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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시 업무의 미래

내 자리는 과연 대체되지 않을 수 있을까

by 김동진

지금의 회사에서 IR, 공시 업무로 5년을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회사에 나보다 공시를 잘 아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잘 알던 사람이 퇴사를 하면서 내가 공시를 맡게 된 것이지만) 물론 IR 업무에 있어서는 내가 모시는 임원이 훨씬 더 오랜 경력과 노하우를 가지고 계시지만 공시에 있어서 만큼은 어느 정도 자신이 생겼다. 이제 어떤 상황이 주어지면, 공시규정의 어느 항목을 찾아 어떤 서식에 해당되는 공시로 대응해야 하는지 누구의 도움을 받지 않고 스스로 찾을 수 있고, 필요시 관련된 상법, 자본시장법 등 법령에서 근거 조항을 역시 누구의 도움 없이도 직접 찾을 수 있다. 비슷한 공시를 진행했던 다른 회사의 사례도 당연히 어렵지 않게 검색할 수 있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다.


타고난 재능 같은 거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직면한 문제에 맞서 어떻게든 스스로 해결하려고 노력한 덕분이다. 또한 공시만큼 매뉴얼에 대부분의 답이 있는 분야도 드물 것이다.


동시에 적어도 공시에 있어서라면 지금은 스스로 이 업을 어느 정도 안다고 자만하기도 딱 좋은 시기다. 우리 회사가 속한 코스닥시장에서만 공시를 해봤을 뿐 유가증권시장(코스피) 공시는 물론 공정위 공시(공정거래위원회가 지정한 공시대상기업집단 소속 기업을 대상으로 한 공시. 한국거래소 공시와는 여러 의미로 또 다른 차원이다.)는 곁눈질은 해봤어도 직접 일해본 적이 없다. 언젠가 나 또한 새로운 과제에 직면했을 때 도저히 스스로 해결하기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기도 할 것이다.


사실 요즘 생각하는 건 조금 다른 데 있다. 단적으로 말하면 이런 질문. 과연 공시 업무도 인공지능, 특히 생성형 인공지능에 대체될까? AI가 아니어도 내 일은 누군가에 의해 쉽게 대체될 수 있는 일일까? 그렇지 않아도 상장기업의 공시 의무와 부담은 공시서식 개정, 추가, 관련 법률 개정 등으로 계속해서 강화되고 있다.


일정 자산 규모 이상의 상장기업을 대상으로 점진적으로 영문 공시 의무가 확대되면서, 재작년 한국거래소에서는 네이버 파파고와 협력해 영문공시 번역지원 시스템을 내놓았다. 우리 회사가 영문 공시 대상 법인이 아니기 때문에 그 시스템을 써보지는 않았다. 하지만 파파고 앱에서 공시와 관련된 몇 가지 단어들을 입력해 본 경험으로는 '아직까진 공시는 사람이 해야 한다'라고 믿고 있다. 예를 들어볼까. 주주에게 대가를 지급하지 않고 기업의 결손금 보전 등을 목적으로 자본금을 감소시키는 '무상감자'를 파파고에 입력하면 'Capital Reduction without Consideration' 또는 'Free Capital Reduction'이 아니라 'free potatoes'를 내놓는다. 물론 이 단어는 먹는 감자를 무료로 준다는 뜻이지 자본금에 대한 말이 아니다. 글을 쓰면서 돌려 보는 맞춤법 검사기도 품의를 '품위'로 고쳐야 하지 않느냐고 제안하기도 한다. 물론 글쓴이의 품위를 지켜주기 위해서... 는 아닐 것이고 검사기 프로그램은 '품의서'라고 쓸 게 아니면 품의를 '품위'의 오타로 인식해서였을 것이다.


물론 번역 기능은 점점 발전할 것이다. 그러나 금융감독원이나 한국거래소에 제출할 공시 문서를 과연 '생성'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인간에 대한 지나친 낙관일지 모르나 내게는 회의적으로 보인다. 같은 공시 서식(ex. 주요사항보고서(유상증자결정))을 사용하더라도 회사 상황에 따라서 케이스가 천차만별이기 때문이다. '1,000억 원 규모 신주발행을 해야 하는데 어제 정규 장 마감(3:30pm) 종가를 토대로 발행가액 산정해 주고 주요사항보고서 공시 써 줘' 이런 식으로 간단히 입력해서 될 게 아니라는 뜻이다. 이사회 결의 시점을 기준으로 대금의 납입 또는 청약 일정을 설정하는 일과 신주의 유통(상장)은 언제부터로 할 것인지와 같은 것들은 기업 활동을 하면서 경영자와 실무자의 '판단'이 작용한다. '다음 주에 유상증자를 위한 이사회 결의를 할 때 수학적으로 신주 상장을 언제 하는 것이 가장 뛰어난가' 같은 토대로 공시에 대한 의사결정을 할 수는 없다는 뜻이다. 전자공시를 작성하는 생성형 AI 프로그램이 나온다 해도, 결국 그걸 제대로 썼는지 점검, 검토해야 할 사람의 자리가 아주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내가 해야 할 것은? 해야 할 공시를 보다 성실하고 철저하게 함은 물론 IR과 자본시장 전반에 대한 직관과 전문성을 키우는 것이다. 이 또한 결국은 '나'라는 브랜딩의 일환이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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