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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R/공시담당자의 업무 일과(2)

나는 언제나 일당백이어야 한다

by 김동진

한때 우리 회사는 이사회를 오후 3시에 개최했다. 현지에서 비대면(마이크로소프트 팀즈)으로 접속하는 외국인 사외이사가 회사 이사회의 보드 멤버 중 한 명이었고 그의 시차를 고려해 나름대로 최선의 접점을 찾은 시각이 오후 3시였다. 이것도 물론 평소에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평소에는. 이사회는 회사의 최고 의결기구인데 당일에 갑자기 논의할 안건이 생기는 게 아니라 사전에 (주로 의장이) 각 이사들에게 소집통지를 하면서 무슨 내용에 대해 논의할지에 대해 공지되고 사안에 따라서는 이메일이나 구두로 설명하기 복잡한 내용은 별도의 PPT 슬라이드 등으로 '이사회 의안 설명자료' 같은 걸 따로 만들어 이사회 소집통지 시 함께 배포한다.


그날 이사회는 우리 회사의 특정 연구개발 파이프라인을 집중적으로 개발하기 위해 분사(스핀오프)했던 회사를 내부 사정으로 인해 다시 우리 회사의 소속으로 만드는, 즉 합병을 논의하기 위한 이사회였다. 합병은 단지 레고나 퍼즐 따위를 떼었다 붙이듯이 간단하게 일어나지 않는다. 합병하는 법인과 피합병 되는 법인의 자산 규모, 상장 여부(주식의 시가) 등을 고려해 합병 비율과 가액을 산정해야 하고, 두 회사의 주주 구성에 따라서 합병에 반대하는 주주가 있을 경우 '주식매수청구권'도 신경 써야 한다. 절차적으로는 합병을 이사회 이후 주주총회에서 승인하는 등 경우에 따라 복잡한 것들이 더 수반된다.


오후 3시에 시작된 이사회는 거의 오후 5시가 가까워질 무렵에도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합병에 반대하는 이사가 있었고, 이사들 간에 글자 그대로의 의미에서 '토론'이 벌어졌다. 합병을 계획대로 진행했을 경우의 장단점과 합병을 추진하지 않았을 경우의 장단점, 그리고 이것이 공시 등을 통해 외부에 알려지게 되었을 때 예상되는 반응 등 다각도의 논의가 이사들 사이에 오가며 의견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지만 결론이 나지 않았다. 이미 한 차례 정회(휴회, 휴정 등으로 다양하게 불린다. 단어 그대로 잠시 뒤 계속하겠다는 의미로 잠시 휴식시간을 마련한다)했기도 한데 이야기는 첨예했다.


결국 이사회의 단일 의안으로 상정된 '00000 주식회사 합병의 건'은 부결됐다. 출석 이사 과반수의 찬성을 획득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이사회가 끝났으니 합병은 나중에 다시 논의하든 하면 되고 내 업무는 끝? 그게 아니었다. 실무적인 문제는 다른 데 있었다.


전자공시시스템을 통해 외부에 노출되는 공시는 회사가 쓰고 싶은 대로 내용을 기재해서 제출 버튼을 누르면 바로 올라가지 않는다. (지분공시나 사업보고서 등과 같은 금융감독원 공시는 예외적으로 제출하면 바로 외부에 전송(노출)된다.) 한국거래소 소관 공시는 한국거래소 코스닥시장본부의 (우리 회사 공시를 담당하는) 공시부 직원의 검토, 즉 컨펌을 거쳐야만 한다. 코스피, 코스닥 상장기업만 2,600개가 넘고 한국거래소 공시부의 회사 담당자들은 한 사람이 몇 십 개 회사의 공시를 검토해야 한다. 모든 회사들이 매일 공시를 제출하는 건 아니므로 짐작하건대 한국거래소 공시부의 업무에도 평화가 찾아올 때가 있겠지만, 기말 감사 시즌과 같이 특정한 경우에는 거래소도 야근을 할 수밖에 없다.


이사회에서 논의할 사항이 예정대로 가결(승인)되었다면 주요사항보고서(회사합병결정) 공시를 해야 하고 이 공시는 독특하게도 금융감독원 서식을 사용하지만 한국거래소 담당자의 검토를 거쳐서 승인된다. 다시 말해 거래소 시스템(KIND)이 아니라 금융감독원의 DART 편집기를 사용하고 검토는 거래소에서 해주는.


통상 거래소에서는 공시해야 할 사항을 발행회사(즉 공시를 제출하는 우리 회사)에서 사전에 공유해 줘야 검토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 주어진다. 거칠게 구어적으로 표현하면 이런 식이다. 저희 회사 이따가 오늘 이사회 마치고 합병 공시 이러저러하게 제출해야 하는데 이사회의사록 초안이랑 주요사항보고서 공시(DSD) 문안 첨부드리니 검토 부탁드립니다. 하고 거래소 시스템 내 '상담요청' 기능을 사용해 전달한다. 정리하자면 오후에 이사회 끝나면 합병 관련 공시를 해야 한다고 우리 회사의 거래소 공시 담당자에게 내용 전달을 다 해놓았는데 정작 이사회에서 합병 건이 부결되면서 그날 공시해야 할 사항이 없어지게 된 것.


