는 나름대로 영화계의 엘리트 코스를 걸어 온 인물이다. "장 마크 발레" 감독의 첫 장편 연출작이었던 <블랙 리스트>(1995)는 캐나다의 영화제 중 하나인 '지니 어워드'에서 무려 9개 부문에서 노미네이트 된 바 있었으며, 단편 영화 <Les Mots magiques>(1997)는 걸출한 신인 감독들의 등용문인 '선댄스 영화제'의 경쟁 부문에 이미 초청된 바 있었다. 이후 <영 빅토리아>(2009)와 <카페 드 플로르>(2011)가 평단의 극찬을 이끌어 낸 것은 물론,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과 <와일드>는 '아카데미 시상식'의 사랑을 받기까지 했으니, 글쎄 그 동안 몰랐다고 하더라도 그의 이름을 한 번쯤 기억해 두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장 마크 발레 감독.

02.


이번 영화 <데몰리션>에 대한 소식은 지난 작품 <와일드>가 개봉하기 전부터 들려왔다. "장 마크 발레" 감독의 차기작은 사랑하는 이를 잃은 한 남자의 내면에 대한 이야기가 될 것이며, 그 주인공으로는 "제이크 질렌할"이 될 가능성이 아주 크다는 소식. 이 소식을 듣자마자 나는 두 가지 매우 흥미로운 사실에 주목했다. 첫 번째로 "제이크 질렌할"이라는 배우가 "장 마크 발레" 감독을 만나 어떤 연기를 보여줄 것인지에 대한 것. "장 마크 발레" 감독은 현장에서 작업할 때 스토리보드를 만들지 않는 감독으로 유명하다. 이는 곧 다른 의미로 해석하자면, 감독의 상상력과 배우의 상상력이 매우 합일된 그림을 그리며 작업을 해야 한다는 것이며, 서로의 능력에 대해 그만큼 믿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제이크 질렌할"의 경우에는 이미 <브로크백 마운틴>(2006), <에너미>(2014), <나이트 크롤러>(2015) 등의 작품을 통해 캐릭터의 내면을 표현해 내는데 뛰어난 재능을 보였고, 그런 "제이크 질렌할"이 "장 마크 발레"의 작품들을 모를 리 없었을테니, 확실히 두 사람 사이에 필요한 것은 재능에 대한 신뢰라기보다는 서로에 대한 인간적인 믿음이었을 것이다.


03.


두 번째로 흥미로운 것은 <데몰리션>의 내용으로 인해 "장 마크 발레" 감독이 현재 어떤 소재들에 집중하고 있는 지 알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 전에 먼저 그가 모든 작품들에서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것은 단 하나다. 영화 속에 그려내는 자신의 이야기들을 통해 관객들이 어떤 리얼리티적인 심리와 감정을 전달받을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것. 하지만 초창기에 그가 집중했던 부분은 개인의 삶이라기보다는 비슷한 이야기를 지니고 있는 개인들의 합이라고 할 수 있는 '집단'에 대한 이야기. <크.레.이.지> 속 가족들의 이야기가 그랬고, <영 빅토리아>의 상류층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그랬고, <카페 드 플로르> 속 세 커플의 사랑이 그랬다. 그는 그런 집단의 모습을 통해 서로를 대칭시키기도 하고, 투영시키기도 하면서 이야기를 풀어냈다.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 때 역시 그런 모습들이 남아 있다. 그 중심에는 "론"(매튜 맥커너히 역)이 있기는 하지만, 같은 병을 앓고 있는 이들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그 집단 속에서 "론"이라는 개인의 행동에 집중하고 있다. 하지만 <와일드>부터는 그의 시선이 온전히 다른 곳을 향해 있다. 이제 그는 더 이상 어떤 '집단'에 대해서 이야기 하지 않는다. 오롯이 '개인'의 영역이다. 영화 <와일드>의 "셰릴 스트레이드"(리즈 위더스푼 역)이 그랬듯이 이 영화 <데몰리션>의 "데이비스"(제이크 질렌할 역) 역시 모든 시선은 개인의 내면에 집중되어 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어쩌면 집단 속 개인의 모습을 부각시켰던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이라는 영화는 '집단'으로 표현될 수 있는 "장 마크 발레" 감독의 1기와 '개인'으로 그룹핑 할 수 있는 2기의 연결 고리 역할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어요.


