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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 young in season Mar 16. 2019

Walking down the libraries

도쿄에서, 책 속을 거닐다. 


지난주 도쿄엔 아직 벚꽃이 피지 않았다.


메구로 강가에 가득한 벚나무들은 아직 빈 가지였고, 세계적이라던 스타벅스 로스터리에서 받은 대기표는 5326번이었다. 지금 들어가는 팀의 번호는 4500번대. 이런 풍경은 태어나 처음이었다.



건물을 둘러싸고 각국의 관광객과 현지인들이 구름 떼처럼 뭉치고 흩어져 거대한 4층의 건물을 중심으로 움직였다. 처음엔 이해가 되질 않아서 유명 연예인이 오냐고 물었으니까. 심지어 누군가는 내게 버리는 대기표를 달라고 했다. 오늘 안에 입장은 가능한 걸까 싶은 질문을 가지고 유리벽 너머, 우리보다 800번째 먼저 들어간 그들을 거대한 시설과 함께 구경했다.



처음 보는 규모의 로스팅 머신과 황금빛 장치들, 그리고 스타벅스에서 처음 보는 베이커리는 흡사 할리우드 영화 세트장을 연상시켰다. 여기서 마실 수 있는 커피 또한 도쿄의 어느 스타벅스 리저브에서 서비스하는 커피와 다르지 않을 텐데, 새로운 방식의 놀이 공원의 개장과도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면 과한 걸까. 커피를 즐기는 장소와 서비스에 집중하겠다는 스타벅스의 미래는 매장의 진화가 결론일까. 수많은 조명에 반사된 구릿빛으로 반짝이는 건물을 뒤로하고 해 질 녘의 강가를 걸었다. 스타벅스에서 입장 대기(100명 정도를 남겨두고 길에 세운다) 요청이 온 것은 그 후로 세 시간 정도 지나서였다.


도쿄 출장은 대개 도보와의 싸움이다. 거래처를 방문하는 미팅은 짧게 끝난다. 남는 시간은 전부 거리를 걷고, 새로운 곳을 찾아다니고 지금 이 도시에 퍼져있는 분위기를 감지하는 일.



도쿄는 서울의 가까운 미래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일단 걸어야 한다. 구글 맵 상에 궁금한 장소들을 넣어 깃발을 쭉 꽂아 놓은 다음 근처끼리 묶어 동선을 이어 본다. 지도 상으로는 가까운데, 복잡한 지하철로는 풀리지 않는 노선에서는 무작정 걷는 수밖에 없다. 무적의 구글맵에 유일한 한계가 있다면 도보로 건너기 힘든 다리나 고가를 만나는 정도다. 가끔은 지도상에 올려놓은 그 깃발 사이에서 골목을 걷다가 발견하게 되는 것들이 있다. 그래서 도쿄만 오면 하루 25000보를 포기할 수가 없다.


일본 출장 초창기엔 어디를 가야 할지 몰랐다. 직접 찾아다니는 시공간적 한계를 해결해 주던 것이 라이프스타일 잡지였다. 그래서 어디에 가도 서점부터 가는 것이 습관이 된 지 오래다. 그런데 이제는 굳이 책이나 잡지를 찾아다닐 필요가 없다. 거리마다 쉽게 찾을 수 있는 다양한 라이프스타일 스토어에서 브랜드의 취향이나 아이템에 적합한 책들을 함께 팔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들의 라이프스타일 제안을 해당 콘텐츠가 담긴 책으로 하는 셈이다.



무인양품은 이미 자신들만의 큰 서점을 만들었고, 고급 식재료상인 아코메야에도 제법 책이 차지하는 공간이 있다. 인테리어 컨셉 옆에도, 주방 용품 옆에도, 때로는 식재료 옆에도 책이 있다. 대신 가는 곳마다 만날 수 있는 책이 다르다는 점이 차별화될 뿐이다. 긴자 식스 위에 열린 츠타야에서 구경할 수 있는 전 세계의 아트북부터, 메구로 강가의 극단적으로 선별된 카우북스까지. 그렇게 도쿄의 수많은 라이프스타일이 담긴 책장 사이를 거닐다 보면 하나의 거대한 라이브러리 속에 들어온 느낌마저 든다. 잘 정리되고, 색인으로 구별되어 서로의 차별화된 영역을 잘 표시하고 있는 도서관의 도서관리 시스템처럼.


