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출판물 <너무도 익숙해서 사무치게 그리울 줄 알아서>를 펴내며
오랜 시간 준비해온 파리 에세이 사진집 <너무도 익숙해서 사무치게 그리울 줄 알아서(Tellement familier
Tellement lointain)>의 크라우드 펀딩을 시작했다.
2015년 당시 나는 지금은 없어진 인디 문화를 다루던 <파운드 매거진>에 온라인 매니저이자 에디터로 회사를 잘 다니고 있었다. 같이 일하던 사람들도 무척 좋아서, 당시 같이 일하던 동료와는 사적으로도 자주 만나서 놀았고, 회사 선배님, 편집장님과는 지금도 연락하고 지내고 있다. 그렇게 좋은 회사를 갑자기 그만둔 건, 더 늦기 전에 프랑스 파리에 가기 위해서였다.
아주 어릴 적부터 패션디자이너가 꿈이었던 나는 프랑스 유학에 대한 동경이 있었다. 그렇지만, 언제나 현실에 맞춰 급급하게 살아온 나는 유학은 꿈도 꾸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다가 더는 늦기 전에 유학은 못 가더라도 프랑스 파리에 가서 살아는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소에 자잘한 일은 결정을 잘하지 못하는데, 한 번 크게 마음먹은 일은 꼭 해야 하는 성격이라, 마음을 먹고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받기 위해 준비하는 과정은 일사천리였던 것 같다.
문제는 언어였다. 이미 스무 살 초반, 첫 직장에서 호되게 당하고 일본 도쿄로 도망을 갔던 적이 있던 나는 언어를 하지 못하고 그 나라에서 사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고 있었다. 회사에 다니면서 주말 오전에 프랑스어 기초반 학원을 끊어 다녔다. 그렇게 겨우 초급은 뗐지만, 영어도 제대로 하지 못했던 나는 프랑스어가 쉽사리 늘지 않아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프랑스에 가는 걸 더는 미룰 수가 없었다. 나이도 나이었지만, 더이상 미루다가는 흐지부지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프랑스어 기초만을 겨우 배운 채 무작정 파리로 떠났다. 그래도 두 번째 워킹홀리데이니까 처음보다는 나을 거라고 믿으면서.
그렇게 프랑스 파리에 도착한 나는 다행히 주변 사람들로부터 여러 도움을 받아 잘 적응하며 지낼 수 있었다. 언어를 완벽하게 하진 못했지만, 생활에 큰 불편함은 없을 정도로 (예를 들어 마트에서 물건을 산다거나, 식당에서 음식을 주문하는 것) 프랑스어도 늘었고, 무엇보다 일본어를 할 줄 아는 게 그곳에서 큰 장점이 되었다. 그 덕분에 일자리도 구하고 집세 걱정 없이 먹고 살 수 있었으니까.
프랑스는 우리나라보다 근로 시간이 짧았는데, 나는 주 4일을 풀타임으로 한인 마트에서 일했다. 그리고 <파운드 매거진>에 프랑스 파리에 관한 글도 썼다. 매거진에 원래 해외 이슈를 다루는 페이지가 있었는데, 너무나 감사하게도 편집장님이 내게 그 부분에 글을 실을 수 있게 해주셨다. 매달 바뀌는 이슈 덕분에 나는 파리 곳곳을 돌아다니며 더 많은 기억을 쌓을 수 있었다.
파리에서 행복하기만 한 건 아니었다. 이방인으로서 힘든 일, 외로운 일도 분명히 있었다. 그렇지만, 한국에서라고 달랐을까? 파리에서 힘들고 외로웠던 시간은 행복하고 즐거웠던 시간에 많이 희석되어 지금은 희미하기만 하다. 지금은 그저 좋고 행복했던 기억만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 기억들이 있어서, 그 기억들 덕분에 나는 지금까지 올 수 있었고 버틸 수 있었다.
