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2025) 리뷰 혹은 그 비슷한 감상
거의 모든 면에서 걸작임을 확신하게 되는 영화를 만나면 달뜨는 마음과 동시에 그 영화에 대해 보다 충분히 오래 생각하고 더 잘 표현하고 싶어지는 마음이 공존한다. 폴 토마스 앤더슨의 신작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2025)가 올해엔 여지없이 그랬다. 메가박스 코엑스의 Dolby Cinema 상영관에서 관람한 며칠 뒤 CGV 용산아이파크몰의 IMAX Laser 상영관에서 다시 보고 난 뒤에도 사실은 아직 기분이 가라앉지 않았다. 몇 번이고 이 영화에 대해 더 생각하고 말하고 싶다.
일단 '박탄 크로스'라는 가상의 도시 이름부터 시작해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속에 등장하는 지명 등의 고유명사는 의도적으로 교묘하게 '실제 미국'의 그것을 피하고 있다. (예를 들어 백악관도 'White House'가 아니라 White Hall'로 언급된다) 영화는 만들어진 허구임을 스스로 인지하고 드러낼 때 아이러니 하게도 영화 밖 현실과 맞닿는다. 물론 너무도 사실의 세계와 맞닿아 있어서 진실을 관통하는 영화도 있지만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는 두려움 없는 자유에 대해 (역시 시대를 풍미한 고전적 의미의 무비스타인) '톰 크루즈'에 빗대어 언급하는 대사 한 줄 넣거나 애플의 음성인식 비서 '시리'가 등장하는 정도로 실제와의 접점을 최소화한다.
그러면서도 이 영화의 최정점의 경지 중 하나는 기술을 과시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감독과 오랜 기간 협업해 온 조니 그린우드의 스코어는 타악기 위주의 특유의 작법으로 영화의 긴장감과 서스펜스를 자연스럽게 더해준다. 비스타비전과 35mm 필름에 담긴 촬영은 후반부 상징적인 차량 추격 시퀀스의 특유의 약간 더 도로의 굴곡이 과장되게 보이는 (아마도 초망원에 가까운 렌즈의) 앵글 정도를 제외하면 다양한 쇼트로 연출 의도에 충실하게 복무한다. 이따금 지나가는 디졸브 컷도 이 영화가 테크닉 대신 순수하게 플롯의 힘으로 영화 관람의 경험을 완성하고자 했음을 엿보이게 한다. 무심한 듯 등장하는 60년대 향수를 자극하는 사운드트랙 선곡도 마음에 자연스럽게 스민다. 이 압도되는 경험을 마치고 나면 어느새 영화가 현실 속 많은 부분들을, 특히 동시대적인 문제를 은유하거나 함의하고 있음을 자연스럽게 깨닫게 된다.
https://www.youtube.com/watch?v=kR5Ki6jjPaY
한때 왕성한 활동을 했으나 십 수 년이 지난 어느 날 다시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움직이게 된 인물, 뒤틀린 욕망을 장착하고 오직 한 가지 목표를 위해 주인공을 뒤쫓는 인물. 출생의 비밀을 제대로 모른 채 자라난 인물. 이런 것들을 키워드로 표현하면 어쩐지 도식적이고 뻔해 보인다. 그렇지만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에서 구축하는 각 캐릭터 들은 대부분 그러한 도상을 훌륭하게 피해 간다.