04.


영화는 아내인 "줄리아"(헤더 린드 역)의 충격적인 죽음으로 시작된다. 함께 타고 가던 자동차로 트럭 하나가 질주해 사고가 나면서 운전대를 잡고 있던 "줄리아"가 현장에서 즉사해 버린 것이다. 속내는 알 수 없지만 겉으로는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있던 "데이비스"(제이크 질렌할 역)의 가정은 그렇게 박살나 버린다. "데이비스"의 가정이 박살나 버렸다고 이야기한 것은 이 사고에서 그가 홀로 살아 남았기 때문이다. 너무나도 멀쩡하게. 이 내용이 담긴 부분의 영상은 '오프닝 타이틀'이 등장하기 전 모두 전달되고 있다. 다만 많은 영화에서 이 부분의 영상이 전체 내용을 포괄하거나 암시하는 것과 달리, 이 작품 <데몰리션>의 '오프닝 타이틀' 전 영상은 이 작품의 어떤 프롤로그(Prologue)와 같은 역할을 한다. 이 영화는 '오프닝 타이틀' 이후의 본 영상을 통해 그렇게 홀로 살아남은 "데이비스"라는 인물에 대해 그려 나간다.


05.


이 영화에서 가장 큰 특징은 다른 작품들과 달리 영화의 모든 장면이 관객들을 향해 있는 것이 아니라 주인공인 "데이비스" 본인에게 향해 있다는 점이다. 만약 이 영화의 드라마가 다소 불친절하게 느껴졌다면 그것은 이 작품의 만듦새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감독의 의도된 연출 때문이다. 이를 통해 관객들은 어떤 이야기를 전해 듣는 느낌이 아니라 누군가의 삶을 들여다보는 기분을 느끼게 되는데, 영화의 본격적인 스토리가 "데이비스"의 편지를 - 고장난 자판기를 만든 회사로 보냈던 - 통해 시작된다는 점 역시 같은 맥락에서 해석될 수 있다. 그래서 이 영화에 대한 관객 개개인의 호불호는 더 크게 느껴질 수 밖에 없다. 같은 사람의 인생을 들여다 본다고 해서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나. 그리고 이 영화 속 "데이비스"의 이야기처럼 극단적일수록 누군가의 삶에 대한 공감의 범위가 좁아짐과 동시에 깊어진다.


아내의 죽음 후에도 그는 일상적인 모습을 보인다.

06.


아내의 죽음 이후 "데이비스"가 느끼는 첫 번째 감정은 슬프지 않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사랑했던 이가 자신의 곁을 떠났다는 사실보다 고장난 병원 자판기가 초콜렛을 내어주지 않았다는 사실에 더욱 화가 난다. 병원에서 장인의 집으로 돌아와 서재에서 거울을 보며 힘껏 찡그린 표정을 지어보지만 거울 속에 비친 표정만 일그러질 뿐 그는 조금도 감정의 동요를 일으키지 않는다. 대신 아직도 풀리지 않은 병원 자판기에 대한 화를 풀기 위해 회사 고객센터에 편지를 쓰기 시작한다. 설명한대로 아내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돈을 삼킨 자판기 회사에 편지를 적는 것은 분명 그에게 있어 이성적이지 않은 행동이다. 여기서 이성적이지 않다는 표현은 그가 감정적으로 가장 무너질 법한 상황에서 너무나 일상적인 일들을 해내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자판기 회사에 편지를 쓰는 일 뿐만이 아니다.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혼자 식사를 하고, 매번 같았던 시간에 기상을 하고, 또 같은 시간에 회사로 출근한다. 모든 사람들이 그를 이상하게 쳐다보지만 그의 행동에는 변함이 없다. 다시 돌아와서 그가 고객센터에게 보내기 위해 쓴 편지의 내용을 보자. 그가 편지를 쓰는 행위 자체는 굉장히 일상적이지만, 그 내용은 일상적이지 않다. 영화가 그의 편지를 빌려 스토리를 진행하고 있을 정도로 그는 자신의 삶 전반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들을 기록하고 있었다. 세상에 어떤 사람이 한 회사의 고객센터에 그런 이야기를 보낸단 말인가. 그는 정말로 슬프지 않았던 것일까?


