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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뮤니크 Nov 12. 2021

슴슴한 사골국물이 주는 감동

브람스 인터메조 op.118 no.2.


 남자는 평생을 사랑한 여자 앞에 앉아있었다. 여자가 자신보다 14살이나 연상인, 그리고 스승의 아내라는 사실도 남자의 사랑을 막을 수는 없었다. 스승이 세상을 떠난 후 홀로 아이들을 키우며 살아가는 여자의 옆에서 필요할 때 도움을 주며 그저 있을 뿐. 세상의 기준으로 봤을 때 남자의 오랜 사랑은 이루어지지 못하고 그렇게 세월이 흘렀다. 음악가였던 남자는 자신이 쓴 곡을 여자에게 헌정했고, 이제 세상을 떠날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그녀가 자신의 곡을 연주하는 걸 귀에 담으며 그렇게 그들은 마지막으로 함께 했다.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는 순간을 떠올려본다. 첫눈에 반해서 아무리 잊으려 해도 마음이 사라지지 않는 사람도 있지만, 처음에는 별 생각이 없었다가 시간이 흐르며 겹겹이 쌓이는 사랑도 있다. 나에게는 이 곡이 그랬다. 브람스 인터메조  op.118 no.2.


  이 곡은 마치 가수 김동률의 노래들처럼 너도 나도 다 좋아하는 곡이다. 한마디로 인기가 많다. 드라마 <밀회>에서 주인공 선재(유아인)가 (김희애)를 사랑하는 마음을 담아 리사이틀 앙코르곡으로 연주할 때에도, 드라마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에서 정경이 예고 시절 과거를 회상할 때 연습실에서 준영(김민재)이 이 곡을 연주하는 걸 가만히 지켜보는 장면에서도 등장한다.


  단지 드라마 속에서만 등장할 뿐만 아니라 피아노 학원에서 연습하다 보면 옆방에서 심심치 않게 들린다. 분명 몇 주 전에도 들었던 거 같은데, 또 다른 사람이 마치 돌림노래처럼 또 연습하는 걸 들을 수 있을 정도로 클래식에 어느 정도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이 곡은 쉽게 알아볼 수 있다. 피아니스트들의 사랑을 받는 곡이기도 하다. 유튜브 앱을 열어 검색하면 라두 루푸, 손열음, 예프게니 키신 등 국내외를 가리지 않고 유명한 피아니스트들이 이 곡을 연주한 영상을 볼 수 있다. 피아니스트 조성진은 도이치 그라모폰에서 유튜브 스트리밍으로 연 세계 피아노의 날 온라인 콘서트에서 이 곡을 연주하기도 했다.


  이렇게 유명하고 사랑받는 곡이면 안 좋아하는 게 더 힘들 정도지만, 이상하게 나는 이 곡에 마음이 가지 않았다. 모두가 좋다고 하면 오히려 관심이 덜 가는 반골적 기질 때문이었을까. 나에게 있어 이 곡은 베토벤 소나타처럼 비장하거나 쇼팽 녹턴처럼 애절하거나 하는 매력이 없는, 슴슴한 사골국물 같은 느낌이었다. 엄마가 큰 솥에 끓여 겨울 내내 식사 때마다 국그릇에 담아주면 '제발 그만...'을 마음속으로 외치게 되는 그런 느낌.


 매력 없는 곡이라고 생각했던  곡에 빠지게   너무 오래되어 영상이 헐었나 싶을 정도로 화질과 음향이 엉망인 연주를 듣고 나서다. 피아니스트 김선욱이 2013 연주한 영상인데, 뒤에 오케스트라가 있는 걸로 보아 협연  앙코르로 추정하고 있다. 피아니스트가 20 중반 즈음 연주했을 텐데  연주를 들을 때면 노년의 브람스와 클라라가 그려지곤 한다. 인생을 달관한 듯한 안정감과, 끝나버린 짝사랑에도 불구하고 남은 애정이 느껴지는 그런 연주. 특히 내가  영상에서는, 곡의 클라이맥스가 끝날 즈음 3 45초에서 나오는 김선욱의 표정과 눈에서 또르르 떨어지는 눈물이 압권이다. (김선욱의 브람스 인터메조 op.118 no.2. 연주는 정식 음반으로도 발매가 돼서, 깨끗한 음질의 음반이나 음원을 들을  있지만 나는  영상이 주는 감동을  좋아한다.)


김선욱, 브람스 인터메조 op.118 no.2

  

피아노를 어렸을 때 배우다가 어른이 되어서 다시 시작하는 사람들이 가장 먼저 걱정하는 건 '악보 읽기'다. 대부분 악보에 그려진 수많은 콩나물을 건반 위에서 제 자리를 찾아 손으로 누를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가진 채 첫 레슨을 시작한다. 나 역시 그런 걱정을 안고 피아노 학원을 등록했고, 최대한 조표가 없는 곡들을 치려고 노력했다. 내 마음속 마지노선은 샾(#)과 플랫이 4개 이하로 붙은 곡들이었다. 그 이상 조표가 붙으면 악보를 읽는 게 불가능할 것 같아 최대한 피했는데 다행히도 이 곡은 샾이 3개 붙은 가장조의 곡이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부분은 곡의 중반 폴리 리듬(49~57마디, 65~74마디)이 나오는 구간이다. 오른손이 연주하는 멜로디 자체도 좋지만, 오른손 연주 사이사이 들어가는 왼손 멜로디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숨어 있는 음이 있는데 그게 꽤 아름답다. 49~57마디는 도돌이표가 있어 두 번 연주해야 하는데 김선욱의 연주를 자세히 들으면 처음에는 그냥 연주하고 두 번째 반복할 때는 위 악보에서 파란색으로 표시한 부분을 더 잘 들리게 해서 반복이 주는 지루함을 없앤다. 같은 멜로디가 한번 더 반복되는 데 이때는 주 선율이 오른손 왼손을 왔다 갔다 하며 강조(아래 악보 참고) 해야 하기 때문에 이걸 놓치면 이 곡의 매력을 살릴 수 없다.