워킹홀리데이 비자가 끝나고 한국에 돌아와서는 아르바이트를 하고 회사를 옮겨 다니며 적지 않은 방황을 했다. 방황을 하면 할수록 파리에서의 시간들이 전부 꿈같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건 꿈이 아니었다. 내게 정말로 일어났던, 있었던 일들. 그 시간들을 잊어서 잃어버리고 싶지 않았다.
이번에 펴내게 낸 파리 에세이 사진집은 그렇게 잊고 싶지 않은, 그리운 기억들을 묶어 책으로 만든 것이다. 이 묶음 또한 나의 오랜 꿈 중 하나였다. 일할 때는 생각이 많고, 완벽을 추구하는 성향 때문에 2018년부터 준비한 책을 이제야 선보이게 됐는데, 너무 늦었을지도 모르지만... 이제라도 이렇게 세상에 내보일 수 있어 그래도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언제 여행할 수 있을지 모르는 지금, 이 책을 내는 게 맞나 싶기도 했다. 그렇지만, 나와 같이 어느 시절을 그리워하는 누군가, 또는 언젠가 다시 여행할 날을 꿈꾸며 기다리는 누군가에게 작은 위로나 설렘이 되지 않을까 생각하며 이 책을 완성했다.
사진집에는 1년 동안 프랑스에서 지내면서 찍은 사진들과 짧은 글들을 함께 실었다. 오랜 취미였던 필름카메라로 찍은 사진과, 디지털카메라로 찍은 사진들을 어울리게 배치하고, 아이폰 메모장과 다이어리에 썼던 글들을 다듬어 옮겨 적었다.
책의 제목 <너무도 익숙해서 사무치게 그리울 줄 알아서>는 한국에 돌아올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 대문을 열고 나가면 늘 마주했던 익숙한 풍경을 보며 적었던 글에서 가지고 왔다. 그때 적은 글은 책의 프롤로그에 실었는데 다음과 같은 글이다
문득, 남겨두고 싶어질 때가 있었다.
'아, 예쁘다'라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매일매일 보는 익숙한 풍경이라서
너무도 익숙해서
사무치게 그리울 줄 알아서
돌아올 날이 언제인지 정확히 알고 있어서, 끝을 알고 있어서 더 소중했던 시간들을 기록한 나의 첫 독립출판물.
책에는 꼭 넣고 싶었던 게 있었는데, 그건 바로 필름 카메라로 찍은 사진을 트레싱지로 인쇄해 넣은 페이지다. 트레싱지로 간지를 넣는 데 제약이 많이 따랐고, 단가도 높아졌지만 이 페이지를 포기할 수 없었던 건, 기억의 중첩을 표현하고 싶어서다.
시간이 지날수록 어떠한 기억은 또 다른 어떠한 기억과 겹쳐져 더 선명해지기도, 더 흐려지기도 한다는 걸 이 몇 장의 페이지로 말하고 싶었다. 파리의 작은 내 방에서 보던 풍경, 자주 갔던 단골 카페, 익숙했던 골목들과 출퇴근 길에 종종 들렸던 센느 강.. 꼭 파리가 아니더라도 우리가 기억하고 싶은 장소들, 그리운 사람들... 그 대상이 무엇이든 우리가 기억하지 못하는 시간들이 아닌, 우리가 기억하고 있는 기억들은 이렇게 여러 기억이 겹쳐져 지금과 같은 모양으로 떠오르는 게 아닐까 싶어서. 그래서 더욱 그리운 거라 생각 되어서.
무언가를 그리워할 줄 아는 이들과 함께 지나간 순간들, 또 언젠가 그리워할 지금을 나누며 맘껏 그리워하고 싶다. 또 언젠가 그리워하기 위해 다시 떠날 날을 기다리기도 하면서.
부디 나의 기억의 묶음들이 누군가에게 작은 꿈이 되어주기를...
*현재 파리 에세이 사진집은 텀블벅에서 크라우드 펀딩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책에 대해 더 궁금한 게 있으신 분들은 아래 링크를 클릭하시면 더욱 자세한 내용을 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