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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 책에 다 나와 있습니다

공시담당자 업무 커뮤니티의 어떤 일상

by 김동진

"책자 보세요."


공시 담당자 업무 커뮤니티(네이버 카페 또는 카카오톡 오픈채팅방, 이하 '커뮤니티'로 통칭)에서 질문 글에 답할 때 가장 자주 꺼내는 이야기다. 매년 한국거래소와 금융감독원에서 '2024 코스닥시장상장관리해설서'와 '2024 기업공시 실무안내'라는 제목의 두꺼운 책을 각 상장기업 담당자에게 보내주고 우리 실무자들은 보통 그걸 '거래소 책자''금감원 책자'라고 부른다. 그 내용은 각 공시 업무 사이트에서 PDF 파일로도 내려받을 수 있다. 각각 400여 쪽 짜리와 700여 쪽 짜리인데 예시로 조금만 발췌하자면 이런 식이다.


(...) [공시규정 제6조제1항제2호나목(6)]
타법인주식 및 출자증권에 관한 자기자본 대비 100분의 5 이상 금액에 해당하는 취득 또는 처분의 결정이 있을 때 사유 발생 당일까지 신고한다.
(이하 추가 설명과 각종 유의사항)



상기 예시와 같이 '책자'에 기술된 내용은 어떤 경우 공시(상장공시, 발행공시, 유통공시, ...)를 해야 하는지 그 요건에 대한 안내다. A와 같은 상황인 경우 A에 대한 내용을 A'와 같은 공시 서식으로 작성해야 한다. 그 말인즉슨 A'라는 서식은 A를 위해서만 존재하고 B와 같은 상황에서는 공시를 하지 않아도 되거나 B' 같은 다른 서식을 참고하면 된다는 뜻이다. (여러분이 공시담당자가 아니시면, 무슨 소린지 몰라도 업무와 일상에 지장이 없습니다) 이렇게 풀이해서 적는 이유는 요즘 들어 업무의 가이드 내지 매뉴얼이 대체 어느 선까지 얼마만큼에 걸쳐서 존재해야 하는 것인가에 대해 좀 의문이 생겼기 때문이다. 가령 매년 매 분기마다 정기적으로 제출하는 실적 공시(사업보고서 등)에는 등기임원들이 그 해에 지급받은 보수의 총액을 적는 곳이 있다. 특히 임원 개인이 5억 원 이상의 보수를 받았을 때는 그 개인별 세부 내역까지 기재하도록 되어 있는데, 최근에 커뮤니티 댓글이었던가 카톡이었던가... 이런 말이 보였다.


"5억 원 미만 보수인 임원의 경우는 어떻게 하나요?"


그것이... 기업공시서식 작성기준에 따르면 "공시대상기간 중 이사・감사에게 지급한 개인별 보수가 5억원 이상인 경우 개인별 보수지급금액과 그 구체적인 산정기준 및 방법을 기재한다."라고 되어 있는데요. 나라면 5억 원 이상인 경우 내역을 쓰라는 문구 자체에서 '5억 원 미만인 경우는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구나' 하고 답을 스스로 파악하겠지만, 세상에는 "5억 원 미만의 보수를 지급받은 임원들에 대해서는 그 내역을 적지 않아도 된다"라고 명문화해주는 것을 요구하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좀 극단적인 사례를 들었을 뿐이지만, 어떠한 해석이나 그 이상의 설명의 여지도 없이 '쓰여 있는 거 보시면 된다'라고 답할 만한 질문이 공시 담당자가 되고 나서 커뮤니티에 관여하게 된 지난 몇 년 사이 최근으로 올수록 눈에 띄게 늘어났다는 일종의 경향성이 느껴진다. "책자 000p 보시면 됩니다", "그거 책에 다 나와 있습니다", "책자에 답이 있습니다" 등의 답변이 가능하다.


