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주님 투자판단을 저희가 해드릴 순 없는데요
한국거래소의 포괄공시 서식 중에 '투자판단관련주요경영사항'이라는 게 있다. 공시의무사항으로 규정하고 있지는 않은 내용 중 회사의 사업 현황 등과 관련해 투자자의 판단에 중요하게 영향을 줄 수 있다고 판단되는 내용을 신고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제약바이오 업종 기업의 경우 산업의 특수성이 있다 보니 임상시험의 진행 경과, 결과 등에 대해 특화된 서식이 따로 만들어져 있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회사들이 쓰는 이 포괄공시는 정해진 서식 없이, 모 기업과의 투자 관련 협약이라든지, 액수가 큰 국책 과제를 수주했다든지, 데이터 센터에 큰 화재가 발생해서 복구 기간 동안 서비스 중단 등의 피해가 예상된다든지 하는 말 그대로 정해진 공시서식에 없는 내용을 공시한다.
일반적으로 기업이 특정 상황에 따라 의무적으로 제출하는 공시는 그 내용과 정보가 명확하다. 1,000억 원 규모의 유상증자를 결정했다, 몇 월 며칠에 어디서 임시주주총회를 하기로 했다, 최대주주가 주식담보대출을 상환했다, 누군가 회사를 상대로 제기한 소송에 피소되었다, 직원 누군가의 횡령 혐의를 확인했다 등등. 이런 공시들에는 서식 내에 쓰기 어렵거나 애매한 내용을 참고적으로 기재할 수 있는 '기타 투자판단에 참고할 사항'이라는 칸이 있다. 이것들과 달리 상술한 포괄공시의 경우 아예 제목 자체가 '투자판단관련-'으로 시작하니 그 차이가 짐작되실는지.
단어를 몇 번 반복해서 썼지만 지금 말할 것이 바로 이 '투자판단'이다. 퇴직연금 계좌로 상품을 매수하거나 혹은 증권계좌로 레버리지 ETF 같은 걸 거래하려 하면 갖가지 확인 절차들을 거쳐야 한다. 그 상품이나 종목을 거래하기에 계좌 주인이 적합한 사람인지를 한 번 더 필터링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증시 상장종목을 거래할 때는 일단 증권 계좌를 보유하고 있기만 하면 별 다른 제약이 없다. (물론 종목에 따라서 현금이 아닌 신용 거래가 가능한지 여부나 정도 등의 차이 같은 건 있다) 스마트폰에서 증권사 애플리케이션을 사용하는 사람이라면 주식을 별 다른 확인 절차 없이 살 수 있다는 뜻이다. 그 사람이 어떤 배경과 과정을 거쳐 그 종목에 접근하게 되었는지, 그 종목을 발행한 회사가 어떤 사업을 영위하고 있고 최근 실적이 어떤지 등과 같이 여타의 금융상품에 있어서라면 정기예금을 개설할 때도 몇 단계씩 거치는 절차가 주식에는 없거나 간소화되어 있다.
자명한 전제는 상품을 거래하는 사람이 그 거래에 대한 판단을 스스로 해야 한다는 점이고 거기에는 책임이 내포돼 있다. 이 책임은 투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내가 2천만 원 정도를 들여 유가증권시장에 상장된 삼성전자를 매수할 때 가령 내가 산 가격이 9만 9천 원이라고 하면 그보다 가격이 오를 수도 있고 떨어질 수도 있으며 내가 들인 원금을 경우에 따라서 일부 또는 전액 회수하지 못하게 될 수 있다는 걸 감안해야 한다. 2,000주 매수하시겠습니까? 네. 그렇게 대답하는 순간 내 욕심과 바람과는 달리 투자하기로 한 결심과 기대에 상응하지 못하는 대가를 치러야 할 수 있다는 걸 확인하고 동의한다. 정말 동의했을까?
어떤 사람들, 아니 많은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듯하다. 나는 사람들의 자산이 부동산에 비유동적으로 매여 있지 않고 금융 시장에서 일정한 비중을 갖고 증권이나 채권 등에 지속적으로 유입되는 현상이 바람직하고 외국에 비해 우리나라에서의 그 비중이 낮다는 걸 안타까워하는 동시에 주식시장의 장벽이 너무 낮다고 생각한다. 장벽이 낮으면 어떤 문제가 생길까? 주식이 원금이 보장되는 예금자 보호 상품인 양 취급된다는 점이다. 내가 손실을 봤으니 사람들은 내 돈을 회사에 물어내라 요구하고 회사 경영진을 교체하려고 지분을 모으고 회사 앞에서 트럭 시위 같은 걸 한다. 잠깐, 주식 종목을 시장에서 매수할 때 그 판단과 선택은 본인이 한 게 아니었나?
경영진의 부도덕한 결정이라든지 사회적으로 지탄의 대상이 되는 회사의 사례 들을 실제로 종종 접할 수 있다. 시세조종으로 논란이 되거나 해서 기업 대표이사가 국회에 불려 간다든지... 주로 뉴스에 오르내리는 건 안 좋은 쪽이다. 이 이야기가 2,600개가 넘는 상장종목 전반에 걸쳐 만연한 것처럼 인식되는 것은 실무자로서 안타까운 일이다. 일반적으로 기업이 기업 경영활동을 하고 있다는 사실은 뉴스거리가 되지 않는다.
필연적으로 기업이 추구하거나 염두하는 것과 일반 개인 투자자들이 바라는 것 사이에는 많은 이유로 괴리가 발생한다. 극단적으로 이야기하면 주식을 발행한 회사는 그 주식이 시장에서 더 이상 거래되지 않게 된다고 하더라도 법인을 청산하지 않는 이상 회사의 존속 자체에는 문제가 없다. 그렇지만 투자자 입장에서는 내 주식이 시장에서 거래되지 않는 순간 A4 용지보다도 못한 게 되어 버린다. 주가가 떨어지더라도 언젠가는 다시 오르게 되어 있지만 그 주식을 들고 있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하루하루 제 계좌에 찍혀 있는 평가 금액, 특히 괄호 안에 담긴 손실률을 보는 순간 냉정한 투자판단이 어려울 가능성이 높아진다.
다시 말해서 자금력이 충분한 국내 기관이나 외국인 투자자 들과 달리 개인 투자자들은 수익 실현의 주기를 지나치게 빠른 쪽으로 앞당겨서 확정하려 하게 된다. 물론 정말로 어느 기업의 투자 매력도와 잠재성을 보고 장기간 보유를 목적으로 하는 투자자들이 있지만, 특히 지난 몇 년 간 주식시장에 새로 뛰어든 투자자들의 경향은 분명 그렇지 않아 보이는 면이 있다. 단기 호재와 테마 위주로 그들이 몰리는 경향도 당연히 그런 맥락이다. 이것을 과연 '투자'라고 부를 수 있을까? 투자를 가장한 '투기'를 사익을 위해 쉽게 결정해 놓은 채 기업의 모든 의사결정 과정과 역량을 오직 '주가 올리기'만을 위해 써 달라며 떼를 쓰는 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