매미 나방, 그들이 나무를 망쳐.

07.


아니. 나는 그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큰 슬픔을 느꼈으리라 생각한다. 다만 사고의 충격으로 인해 그의 마음 속에 있는 슬픔의 씨앗을 느끼지 못했던 게 아닐까. 아니 어쩌면 모른 척 하고 싶었던 것 같다. 실제로 영화 속에는 그런 장면들이 순간적으로 지나쳐 간다. 아내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지인들이 집 앞에 가져다 놓은 선물들을 외면하고, 냉장고에 붙어 있던 아내의 쪽지 - 생전에 그에게 남겼던 - 를 모른 척 하고, 장인인 "필 이스트우드"의 제안들을 듣기만 할 뿐이다. "줄리아"의 이름으로 배달된 카푸치노 기계도 마찬가지. 기차에서는 자신의 진짜 기분을 묻는 남자의 모습에 비상 제동 장치를 내리며 격한 반응을 보인다. 만약 그녀의 죽음이 그에게 진정으로 아무런 감정을 낳지 않았다면 그 때도 그의 행동은 이러했을까? 더 결정적인 장면은 출근 길의 "데이비스"에게 그의 아버지가 내뱉는 대사에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매미 나방, 그들이 나무를 망쳐. 애벌레에서 시작하지. 잎을 먹고 알을 낳고.." 그의 대사 속 '매미 나방'이 바로 "줄리아"의 죽음이 그의 마음 속에 남긴 작은 애벌레의 존재가 아니었을까? "데이비드"도 제대로 깨닫지 못한 사이에 그 애벌레는 자라나고 있었던 것이다.


08.


아내의 아버지인 "필 이스트우드"의 존재도 그에겐 해결해야만 하는 일들 중 하나다. 일반적으로도 사위에게 장인이라는 존재는 쉽지 않은 대상이지만, 파티에서 그녀를 만나기 전까지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던 "데이비드"에게 그는 더 어려운 존재였을 것이다. 애초에 이 결혼을 흔쾌히 찬성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사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면전에다 하기도 했던 장인이다. 현재 그가 다니고 있는 회사의 오너이기도 하니, 그 사고에서 혼자 남았다는 사실이 그에겐 얼마나 큰 짐이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이 딸을 위한 재단을 설립하자는 것에 즉각적으로 동의하지 않은 까닭은 마지막까지 자신의 아내를 지키기 위함이었다. 이 대목에서 나는 "데이비스"가 자신의 슬픔을 모른 척 했다는 것에 조금 더 가까운 해석을 내놓고 싶은데, 자신이 재단 설립을 위한 서류에 사인을 하는 순간 아내 "줄리아"의 죽음은 명문화 되어 외면할 수 없는 사실이 되어버린다는 사실 때문이다. 아직까지 "줄리아"의 죽음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그에게 그 문서야 말로 가장 외면하고 싶은 대상이다.


아내가 죽으면 홀아비고, 부모가 죽으면 고아지. 하지만 아이가 죽으면..


09.


그 대신 "데이비스"는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슬픔을 받아들이고자 한다. 아내가 죽은 그 사고에서 홀로 박살나지 않은 스스로를 자신이 박살내 가는 것. 처음 작은 기계류(냉장고, 화장실, 카푸치노 머신)에서 시작했던 이 행위는 그 선에서 해답을 찾지 못하고 점차 더 폭력적이고 자학적으로 변해간다. 자신의 몸을 향해 총을 겨눈 뒤 쏴 보기도 하고 - 방탄 조끼를 입은 것으로 보아 이 행위가 죽기 위함은 아니다. -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자 아내와 함께 살던 집을 모두 박살내 버리기도 한다. 물론 이런 행위들을 통해 그가 스스로 원하던 해답을 찾을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스스로 할 수 있는 주변의 모든 것들을, 심지어 자신마저도 파괴해 보았지만 그의 삶에서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니 오히려 자신의 아내가 다른 남자와 바람을 피웠다는 사실을 더 알게 되었을 뿐.