긴자는 지난 일 년 안에만 두 번째다. 지난 출장 땐, 숙소가 5분 거리였지만 이 작은 서점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 긴자라는 거대한 블록의 가장자리에 자리한 뒷골목은 찾아오지 않으면 우연히 발견하기란 불가능해 보인다. 단칸짜리 하얀 공간에서 한 번에 단 한 권의 책을 설명하는 모리오카 서점. 결국은 그곳에 도달했다.



우리가 방문한 시기에 소개되고 있는 책은 한 도예가의 책이었다. 뽀얀 공간에 카운터로 보이는 얇은 책장 하나, 그리고 앞엔 도예가의 그릇과 책들이 놓인 심플한 테이블 두 개. 이게 다야?라는 말은 반사적으로 흘러나왔다. 이 책에 대해 충분히 설명해 주실 수 있는, 판매직원보다는 전시 도슨트에 가까워 보이는 분이 가게를 지키고 계셨고, 한 바퀴 구경이 끝나갈 무렵 이 서점을 만든 모리오카 상을 만날 수 있었다. 간단한 인사를 뒤로 하고 다시 번화한 긴자 거리로 걸어가면서, 그의 지난 인터뷰를 떠올렸다. 책 한 권을 완성하기 위해 드는 시간과 노력에 비해 대형 서점에서 책 한 권에 할애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이 얼마나 되는지. 그 짧은 찰나에 눈에 띄지 못하면 금세 책꽂이에 꽂혀 생명력을 잃고 만다. 



단칸이지만, 세상에서 가장 큰 서점이 그곳에 있었다. 


롯폰기의 분키츠는 '책을 읽는다'는 행위에 더 적극성을 부여한 공간이다. 만화방의 서점 버전이랄까.



분키츠에 들어가며 입장료를 내고, 당일 무제한으로 서점에서 셀렉해 놓은 새 책들을 읽을 수 있다. 모든 책들은 1권씩 구비되어 있고, 사고 싶으면 모두가 함께 보던 그 책을 사갈 수도 있다. 록커에 짐을 넣고, 계속 제공되는 커피 혹은 녹차를 한 잔 받았다. 그리고 언어의 제약이 없는 요리책 섹션 앞에 주저앉았다. 워낙 수입서적의 분량도 방대한 편이고, 분키츠의 관심사도 다양한 덕분에 원 없이 책들을 쌓았다. 정신을 차려보니 세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영화 한 편 보는 가격을 고려했다는 입장료가 전혀 아깝지 않았다. 궁금한 책은 많지만, 소장하고 싶은 책은 그리 많지 않은 요즘, 영리한 비즈니스 모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형서점에서도 얼마든지 공짜로 새책들을 구경할 순 있지만, 제대로 읽기도 어렵고 공짜로 읽는다는 불편함을 지우기 어렵다. 반면에 분키츠의 입장료는 힘이 세다. 일단 들어온 이상은 입장료 때문에도, 최대한 읽겠다는 의지력이 발동되고 이는 결국 선별된 책의 셀렉션 속에서 소장욕구가 드는 책을 발견하는 과정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책 읽기를 이렇게 적극적으로 세련되게 권장하는 서점은 처음이다.



처음부터 도쿄 출장의 목적이 서점 순례는 아니었다. 그런데 돌아보니 골라온 책과 책방의 기억들만 남았다. 사실 인시즌은 지난 삼 년간 준비했던 책 출간을 앞두고 있다. 그리고 그 책을 연남동의 작은 공간을 통해서 모리오카 서점처럼 1년 동안 그 한권만 이야기할 준비를 하고 있다. 어떻게 1년 내내 책 한 권을 이야기할 것인가를 고민 중이다. 결국 사람은 행동에서 관심사가 드러나고 마는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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