먼저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연기한 짐 혹은 밥. 저항조직 프렌치 75의 대원이었던 그는 원래부터 전면에 나서는 행동대장이기보다는 폭발물 등을 조작하는 배후의 인물이었지만 작중 16년이 지난 뒤의 그에게서 전직 저항조직 일원의 행색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약물과 술에 찌들어 살면서 암구호를 잊고 유사시 접선 지점(랑데부 포인트)도 까먹고 프렌치 75 조직원에게 제 딸을 찾아야 한다고 냅다 욕설을 퍼붓는 일련의 장면은 배우의 특유의 연기 덕분에 코미디로서도 상당 부분 기능하지만 밥이 애초 자신이 부르짖던 혁명과 혁명가의 그것과는 거리가 먼 인물일지도 모른다는 걸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무정부주의 성향을 띤 무장 단체의 일원으로 활동했으면서도 수화기 너머의 암구호를 묻는 대원의 이름(조쉬)을 조롱하기도 하고 그에 앞서 자신의 절박함에도 암구호("지금 몇 시인가요?")의 답을 알려주지 않는 그를 오히려 "망할 리버럴 놈" 같은 말로 표현하기도 한다.
아마도 이듬해 시상식 시즌 다수의 연기상 수상 또는 노미네이트가 예상되는 숀 펜의 '스티븐 록조'는 어떤가. 주한미군 부대에서 근무한 경력이 있어 여러 미군 사병과 부사관, 장교 들을 경험한 나로서는 흔한 말로 스티븐 록조가 '그냥 미군 대령을 직접 데려온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군인 특유의 복장과 걸음걸이, 말투를 완벽하게 재현한 인물로 다가온다. (영화 밖 실제에서는 KKK 창립자의 이름을 딴) 훈장을 받는 모습이나 부하에게 임무를 지시하거나 자신이 선망하는 특정 이익 집단의 회원이 되기 위해 자신을 잘 보이려 하는 순간순간들은 역설적으로 그가 가지고 있는 뒤틀린 성적 집착과 인종차별주의적 사고를 날 것 그대로 내보인다. 하다못해 그가 입는 특유의 꽉 낀 까만 반팔 티셔츠나 군화의 키높이 깔창마저도. 록조는 마치 불법 이민자 들을 제압하는 공포의 인물처럼 언급 또는 회자되지만 실은 누구보다도 더 위악스럽게 자기 치부와 본색을 감춘, 그러면서도 영화 속 미국 주류 사회의 일원이 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인물인 것이다. 그 안간힘은 전혀 멋져 보이지 않는 모습들로 나타난다. 가량 자기가 고용한 해결사에게 자신이 데려온 윌라를 인계해야 하는데 도망치려는 윌라 때문에 흙바닥에서 실랑이를 벌이는 모습이라든지, 어떤 장면에서 "엄마야 감사합니다" 같은 말이 나오는 대목이라든지. 캐릭터를 철저히 완성도 높게 구현한 연기와 각본의 합일 것이다.
"결과 따위는 상관없어 내 아빠는 따로 있으니까."
"내가 당신 자식일 리가 없어 나도 읽을 줄 알거든."
더 말할 나위 없이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의 진짜 주인공은 명시적으로나 암시적으로나 '윌라'(체이스 인피니티)다. 디카프리오가 연기한 밥의 딸이어서? 아니. 상기 인용한 두 대사는 모두 윌라에게서 어떤 장면에서 나오는 중요한 발화다. 위 내용을 읽어 보면 제법 상반된 정서와 맥락의 말이 등장함을 알 수 있다. '결과'란 록조가 모종의 이유로 자신의 친자 검사를 하면서 나오는 그 결과다. 뒤의 "당신 자식일 리가 없어"라는 말은 특정한 장면에서 별안간 나타난 록조가 윌라 입장에서 자신과 관련이 있을 인물임이 만무하다는 믿음과 맞물린다. 태어난 이래 자신을 신경 써 본 적도 없는 자가 제 앞에서 자기 생명을 재단하려고 할 때, 윌라는 당연하게도 혼란을 느낀다. 예를 들어 자신을 키워주고 보호해 준 아빠가 친부가 아니라면? 자신의 생존을 위협하는 폭력적인 군인이 자신의 친부라면?