그가 찾고자 했던 것은 무엇일까.

10.


이 때까지 길게 늘어놓은 "데이비스"와 "줄리아"의 이야기와 평행한 구조로 "데이비스"와 "캐런"(나오미 왓츠 역)의 이야기 역시 이 영화의 한 축을 담당한다. 어떻게 보면, "줄리아"와 "캐런"은 정 반대의 성격을 갖고 있는 인물들이다. 언제나 절제된 듯 완벽한 삶을 살아 온 "줄리아"와는 달리 "캐런"의 삶은 그렇지 않다. 이 말은 곧 "줄리아"의 가족들과 함께 살아온 "데이비스"와 "캐런"의 삶 역시 다르다는 의미가 된다. "캐런"은 자신에게 부족한 부분들을 충분히 인정하며, 오히려 그런 부분들을 즐기는 인물이다. 처음에 "데이비스"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자신의 이질적인 행동에 관심을 보이는 그녀의 모습에서 호감을 느끼기 시작했을 지 모르지만, 어쩌면 그에게 있어 "캐런"이라는 사람은 그 동안 얽매여 있었던 "줄리아" 가족의 가식적인 틀에서 벗어날 수 있는 출구였을 것이다. "줄리아"가 겉으로 아무리 고고한 척을 해봐도 결국은 남편 몰래 다른 남자와 사랑을 나눈 전력을 감출 수는 없지 않나. 물론 이 부분에 대한 해석은 그녀의 엄마가 마지막에 언급했듯 그 동안 "줄리아"의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은 "데이비스"의 탓으로 돌릴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속과 겉이 다르다는 점에서는 "데이비드"에게 "캐런"과는 다른 지점을 제공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당신이 하는 걸 알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완전히 솔직해 지는 것


11.


영화의 중,후반부로 접어들면서 "장 마크 발레" 감독은 이전에는 보여주지 않은 장치를 하나 더 마련한다. "데이비스"의 눈에 이미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줄리아"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한다는 점을 관객들에게 슬며시 보여주는 것이다. 이 글의 처음에서 이야기 했듯이 이 작품은 모든 시점이 주인공 "데이비스"에게 집중되어 있기에 그의 눈에 "줄리아"의 모습이 보인다는 부분을 드러내 알려주는 경우과 그렇지 않은 경우에 이 작품을 해석하는 방향은 상당 부분 달라질 수 밖에 없다. 물론 그의 눈에 "줄리아"가 보이기 시작한 지점이 영화의 시작부터였는지, 감독이 의도했던 중,후반의 그 지점부터 였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적어도 그의 행동들이 아무런 감정이 존재하지 않는 상태에서, 영화에서 이야기 하는 것처럼 슬픔을 느끼지 않은 상태에서 행해진 것은 결코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12.


참 어려운 작품이다. 올해 쓴 글 중에 가장 많은 페이지를 찢어내고 또 써낸 작품이 이 영화 <데몰리션>이다. 생각해보면 "장 마크 발레" 감독의 작품들은 대체적으로 그랬던 것 같다. 영화관에 앉아서 볼 때는 그렇게 복잡한 구성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는데, 돌아와서 복기해 보면 도무지 어느 부분부터 건드려야 할 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감정들이 뒤섞여 혼재하는 느낌. <에너미>(2013)를 연출한 "드니 빌뇌브" 감독의 작품이 외면상으로도 어려우면서 깊은 메세지를 내포하고 있는 것과 반대로 "장 마크 발레" 감독은 쉬운 장면들을 연출하면서도 복잡한 감정들을 다루고 있는 느낌이랄까. 글쎄. 생각보다 많은 시간을 투여했음에도 이 글이 썩 마음에 들지 않는 걸 보면 누군가를 잃은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는 일은 현실에서도, 영화 속에서도 그리 쉬운 일이 아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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