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 열하나
어떠한 일상도 시가 될 수 있다.
패터슨시에 사는 패터슨의 일상은 단순하다. 오전 6시 반쯤 사랑하는 사람 곁에서 눈을 뜨고, 시리얼로 아침을 먹고, 작은 철제 가방에 아내가 싸준 점심과 아내의 사진, 그리고 시를 적는 비밀노트 한 권을 담아 출근한다. 패터슨의 직업은 패터슨시의 버스 운전기사. 그는 자신의 반복적인 일상과도 닮은, 항상 같은 구간을 운행하는 23번 버스를 몬다. 그리고 퇴근 후에 그는 집에 돌아와 아내가 차려주는 저녁을 먹고, 애완견 마빈을 산책시킨다. 산책 중간에 그는 동네 단골 바에 들려 맥주 한 잔을 마시고, 은은한 맥주 향을 풍기며 집에 돌아와 사랑하는 사람 곁에서 잠든다.
매일이 다르지 않는, 지루하게 반복되는 일상 같지만 그 일상에는 조금씩 다른 틈이 있다. 이를테면, 버스에 승객으로 오르는 사람들이 매일 조금씩 다르고, 단골 바에서 만나는 사람들이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다른 이야기들을 패터슨에게 건네는 것 같이. 패터슨시에서 벗어난 적이 없고, 매일 같은 도로 위를 지나지만, 일상의 틈을 일기 같은 시로 채우는 패터슨을 보며 우리는 그의 시선이 한 곳에만 머무르지 않는다는 것을, 그의 생각이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넘나들며 3차원 이상의 세계를 돌아다닌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 사실을 알게 된 순간, 더는 그의 삶이 지루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의 삶이 리듬감 있게 느껴지기 시작한다.
빛나는 순간, 주변 일상 속에 늘 존재하는
-요나스 메카스의 필름 다이어리 중
패터슨이 시를 생각할 때, 혹은 시를 적을 때의 미장센이 인상 깊었다. 영화감독인 짐 자무쉬는 화면의 이미지 중첩과 문자로 패터슨의 세계를 보여주는데, 이러한 화면 효과가 얼마 전,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본 요나스 메카스의 전시를 떠올리게 했기 때문이다. 특히, 전시 작품 중 <행복한 삶의 기록에서 삭제된 부분>은 삶의 모든 순간, 가장 하찮은 순간까지도 그 자체로 의미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요나스 메카스의 장편 필름 다이어리였는데, 화면의 중첩과 텍스트의 이미지화가 영화 <패터슨>의 미장센과 무척 닮아 있었다. 작품 주제 또한, 소박한 일상의 행복과 스쳐 지나가는 아름다운 순간으로, 반복되는 삶 속에서 소소한 일상의 행복을 이야기하는 영화 <패터슨>의 주제와 거의 같다고 느껴졌다.
요나스 메카스의 일상을 보다 더 아름답게 만들어주는 그의 주변 사람들이 있었던 듯이 패터슨에게도 패터슨의 일상을 좀 더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패터슨의 아내 로라, 버스 회사 동료 도니, 단골 바의 주인 닥 같이 매일 만나는 사람부터, 버스에 타고 내리는 손님, 시를 쓰는 소녀, 같은 시인을 좋아하는 일본인 여행객 같이 우연히 만나는 사람들까지...
-오늘은 지겠군
-누구에게서요?
-나 스스로에게
나는 이 중에서 바 주인인 닥과 일본인 여행객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주인 닥이 기억에 남는 이유는 그가 바에서 혼자 체스를 두며 무심코 던진 “오늘은 지겠군”이라는 말에 패터슨이 “누구에게서요?”라고 물었을 때, “나 스스로에게”라고 답하는 장면이 짧지만 많은 생각을 하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닥의 말을 통해 반복적인 삶을 사는 패터슨이 지루하고 재미없는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패터슨은 패터슨 스스로 생각하기에 따라 전혀 그렇게 살고 있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말해주며, 결국 우리도 우리가 어떠한지, 어떠할지, 어떻게 느끼며 살지 정하는 것은 스스로라고 알려주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때론 텅 빈 페이지가 가장 많은 가능성을 선사하죠
그리고 영화 후반 부, 패터슨이 좋아하는 폭포수 앞에 여행객이자 시로 숨 쉰다고 말하는 일본인이 등장한다. 패터슨이 자신의 시를 기록한 비밀 노트를 애완견 마빈이 물어뜯는 바람에 써둔 시가 전부 없어져 낙담해 있을 때였다. 패터슨은 자신도 시를 쓴다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같은 시인을 좋아하는 그와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기 시작한다. 몇 마디의 대화가 오가고 일본인 시인이 자리를 뜨며 패터슨에게 빈 노트 한 권을 건네며 이런 말을 한다. "때론 텅 빈 페이지가 가장 많은 가능성을 선사하죠." 이 말은 비밀 노트가 없어진 패터슨에게도 그런 패터슨을 보는 우리에게도 큰 위로가 된다.
앞서 말한 요나스 메카스도 패터슨도 그리고 우리도 알고 있는 사실이 하나 있다. 행복한 순간들은 많지만, 모든 순간들이 항상 기억나는 건 아니라는 것을. 우리 너무 자주 잊어버리고 만다는 것을. 그렇기에 글자든 사진이든 영상이든 행복한 순간들을 기록으로 남기는 건 중요하다. 그렇지만 그런 순간들을 때때로 잊더라도 우린 아마 곧 괜찮아 질 거다. 어떠한 순간들도 아름다운 시가 되니까, 매 순간 존재하는 그런 순간들을 우린 다시 기록하면 된다.
지극히 개인적인 리뷰
전시 상세 설명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전시 내용 중 일부 인용
이미지 출처: 영화 <패터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