누군가 답을 확인시켜 주지 않으면 불안한 것일까? (공시 업무를 하다 보면 그런 불안이 흔히 생길 수는 있다)

아니면 실무 안내 자료가 너무 불친절한 것일까? (아무래도 법령과 규정은 특성상 내용이 딱딱하게 다가오거나 구어적이지 않을 여지가 많다. 예를 들면 '1.5%'라고 하면 될 것도 '1000분의 15'라고 표현한다)

아니면 스스로 사고 및 판단하고자 하는 노력이 부족한 것일까? (나는 이런 경우가 제일 많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조금 시간을 들여 답변을 해주면 가끔 이렇게 되돌아온다. "그렇다면 ***가 ~~~인 경우가 아니면 기재하지 않아도 된다고 해석하면 될까요?" (해석이 필요한 게 아니라니까요...)


우리나라에 유가증권시장(코스피), 코스닥시장, 코넥스시장 합해서 2,800개가 넘는 상장종목들이 있는데 오래될 만큼 오래되어서 공시 업무 체계와 조직이 잘 잡힌 기업이 아니면 많은 경우 공시는 경영지원 같은 (아무나 할 수 있는) 단순 업무 취급을 받거나 재무회계에 포함된 관리 업무로 간주되거나 한다. "그거 책에 다 나와 있습니다"의 변용이다. 그거 규정에 다 나와 있는 거 그대로 작성만 하면 되는 거 아냐? (담당자가 없으면) 그냥 아무나 앉혀서 책자 주고 시키면 되는 거 아냐? 마치 언론매체를 상대하는 홍보팀이 흔히 '회사 돈으로 비싼 점심 먹고 근태도 대충 하는 팀' 취급을 받는 것과 제법 닮아 있다. 그러니까 한국거래소 제재인 '불성실공시법인지정' 같은 걸 겪어보거나 공시 관련한 것으로 대외에 안 좋은 쪽으로 문제가 되지 않는 한 공시 업무는 정량적인 KPI를 설정하고 인정받기 어렵다. 공시를 잘한다? 그건 공시 담당자가 누락 없이 해야 할 공시를 제대로 하고 있다는 뜻이다. 매년 한국거래소가 공시우수법인 같은 것을 선정해 상장기업이 매년 납부해야 하는 연부과금을 면제해 준다든지 하는 소소한 보상이 있기는 하지만 그건 회사의 몫이지 담당자 몫이 아닐 뿐더러 '공시우수'는 꽤 정성적인 것이어서 담당자가 잘한다고 되는 게 아니다.


잘하는 게 당연한 것인 취급을 받기 십상이지만 공시도 일머리가 꽤 중요한 업무 중 하나다. 앞에서 이야기한 타법인 출자 어쩌고 이야기로 돌아가면, 만약 우리 회사(A)가 지분 50%를 보유한 종속회사(B)가 제3자배정 방식의 유상증자(유상으로 주식을 새로 발행해 자본금을 확충하는 것)를 진행하고 우리 회사가 그 증자에 참여하기로 했다면? 공시 의무사항인지를 판단할 때 다음을 각각 검토해야 한다.


1) B의 자산 규모가 A의 '최근 사업연도 말'(이 글 작성 시점으로 말하자면 2024년, 이하 동일) 자산 규모의 10%가 넘는가?

2) B의 증자에 참여하기 위해 A가 출자하는 금액이 A의 자기 자본 대비 5% 이상인가?

3) A는 공정거래위원회가 지정한 '공시대상기업집단'(자산 총액 5조 원 이상)인가?

4) B는 상장기업인가?



1)을 충족한다면 B가 유상증자를 결정했다는 사실을 A가 '종속회사의 주요 경영사항' 서식으로 공시해야 한다. 2)를 충족한다면 A가 아까 언급한 '타법인주식 및 출자증권 취득결정' 공시를 해야 한다. 이건 단순하게 쓴 것이지 A가 출자의 대가로 인수하는 주식이 B가 새로 발행하는 주식인지 혹은 유상증자가 아니라 이미 발행된 B의 주식을 다른 누군가로부터 인수하는 것인지에 따라서도 공시 서식과 내용, 방향이 달라진다. B가 증자를 결정한 날과 A가 대금을 B에게 실제 납입하는 날 사이 기간도 고려해야 한다.