거래소 담당자에게 전화로 구구절절 상황을 설명했다. 경영권 분쟁 상황에서 특히 투자자 입장에서도 민감할 수 있는 사안을 논의하다 보니 이사회 내부에서도 토론이 길어졌고 여러모로 대화의 합의점을 이끌어내고자 했지만 (두 시간 동안 이사회를 하는 일도 참 드물다) 결국은 부결됐고 추후에 재논의를 하든가 해서 가결이 되는 등 공시사항이 발생하게 되면 그때 가서 다시 상담요청 하겠다는 것.


생각보다 이런 일이 종종 생긴다. 그날 제출해야 하는 것을 염두에 두고 유관 부서 또는 관계사(여기엔 한국거래소도 포함된다) 담당자와 미리 협의를 해두거나 내용을 전달해 두었는데 그게 번복되거나 일정이 연기되거나 하는 것. 공시담당자의 숙명 중 하나는 '기다리는 것'이다. 이사회가 끝나길 기다리는 것, 상담요청 보내놓은 거래소 담당자에게 회신이 오길 기다리는 것, 회사 법인인감을 날인하기 위한 품의가 결재 진행되기를 기다리는 것, 그 외에는 임원에게 보고 또는 컨펌 요청해 놓은 것에 대해 재가 또는 회신을 기다리는 것.


공시와 직접적인 관련을 맺을 때가 많은 이사회 관련 업무만 그런 게 아니다. 사소하게는 증권사에서 마련한 NDR(Non-Deal Roadshow, 날을 잡고 증권사 법인영업팀에서 주관해 여러 자산운용사 등 관계자들을 대상으로 회사 사업현황에 대해 소개하는 IR 미팅)에서도, 운용사 담당자가 조금 늦어서 기다려야 한다든지 운용사 사무실이 있는 건물에서 출입이나 주차등록 등을 위해 몇 분을 지체한다든지 또는 앞의 미팅을 마치고 다음 미팅 장소로 이동하거나 하는 '미팅과 미팅 사이'의 시간들도 물론 있다.


업무 이야기를 여담처럼 조금 더 하자면, 만약 앞에서 말한 이사회에서 오후 5시가 넘어 어렵사리 종속회사 합병의 건이 승인 가결 되었다면 어땠을까? 이제 할 일은 결의 내용을 서면으로 남기기 위해 이사회의사록에 출석이사들의 인감을 날인하는 일이다. 통상 이사회 의장(주로 대표이사)은 법인인감을 날인하는 경우가 많고 그 외 출석 이사들은 직접 서명을 하거나 흔히 말하는 '막도장'(개인인감증명서가 발급되는 인감도장이 아니라 본인의 날인임을 보여주기 위한 정도로 이름 석 자를 기재한 작은 도장)을 찍기도 한다. 의사록 날인을 마치고 나면 공시서류 첨부를 위해 스캔해야 하고, 그걸 증빙 삼아서 주요사항보고서 공시 문안을 거래소 담당자에게 재차 검토 요청한다. 수정사항 등 특이 내용이 없으면 확인이 완료됐으니 그대로 공시를 제출하라는 담당자의 연락 또는 문자가 온다. 이건 '제출해도 된다는 승인'이지 공시 자체가 승인돼 외부에 노출되었다는 뜻이 아니다. 이제 공시를 제출하고 나면 '접수' 상태가 되고 거래소 담당자가 다시 그 공시를 확인한 뒤 본문과 첨부서류 등에 이상이 없으면 '승인'을 해줘야 외부에 노출이 된다. 제출시스템에서 상태가 '접수(미처리)'에서 '검토'로 넘어갔는데 10분 동안 승인 처리가 되지 않는다? 그러면 혹시 내가 뭘 빠뜨렸나... 공시 내용에 오타라도 있는 거 아닌가... 하는 좌불안석이 된다. 대부분의 경우 그냥 거래소 담당자가 바쁜 상황이라 조금 더 기다리면 문제없이 공시가 완료된다.


아주 최근에 세어본 건 아니지만 지난 5년 동안 내 이름으로 전자공시시스템에 우리 회사 공시를 제출한 건수만 (정정공시를 제외하고도) 200여 건이다. 유사한 규모의 일반적인 상장기업과 비교하면 높은 확률로 공시의 양 자체가 훨씬 많았던 편이다. 그간 내가 각각의 공시를 하기 위해 기다려야 했던 시간들은 얼마일까. 지금은 회사 이사회가 오전 10시에 열린다. 이사회에 출석하는 이사 입장에서는 다소 이른 시간일 수 있으나 공시 실무를 하는 담당자 입장에서는 공시 업무를 진행하기에 더없이 제격인 시간이다. 검토할 여유가 충분히 주어지고 서류를 충실히 준비할 수 있고 특이사항이 있을 때 거래소 담당자과 소통하기에도 촉박하지 않기 때문이다. 업무 일과에서 적잖은 비중을 차지하는 이 기다림의 시간 동안 실무 담당자는 혹시나 뭔가 빠트린 것은 없는지, 실수한 것은 없는지 복기하고 성찰 또는 경우에 따라 반성하기도 하는 마음이 된다. 앞으로 내가 또 몇 건의 공시를 제출하게 될지 가늠하기 어렵지만 우선은 다음 달에 있을 3분기 실적 마감 및 분기보고서에 실수가 없도록 해보자는 다짐을 곁들여본다. 일단 기다림에 있어서는 나름대로 일당백인 것 같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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