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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한별 May 21. 2018

내가 울고 싶어질 때

디즈니 콘서트는 영화가 시작될 때 흐르는 음악에서 출발하여 Little Mermaid의   Part of your world로 이어졌다. 공연장 안은 충분히 어두웠고 앞쪽의 공연석밖에 보이지 않았다. 오케스트라 단원들의 팔이 지휘자의 손짓에 따라 해초처럼 가느다랗게 흔들렸다. 나는 벌써부터 울고 싶어졌다.


불과 십여년 전까지만 해도 나는 잘 흐느꼈다. 여기서의 잘은 자주의 의미가 아니라 탁월했다는 뜻이다. 여고에서 합창부를 하고 있었는데, 합창 대회에 나가서 노래를 부르고 나면 그렇게 슬플 수가 없었다. 그건 상을 타고 안 타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내 기억으로는 장려상 비슷한 것도 탄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아마 수상하지 않았더라도 울었을 것이다.


거기에는 합창단원끼리의 기묘한 연대의식이 있었다. 점심 시간을 모두 합창 연습을 하는데 투자한 자들끼리 공유하는 이상한 정서의 덩어리였다. 졸업 전 공연에서는 노래가 끝나기도 전에 우는 아이도 있었다. 실컷 울면서 노래를 부르고 난 후 나는 전학을 갔다.


시간이 좀 지나고 나자 그때의 감정이 생뚱맞게 느껴졌다. 거울에서 본 내 얼굴이 모르는 타인의 얼굴처럼 느껴질 때와 비슷했다. 나는 뭘 위해서 울었던 걸까. 무엇이 그렇게 서글펐을까 생각하니 알 수 없어져서 나는 무서워졌다. 그리고 앞으로는 뭔가에 휩쓸려서 울지 말아야지 다짐했다.


남편은 나에게 자주 로봇 같다고 말한다.

남편이 더 기계적인 사람이었지만 내가 잘 울지 않는다는 이유에서였다. 남편은 주변사람에게 로봇같다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영화관에서는 자주 울었다. 어두운 공간에서 희미한 스크린 빛에 의지해 옆을 돌아보면 남편의 눈가에 눈물이 맺혀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남편도 나를 쳐다봤지만 나는 울고 있지 않았다.


로봇 같아. 하고 남편이 말했다.

지가 더 로봇이면서. 내가 콧방귀를 꼈다.


이제는 잘 울지 않는 내가 울게 될 때는 주로 디즈니 영화를 볼 때였다. 인어나 동물, 혹은 로봇이 인간이 되고 싶어하거나 인간과 살고 싶어한다. 그런 내용의 디즈니 영화를 보면서 나는 눈물을 뚝뚝 흘렸다. 인간이 뭐라고. 동물만도 못한 인간이 넘쳐나는 세상이다. 그런 인간보다 나는 로봇이 훨씬 좋았다. 빅히어로에서 베이맥스가 부서질 때 마음 속으로 소리를 질렀다. 베이맥스만도 못한 나도 살아 있는데. 나는 살면서 누군가를 보호하거나 고쳐준 적이 거의 없다.


소녀가 더 넓은 세계를 희구하거나 일생의 반려를 만나기 위해 자신이 살던 곳을 벗어날 때도 여지 없이 눈물을 흘렸다. 어린이가 1인칭의 세계를 벗어나 2인칭, 3인칭으로 세계를 확장하고 독립하게 되는 순간은 목격할 때마다 눈물이 난다. 그런 건 인생에 있어서 딱 한 번밖에 경험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마치 처음으로 사랑니가 났을 때 사랑니가 현실에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될 때처럼.


하지만 인간은 교활하니까 영화를 통해 그 순간을 몇 번이나 되감기한다. 푹신한 의자에 앉아 이제 다시는 반복될 수 없는 어린 시절을 스크린에 비춰보면서, 이미 지나간 나의 유년 시절과 지금 겪고 있을 누군가와 언젠가 똑같은 일을 겪을 다른 사람들을 떠올린다. 그 과정은 누가 죽어도 계속 이어질 것이다. 백 년 후의 또 다른 사람도 나와 동일한 것을 생각하면서 눈물을 흘릴 수도 있겠지.


공연은 두 시간 채 되지 않아서 끝났다. 그동안 내 마음은 일정 수위를 넘나들며 조용히 흔들렸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하면서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동행한 사람과 카페 이마에 가서 와플과 커피를 먹었다. 우리는 줄곧 회사 이야기만 했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내 마음은 십 년 전과 달라지지 않았다.

그저 휩쓸리는 대상만 달라지는 것이다.

그것을 깨닫기까지 십 년이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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