"김 과장 우리 B 회사 증자에 50억 참여하기로 했으니까 공시 검토해서 준비해" 하면 예컨대 이사회의사록(일반적으로 A회사와 B회사 모두 이사회 결의를 통해 이 증자와 증자 참여에 대해 승인해야 한다), 신주인수를 위한 A와 B 간의 계약서, 이사회 결의 일자를 기준으로 한 신주 발행가액 산정표 같은 공시에 첨부하는 서류들을 유관 부서에서 준비해 주거나 공시 담당자가 알아서 잘 챙겨야 한다. 게다가 3)의 경우는... 이것저것 고려해야 할 게 더 많이 생기는데 우리 회사는 자산 총액 5조와는 거리가 먼 회사라 그건 나도 안 해봤다. 이 모든 걸 제때 문제 없이 수행하려면 IR/공시 업무의 특성을 살려 평소 회사에서 벌어지는 경영상 주요한 사항들을 잘 팔로업 하고 정보를 습득할 수 있는 위치에 있어야 한다. 위 번호 1) ~ 4)에서 짐작 가능하듯이 증자를 한다는 사실만 중요한 게 아니라 회사의 규모와 같은 거시적 정보도 중요하다.


만약 전임자로부터 충분하고 자세한 인수인계를 받았다면 다행이지만 상장기업의 공시담당자가 되는 단골 사유는 '전임자의 퇴사'여서... 대부분 맨땅에 헤딩하기로 시작한다. 어느 날 갑자기 공시 업무를 떠안게 된 초보 내지 주니어 담당자라면 그거 책자에 다 나와 있다는데 1번부터 100번까지 중에서 어떤 공시에 해당되는지 스스로 파악하기 어려울 수 있다는 뜻이다. 회사 업종과 규모마다 특성이 다르고 공시 종류도 수 백 가지여서 공시 할아버지도 그 모든 걸 전부 다 해봤을 리는 없다. 곧 유상증자를 하거나 거기 참여한다는 내용을 주로 경영진과 임원으로부터 통보, 지시 받을 뿐 거기에 '코스닥시장 공시규정에 따라 타법인주식 및 출자증권 취득결정' 공시가 필요하니 금액 요건 등을 잘 검토할 것' 같은 세부까지 주어지지는 않을 가능성이 높다. 이때 담당자가 할 수 있는 일은 유상증자와 관련된 책자 내 해당 항목들을 다 찾아본 뒤 그중 무엇이 필요한지를 파악하고, 찾기 어려우면 회사가 과거에 비슷한 케이스로 공시한 적은 없는지 살펴보고(공시제출시스템에서 과거 공시들의 각 첨부서류 등을 모두 볼 수 있다), 아니면 커뮤니티 내에서 라든가 누구한테 물어보는 것이다. 금융감독원이나 한국거래소에도 각 상장기업을 관할하는 담당자들이 있는데, 거기다 직접 물으면 높은 확률로 그걸 왜 우리한테 묻느냐는 투를 담아 "책자 보세요", "회사가 판단하세요"라는 응답이 돌아올 것이다.