첫 번째 폴리 리듬이 끝나고 양손으로 3화음을 계속 치는 네 마디가 악보 읽는 것조차 어려워서 손에 익히는 데 시간이 한참 걸렸지만, 무엇보다 어렵다고 느낀 건 내가 연주하는 폴리 리듬이 정박으로 들리지 않는 것이었다. 레슨 때 선생님께 여쭤보면 제대로 치고 있다고 말씀해주셨지만 내 귀에는 자꾸 뽕짝처럼 들려서 산통이 다 깨지는 느낌이라 아무리 연습해도 격정적이지만 평안한 그 선율이 들리는 게 아니라 왠 구성진 멜로디가 들렸으니... 어떤 곡을 안 틀리고 치면 다 좋은 게 아니라, 분위기가 살지 않으면 기계가 연주하는 것만도 못하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실감했다.


 문제 해결의 실마리는 엉뚱한 지점에서 발견했다. 이 곡을 치며 나의 피아노 연주의 문제점 중 하나를 깨닫게 되었는데, 그건 음을 하나하나 너무 꼭꼭 누른다는 점이었다. 비유하자면 걸을 때 평범하게 걷는 것이 아니라 발망치소리를 내며 걷는 셈이랄까. 강조하면 안 되는 음을 눌러 치다 보니 연주가 부드럽고 물 흐르듯 가는 것이 아니라 마치 거꾸로 흐르는 강물을 거슬러 오르는 힘찬 연어처럼 너무 힘을 많이 들였고 그렇게 불필요하게 들어간 힘이 연주에서도 느껴지는 것이었다. 늙은 브람스가 부드러운 눈빛으로 클라라를 바라보며 만들었을 곡을(이건 나의 상상이다.) 젊은 내가 손가락에 힘을 바짝 넣어 열심히 치고 있었으니... 내가 좋아하는 유튜브 채널 '또모'의 영상 중에서 서울대 교수인 피아니스트 정소윤이 피아니스트 이나우에게 몰래카메라를 하면서 취미생 연기를 한 적이 있다. 그 영상에서 정소윤은 이나우를 속이기 위해 쇼팽 발라드 1번을 말도 안 되게 친 적이 있는데, 그 영상을 보면 내가 어떻게 브람스 인터메조를 연주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또모의 피아니스트 이나우 몰카 콘텐츠

  이후, 손에서 힘을 빼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하다 보니 곡을 완성하고 녹음을 할 때 즈음엔 이런 느낌이 좀 덜해서 조금이나마 더 만족스러웠다. 이 곡을 연습하며 피아니스트들이 친 영상을 정말 많이 봤는데, 내가 좋아하는 조성진의 연주도 모두가 극찬하는 라두 루푸의 연주도 김선욱의 연주에 미치지는 못했다. 김선욱이 연주하는 이 곡의 모든 게 좋아서 곡의 빠르기도 비슷하게 맞추고 싶었는데 나중에 녹음한 영상을 보니 3초 정도 차이가 나서 연주 무한 반복 학습(?)의 효과가 느껴졌다. (이 곡을 배울 때 다른 취미생들이 친 영상도 많이 찾아봤는데 대부분 5분대로 조금 더 빠르게 연주했지만 나는 이 곡을 조금 더 느리게 치는 게 더 좋게 들렸다.)


  취미로 피아노를 치는 내가 곡을 '완성'했다고 감히 말하기는 어려우나, 음표들이 손에 붙어 거의 안 틀리면서 악보에 있는 지시사항을 어느 정도 지킬 정도가 되면 그동안 연습하고 레슨 받은 곡을 연주하는 영상을 남기고 다음 레슨 곡으로 넘어가곤 한다. 처음에는 완벽하지 않은 연주의 완성도를 더 높이고 싶은 욕심도 났지만, 뱁새가 황새를 따라가려고 하다 다리가 찢어지듯이 잘 치려고 하다가 피아노에 흥미를 잃는 것보다는 뱁새의 짧은 다리에 맞는 보폭을 찾는 게 현명하다는 걸 깨달았다.


유명한 피아니스트의 연주처럼 완성도가 높지 않더라도, 100년도 더 전에 브람스가 쓴 이 곡 자체로도 음악은 아름다우니까. 나는 이 곡을 배우고 연습한 지 몇 달이 지난 지금까지도 마음에 평안이 필요할 때면 종종 악보를 꺼내어 한 번씩 쳐본다. 그리고 생각한다. '역시 인기가 많은 데는 다 이유가 있군!'



* 연습기간: 2021년 3월 7일 ~ 2021년 5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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