極右
수학을 제외하면, 세상에 그렇게 딱 부러지는 ‘정답’이 있는 문제란 잘 없다. 내가 서 있는 곳, 내가 바라보는 방향에 따라 진실은 곧잘 변하곤 한다.
회사원이었던 시절이 있다. 말단 사원일 땐 상사들이 둘도 없는 악마였지만 막상 그 상사가 되고 보니 할 일은 안 하고 시시콜콜 윗사람 까기만 바쁜 사원들이 아쉽기만 했다.
누군가의 최측근이었던 적이 있다. 가끔씩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할 만한 언행을 벌이는 그였지만, 최측근이었던 난 그의 행동들을 덮어놓고 이해했던 것 같다. 이해할 수 없는 그의 행동들에 곁눈질과 손가락질이 꽂혀도 나는 마치 내일인 양 최전선에 서서 그를 옹호하고 오해라며 사람들을 설득시키고자 노력했다.
이제는 자연히 멀어진 그들을 보고 있자니 바깥에서 손가락질을 하던 사람들의 시선이 무엇인지 잘 알겠다. 여전히 안쪽에 있는 그들끼린 돈독한 듯이 보인다. 최측근에게 현실 혹은 사실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올여름 최성수기를 강원도 양양 인구 해변에서 보냈다. 1년에 단 한 번은 아니더라도 몇 번 되지 않는 귀중한 휴가. 연인과 친구 혹은 가족들과 찾은 휴양지는 일상생활에서 벗어나 자유를 즐기기에 더할 나위 없는 곳이다. 하지만 여기서도 나는 휴가를 맘껏 즐기고픈 행락객들과 그들의 주머니를 노리는 한철 장사꾼, 그리고 또 휴가철이 지나도 그곳에 남아 삶을 계속 이어가야 하는 현지인들의 온도 차를 느끼기 시작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다소 정치적이기도 한 ‘측근의 입장’에 대해 좀 더 곰곰이 생각해봐야 할 때가 됐다고 느꼈다. 내 친구의 일이라면 잘못된 일도 덮어두고 지지했던 적은 없는지. 진짜 측근이라면, 진정한 벗이라면 잘못된 것은 잘못됐다고 말해주고 듣는 이도 그것을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하지 않을까?
구석에 몰려 날을 세우고만 있는 이들에게 한마디 전하자면 ‘측근의 입장’이 반드시 ‘정의’ 일 필요는 없다. 세상에는 선한 이가 있다면 악한 이도 있으니까. 악한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면, 세상엔 어쩔 수 있는 일이 있는가 하면 어쩔 수 없는 일이 있다. 덮어 두고 옹호와 지지만 할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는 일이었더라면 서로 상황을 자각하고 부끄러워하며 함께 상황을 타개할 수도 있을 거다. 그 편이 당사자와 측근들에게 보다 미래 지향적인 행동 방식이 되지 않을까.
세상의 수많은 기준들 사이에서 중심을 잡고, 타인들의 그 중심도 이해하는 일이 중요한 시기가 온 것 같다. 삶을 그렇게 객관적인 시선만으로 살아갈 수 있을는지, 아니, ‘객관’이란 것이 애초에 존재하는지 확인하는 일이 쉽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다른 것이 꼭 틀린 것은 아니라고들 말하지만, 틀린 것은 틀린 거다. 시시비비를 따지지 않고 내 측근의 일이라면 덮어두고 옹호하려 든다면, 그곳으로부터 작은 극우(極右)가 시작된다.
THE ReeAL MAGAZINE VOL.11 [ ENTOURAGE ] 2016 / AUTUMN
SCRIBBLE - 극우(極右)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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