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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라현 Aug 24. 2024

노란 주둥이

더 주려는자 vs 덜 가져가려는자

 TV화면 속에서 몸집이 작은 새가 둥지를 날아들었다. 둥지 위로 노란색의 주둥이들이 올라왔다. 온몸을 파르르 면서 필사적으로 입을 하늘을 향해 벌렸다. 어미새둥지로 날아들었다. 하단에 붉은 머리 오목눈이라는 자막이 나왔다. 어미새는 입 벌어진 새끼들의 부리 안으로 잡아온 벌레를 깊숙이 넣어주고는  TV 화면 속에 사라졌고 주둥이를 크게 벌리고 짹짹대는 새끼들을 비추었다.




 집을 나서기 전 옷을 갈아입고 거실에 나오니 가방 안에 무언가 가득 채워져 있었다. 가방 안을 열어 보니 검은색 비닐봉지 안에 귤 여섯 개와 바나나 두 개도 들어 있었다.

“엄마 이런 건 먹고 싶으면 코앞에 있는 마트에서 얼마든지 사서 먹을 수 있어. 이런 거는 엄마 아빠가 드셔.” 우리 집은 과일 하나 사러 가려면 버스를 타고 읍내까지 나가야 사 올 수 있는 시골에 있었기에 부모님이 드시길 바랐다.

그러자 엄마는 내가 꺼내 놓은 바나나와 귤을 다시 내 가방에 집어넣으며 말했다.

"너도 자식 있어봐. 뭐 하나라도 더 주고 싶은 게 부모 마음이니까. 올라가는 길에 배고프지 않게 먹어"

엄마의 말에 토를 달지 않았다. 언제나 그랬듯 귤 세 개만 가져가는 걸로 엄마와 원만한 협의를 하고서야 집을 나설 수 있었다.




 나는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일찌감치 자취생활을 시작했다. 그래서 주말을 맞이해 집에 내려갔다 자취집에 오는 날에는 늘 양손에 엄마가 싸준 음식보따리가 들려 있었다. 그렇게 고등학교 내내 엄마가 싸준 음식 보따리를 자취방으로 참 많이도 날랐었다.

 우리 집에서 자취방까지 약 두 시간 반을 시외버스를 타고 가야 했다. 당시에는 운이 좋으면 좌석에 앉아갈 수 있었지만 운이 없으면 입석으로 가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버스를 타면 담배, 음식, 화장, 향수, 엔진에서 올라오는 기름 냄새까지 뒤섞여 내 속을 뒤집어 놓기 일쑤였다. 비위가 약했던 나는 긴 시간 멀미에 시달려야만 했다. 그 와중에 김치국물이라도 새는 날이면 그야말로 곤욕이 아닐 수 없었다. 버스를 타자마자 속을 달래기 위해 버스 창문을 열고 얼굴을 창밖으로 내밀고 바깥공기를 마시는 게 첫 번째 일이었다. 그리고 금세 차가워진 배를 움켜잡고 뱃속이 가라앉기만을 바라며 버스기 빨리 터미널에 도착하기만을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터미널에 도착하면 무거운 음식보따리를 들고 화장실로 달려가는 게 일이었다.


 차츰 차멀미와 무겁다는 핑계로 엄마가 싸준 음식을 조금씩 빼놓고 오는 횟수가 늘기 시작했다. 내가 먹을 수 있는 양만큼 최소한으로 가져가려 했다. 그래서 나는 엄마에게 음식을 적당히 싸달라고 요청하지만 늘 엄마는 아랑곳하지 않고 한 보따리를 싸주었다. 그때마다 엄마와 실랑이를 벌였다. 나는 보따리를 풀어 절반을 덜어내었다. 그리 자주 집에 내려오지 않으면서도 다음 주에 또 오겠다고 핑계로 절반만 가져가가겠다고 고집을 피웠다.  매번 그럴 때마다 엄마의 핀잔을 들으며 서운함이 가득한 엄마 얼굴을 뒤로하고 집을 나설 때가 많았다.


 한창 부모 품 안에 있을 나이에 타지에서 혼자 학교를 다니는 어린 자식이 엄마 입장에서 무척이나 안쓰러웠을 것이고 평소 따뜻한 밥 한 끼 챙겨주지 못한다는 것이 못내 아쉽고 미안했을 것이다. 그 안쓰러움과 아쉬움 그리고 미안함을 조그이나마 상쇄해 줄 수 있는 것은 주말에 내려오는 자식을 위해 반찬을 만들고 김치를 담가 평소 못해주었던 만큼이나 음식보따리는 무거웠을 것이다. 그 엄마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채 끝끝내 보따리에서 음식을 덜어내고야 마는 아들의 모습에 엄마는 얼마나 속이 상했을지 감히 헤아릴 수 조차 없다.




 명절 연휴 마지막날이면 매번 더 주려는 자와 덜 가져가려는 자들 간의 실랑이가 벌어졌다. 예전에 차가 없었던 남동생은 버스 타고 올라가야 했기에 가져가기 번거롭다는 이유로 매번 엄마의 보따리를 마다했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지만 엄마의 마음 90%를 뺀 양만큼만 챙겼다. 누나는 당시 차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엄마가 싸주는 음식을 잘 가져가지 않았다. 엄마는 그런 누나의 모습에 많이 서운했는지 누나가 집을 떠난 후 나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었다.

"다른 집 딸들은 시집가고 친정에 오면 못 가져가서 안 달이라는데 니 누나는 뭘 싸주든 됐다고만 하고 왜 그런다니?"

언젠가 누나 집에 놀러 갔을 때 엄마가 음식을 안 가져가는 것에 많이 속상해하더라고 누나에게 말한 적이 있었다. 그때 누나의 입장은 이러했다. 집에서 시내를 나가려면 20분이나 되는 거리를 걸어서 버스를 타야 한다. 허리가 꼬부라진 노인네가 무거운 짐을 이고 지고 그 먼 거리를 걸어오는 모습을 떠올리면 쉽사리 기분 좋게 마냥 받아올 수 없었다는 것이었다. 누나는 오랜 전 나처럼 엄마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것은 매 한 가지였지만 그 이유는 전혀 달랐다.




 TV화면에 어미새가 다시 둥지로 날아들었다. 새끼들은 또다시 필사적으로 어미새의 주둥이를 향해 입을 벌렸다. 어미새는 새끼 주둥이 안으로 잡아온 먹이를 넣었다. 그리고 어미새는 또다시 화면밖으로 사라졌다.

어미새는 앞으로도 무수히도 먹이를 날라다 새끼들 입에 넣어 줄 것이다.

새끼들이 스스로 비행하는 그날까지.... 아니 어쩌면 그 이후에도.... 우리네 엄마처럼




 엄마는 시간이 흘러 흰머리에 꼬부랑할머니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식들의 마음이 어찌 되었든 아랑곳하지 않고 자식들을 위한 음식 보따리를 준비해 놓는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더 주려는 자와 덜 가져가려는 자 간의 실랑이는 계속 이어지길 바랄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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