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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한 방울이 보석! 흙으로 만든 압력솥, 모로코 타진

베르베르족의 사막 생존 과학

by 애들 빙자 여행러

모로코를 떠올릴 때, 당신의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음식은 무엇인지요? 아마도 많은 분들이 뜨거운 김을 뿜는 '타진(Tagine)'이 그려질 것입니다. 닭고기와 채소, 이국적인 향신료가 가득한 근사한 스튜 말입니다. 하지만 정말 타진의 본질이 ‘요리’일까요?


원뿔 모양의 독특한 뚜껑과 얕은 흙 접시. 우리가 아는 이 풍요로운 음식은 사실, 물 한 방울이 귀했던 시절을 살아낸 사람들의 생존 과학이자 지혜의 기록일지도 모릅니다. 오늘, 흙과 불, 물이 빚어낸 모로코 타진을 알아보려고 합니다.


요리가 아니라, '생존 과학'


타진은 단순한 조리 도구가 아닙니다. 이것은 물이 극도로 부족한 사막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탄생한 과학적 발명품입니다. 그 기원은 북아프리카의 유목민이었던 베르베르족에게 있습니다. 그들은 최소한의 자원으로 최대의 효과를 내는 법을 알아야 했습니다.

스크린샷 2025-11-19 오후 8.28.23.png 출처 : tours360morocco.com

타진의 상징인 원뿔형 뚜껑은 완벽한 '재순환 증류 시스템' 역할을 합니다. 조리 중 재료에서 나온 수증기는 좁고 높은 원뿔 뚜껑을 따라 올라가다 상대적으로 차가운 꼭대기에서 에너지를 잃고 물방울로 응결된 후, 다시 음식으로 떨어집니다. 이 원리 덕분에 물을 거의 사용하지 않고도 재료 본연의 수분만으로 질긴 고기를 부드럽게 찔 수 있었습니다. 오랜 시간 은근하게 가열하는 과정은 질긴 고기의 콜라겐을 부드러운 젤라틴으로 변화시키는 과정을 극대화합니다. 또한 라스 엘 하누트(Ras El Hanout) 같은 복합 향신료는 단순히 풍미를 위한 것이 아니라, 더운 기후에서 음식의 부패를 막는 자연적인 방부제의 역할까지 겸하는 생존의 지혜였습니다. 그것은 베르베르족이 수천 년 동안 사막에서 살아남기 위해 기록한 ‘환경의 지혜’이자 ‘절약의 연금술’이었습니다.


우리가 아는 타진은 '신세계 이민자'가 만들었습니다


놀랍게도, 오늘날 우리가 아는 붉고 풍미 가득한 타진은 16세기 이후에 완성된 모습입니다. 대항해 시대 이전의 타진은 무화과, 올리브, 소금에 절인 레몬 등이 주재료인 소박한 음식이었습니다.

스크린샷 2025-11-19 오후 8.19.33.png 출처 : tours360morocco.com

진정한 변화는 아메리카 대륙에서 건너온 신세계 이민자, 즉 토마토와 감자가 유입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산성이 풍부한 토마토는 고기의 연육 작용을 도와 풍미를 극적으로 끌어올리는 과학적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또한, 척박한 땅에서도 쉽게 재배할 수 있었던 감자와 토마토 덕분에 타진은 부유층의 전유물에서 모두의 식탁에 오르는 대중적인 음식이 되었습니다. 이는 타진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문화적 전환점이었습니다.


'단짠'의 비밀은 설탕 교역로


모로코 요리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달고 짠맛의 절묘한 조화입니다. 이 독특한 맛의 뿌리는 모로코가 유럽과 아프리카를 잇는 설탕 교역의 중심지였다는 역사적 사실에 있습니다.

스크린샷 2025-11-19 오후 8.27.57.png 출처 : tours360morocco.com

설탕이 흔해지면서 건포도, 살구, 대추야자 같은 말린 과일이 타진에 적극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했습니다. 고기의 짠맛과 향신료의 매운맛에 과일의 달콤함이 더해지며 오늘날 우리가 아는 '스위트 앤 사워(Sweet and Sour)' 스타일이 완성된 것입니다. 이는 이슬람 문화권에서 금기시되는 돼지고기 대신, 다른 고기와 과일의 조합을 통해 궁극의 감칠맛을 찾아내려는 미식의 혁명이었습니다.


4. 튀니지에선 완전히 다른 요리를 '타진'이라 부릅니다


'타진'이라는 이름이 모든 곳에서 같은 음식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가장 극적인 예는 바로 이웃 국가 튀니지입니다. 모로코의 타진이 걸쭉한 스튜 형태라면, 튀니지의 '타진'은 완전히 다른 요리입니다.


튀니지의 타진은 다진 고기, 치즈, 계란을 섞어 오븐에 구워낸 것으로, 프랑스의 키슈나 오믈렛과 훨씬 더 가깝습니다. 이는 이름만 공유할 뿐, 각자의 환경과 역사 속에서 전혀 다른 모습으로 진화한 '문화적 변형'의 아주 흥미로운 사례입니다. 타진이라는 단어가 조리 도기 자체를 의미하기에 벌어진 재미있는 현상인 셈입니다.


정반대의 과학을 사용하는 '쌍둥이 요리'가 한국에 있습니다


물이 부족한 사막의 지혜를 담은 타진. 그렇다면 정반대의 환경에서는 어떤 요리가 탄생했을까요? 놀랍게도 그 '쌍둥이 요리'는 한국의 갈비찜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두 요리는 질긴 고기를 부드럽게 만들고, 단짠의 조화를 추구한다는 공통된 목표를 가집니다.


하지만 목표를 이루는 과학적 원리는 정반대입니다. 타진은 원뿔 뚜껑으로 수증기를 '가두는' 보존의 과학을 사용합니다. 반면, 갈비찜은 뚜껑을 열거나 틈을 두어 수분을 의도적으로 '날려' 양념을 응축시키는 졸임(Reduction)의 과학을 사용합니다.

타진은 사막의 절약 정신이 만든 과학이라면, 갈비찜은 농경 문화의 풍요로움이 만든 미학인 것입니다.



결국 타진의 힘은 값비싼 재료가 아니라, 흙과 물이라는 가장 기본적인 원소에 대한 깊은 이해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흙으로 빚은 가장 원시적인 도구가 수분 증류라는 가장 과학적인 원리를 구현해낸 것입니다.


다음에 타진을 마주할 때, 그 원뿔 뚜껑 속에서 끓고 있는 것이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물 한 방울도 허투루 쓰지 않았던 수천 년의 지혜와 시간이라는 사실을 떠올려 보세요. 그 맛이 분명 새롭게 느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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