여기서 중요한 건 누가 윌라의 친부인가가 아니다. 모종의 이유로 록조는 과거 밥의 숙적과도 같은 존재였지만 록조는 지금 또 다른 이유로 자신의 과거를 지우기 위해 움직이고 있을 따름이다. 딸에게 과대망상이라는 소리를 닳도록 들어왔을 밥은 어떤 사건으로 진짜 자기 딸을 지켜야만 하는 상황에 놓인다. 엄마와 똑 닮은 앵글 안에서 소총을 난사하는 윌라의 모습. 가라테 도장에서 제법 엄숙하게 자세를 연마하는 윌라의 모습. 윌라 역을 연기한 (생애 처음 영화의 배역을 연기한) 체이스 인피니티는 미성년자 역에 걸맞은 자유스러움을 연기하면서도 부모의 행방에 대한 힌트를 놓치지 않는다. 록조에게 잡히고 나서도 걸핏하면 탈출 기회를 노리는 윌라는 그저 약한 포로의 모습 따위는 절대 하지 않는다.
가라테 수업을 받거나 총기 사격을 배우는 윌라의 모습을 보면 영화의 오프닝에서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엄마 퍼피디아(테야나 테일러)의 잔영이 자연스럽게 비친다. 비밀스러운 곳에 은거 중인 수녀들의 리더나 혹은 록조 대령 앞에서도 그는 옆모습도 앞모습도 그리고 뒷모습까지 당당하다. 반항심 가득한 어쩌면 전형적인 고등학생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윌라는 그래도 아빠 밥을 생각한다. 새벽에 늦게 들어오면 무슨 일이 생기지 않았는지 염려하고, 밥이 외우도록 교육한 "그린 에이커즈, 베벌리 힐빌리즈, 후터빌 정션"으로 시작하는 암구호를 하는 사람을 만나자 "아빠가 이걸 아는 사람을 만나면 목숨 걸고 믿으라 했다"라며 정말로 믿고 따른다.
"Be careful."
"I won't."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는 완벽히 허구적이면서 지금은 물론 앞날까지 관통할지 모를, 또 하나의 우직하고 정교한 시네마의 경험이자 살아갈 다음 세대를 향한 치열한 응원처럼 다가온 영화다. 후반에 이르러 생각하게 되는 감상은 요컨대 이런 것이다. 강한 척하지도 죽은 척하지도 않아도, 거짓되지 않고 누구로부터 부정당하지 않은 당신 다운 행복한 삶이 펼쳐지기를, 혹은 끝내 사랑을 잃지 않고 지켜내고 옳다고 믿는 가치를 함께 쟁취하기를. 일련의 '배틀'이 끝난 뒤 에필로그처럼 펼쳐지는 신에서 어떤 이의 내레이션과 함께 간접적으로 시사되는 이런 메시지는 뭉클한 정도를 넘어 어떤 관객에게는 일말의 감동도 자아낸다. 어느 때보다 혼돈의 시대를 살고 있을지 모를 우리에게, 수 백 년 전부터 뿌리 내려왔던 그 모든 폭력과 차별의 역사를 집약해 상기시키면서도 저 멀리 있을 희망을 잊지 않도록 해주는 영화를 이렇게나 대중적인 오락의 틀에서 만난다. 거창하게 불꽃 튀는 것만이 혁명이 아니라 단지 소중한 사람을 지키기 위해 몸을 던지는 마음이 변화의 시작이 될지도 모른다는 것. 전투가 아니라 전쟁이 기다리고 있을지라도 어쩌면 싸워볼 만한 것인지도 모르겠다고 밥과 윌라의 모든 눈빛을 떠올리며 중얼거린다.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One Battle After Another, 2025)
10월 1일 국내 개봉, 161분, 15세 이상 관람가
감독: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
수입/배급: 워너브러더스코리아(주)
출연: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숀 펜, 베니시오 델 토로, 체이스 인피니티, 테야나 테일러, 레지나 홀 등
https://youtu.be/QHExJxZemnY?si=6inTVXw3o8ydD8Vd
*인스타그램: @cosmos__j
*모임/강의 등 공지사항: linktr.ee/cosmos__j