상기와 같은 까닭으로 요즘 커뮤니티에 올라오거나 언급되는 궁금증이나 질문 사항들을 보다 보면 나름대로 요만큼은 사정이 헤아려지기도 하는 것이고 나 역시 현 직장에 입사하기 전까지 경영학을 전공했음에도 유상증자가 뭔지도 몰랐으니까... 매사 "그럴 수 있어"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해지는 면이 있다. 그럴 수 있지. 오늘도 몇 백 개의 공시가 올라올 것이고 내 회사 일도 아닌데 그쪽 담당자들이 알아서 하겠지. 아니, 그럴 수 없다. 어떤 업무든 간에 대학 입시 때만큼은 아니어도 그래도 공부와 노력이라는 걸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이 질문은 '그 사람의 노력의 정도를 내가 판단할 수 있는가?'와 자주 충돌한다. 그러다 보면 정말로 일을 잘하는 감각이라는 게 따로 존재하는 것인가 싶기도 하다. 흔히 쓰이는 말인 '일머리'라는 건 지식이나 능력 자체를 일컫는 게 아니라 그 업무의 위치와 상황을 전반적으로 헤아릴 줄 아는 맥락 파악력, 그리고 어느 정도 능동적일 줄 아는 문제 해결의 태도에서 비롯하는 것 같다. 공시 업무는 정해진 서식과 조건만 보면 되는 게 아니라 그게 공시규정 어느 부분을 근거로 하는지는 물론 유관 법령(상법, 자본시장법 등)도 살필 줄 알아야 하고 회사의 의사결정 한 개를 두고도 일정한 기간 동안 몇 개의 후속 공시들이 수반되기도 해서 공시담당자가 그걸 다 조망할 수 없으면 반드시 누락이 생긴다. 그러니까... 우려는 커뮤니티 질문을 보면 매사 건마다 비슷한 방식으로 "이거 어떻게 해요 공시사항인가요?" 하는 사람이 있고 어느 정도 설명해주면 하나 이상을 이해하는 사람이 있는데 후자가 되려면 반드시 스스로 연마해야 할 것들이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일은 원래 하기 싫은 것이고 나 역시 노는 걸 좋아하기는 하지만 요즘에는 사회 풍조가 "억울하게 갇혀 있는 직장인들 퇴근시켜라!" 같은 것이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적어도 커뮤니티에서 접하고 듣는 이야기들로는 능동적으로 일의 맥락을 헤아리려고 노력하는 공시 담당자들보다는 누군가의 시간과 노력을 쉽게 편취하려는 담당자들이 자주 보이는 듯해 안타까울 때가 많다. 뭐든 챗GPT한테 물어보는 시대여서 그런가. 그런데 검색도 결국은 역량이 결과물을 좌우하고 정확하고 구체적인 질문일수록 생성형 AI도 검색형 AI도 원하는 대답을 내놓을 가능성이 높아진다. 며칠 전에는 카페에 5명의 답변 댓글이 게재된 질문 글을 작성자가 삭제하기도 했다. 카페 공지에 그러지 말라고 되어 있는데... 그게 다 자료가 되고 다른 사람들이 답변해주느라 들인 시간도 있는데 그러거나 말거나 인가. 학부 1학년 경영학원론 수업 때 교수님은 카페 글이나 댓글을 지우면 '타 학우의 지적 역량 강화 가능성 침해범' 취급하셨었는데... 요즘에는 퇴사하면서 자신이 했던 업무 자료를 회사 PC에서 싹 지웠더라는 카더라도 종종 들려오는 걸 보면 일과 경험을 대하는 분위기가 바뀐 면은 있는 것 같다.


지금까지는 공시 업무에 있어서 후배를 둬본 적이 없다. 이게 다행스러운 건가. 다수의 상장기업들 공시담당자는 각 사당 1명이어서 어지간히 큰 기업으로 이직하지 않는 한 앞으로도 내가 일당백 담당자일 가능성이 높지만, 만약 상술한 질문들이 커뮤니티 사례가 아니라 내가 케어해야 할 후배에게서 들려오는 날이 있다면 그때는 어떻게 설명하거나 지시할 수 있을까? 후배 케어하느라 바쁜 이 땅의 모든 선배님들 오늘도 수고가 많으시다. 이 업무로 따지면 그리 고연차도 아니고 업계에 나보다 훨씬 선배들이 많은데, 아직 라떼 같은 단어를 쓰진 않지만 벌써부터 젊은 꼰대 비슷한 것이 되어가는 기분이다. 맥락이라는 건 일에 있어서만 그런 게 아니라 문화예술을 포함한 수많은 사회 현상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중요한 것인데 말이다. 그래도 아직까지는, 나도 불과 몇 년 전까지는 공시의 '공' 자도 모르는 새내기였으니까 시간과 여유가 되는 선에서 아는 내용에 대해서는 정확히 설명해주려고 노력하는 편이고 알지 못하는 내용이 나오면 책자와 타 기업 사례를 함께 찾아보기도 한다. 내년이나 내후년의 나 역시 지금과 같을지는 모르겠다.


'책자 보세요' 할 때 바로 그 책자 중 하나.

*인스타그램: @cosmos__j

*모임/강의 등 공지사항: linktr.ee/cosmos__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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