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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늘 Jan 10. 2022

모두가 나를 잊은 세상에서

영화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

거대한 공룡이 묶여 섬으로 실력가던 장면을 기억한다. 눈썹이 하얗게 얼어 바다 속으로 가라앉던 디카프리오의 얼굴도 선명하다. 닭백숙을 앞에 두고 울부짖던 유승호의 <집으로>까지 모두 작은 영화관에서 봤다. 정확히 말하자면 영화만 상영하는 곳은 아니고 피아노대회, 어린이 뮤지컬 등의 문화행사를 하던 동네의 회관이었다. 롯데시네마나 CGV가 낯설던 시절, 온 동네 아이들은 모두 문화회관에 모여들었다. 중학교에 들어가서야 버스를 타고 부평의 롯데시네마에 처음 가봤다. 첫 영화는 하지원, 김재원 주연의 <내 사랑 싸가지>였다. 동네에 논밭이 사라지고 아파트가 많아지면서 덩달아 영화관도 생겼다. 꼭대기층이 다 영화관인 높은 건물이 생겼고, 1층엔 KFC가 자리 잡았다. 주말엔 사람이 너무 많아 엘리베이터를 타려면 두세 번은 기다려야 했다. 며칠 전 금요일, 오랜만에 가본 영화관은 너무 한산했다. 그 많던 옷가게들은 모두 자취를 감췄고, KFC도 불이 꺼진 채 창문엔 임대문의라는 글자가 크게 붙어있었다. 아무도 없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8층으로 올라갔다. 예매권을 티겟으로 교환하고 의자에 앉아있는데 꼭 유령도시에 온 기분이었다. 에스컬레이터는 빨간 줄로 막혀있고, 천장에 매달린 작은 스크린은 화면은 꺼진 채 소리만 들려왔다. 이 한산한 영화관에서 고른 영화는 <스파이더맨 : 노 웨이 홈>이다. 나만 빼고 모두가 본 것 같은 이 영화를 이제서야 보고 왔다. 


영화는 초반부터 딴 생각을 할 수 없게 만든다. 미스테리오가 피터의 정체를 밝히는 장면부터 아슬아슬한 웹 스윙까지 몰아친다. 놀이기구를 타는 기분을 느끼며 피터의 일상에 빠져들어간다. 그의 곁엔 여전히 MJ와 메이, 해피, 네드가 함께 있었다. 누구보다 그를 이해해주고, 응원하며 사랑해준다. 이번 편에서는 두 사람이 더 생긴다. 다른 차원이 열리면서 이 세계로 넘어온 두 사람의 스파이더맨. 상처를 나누고 같이 싸우면서 짧은 시간 안에 형제처럼 가까워진다. 토비 맥과이어가 등장했을 때 왠지 모를 전율이 느껴졌다. 오래 전에 헤어진 친구를 만난 것처럼 반가웠고, 거미줄을 쏘는 모습을 보며 신나기도 했다. 조나단 라슨을 훌륭하게 연기한 앤드류 가필드가 MJ를 구할 땐 눈물이 났다. 오랜 팬들에겐 종합선물세트가 되지 않았을까. 역대 스파이더맨과 빌런들이 한 곳에 모여있는 이 상황을 스크린에서 보게 될 줄은 몰랐을 거다. 


든든한 두 형제를 만났지만 소중한 사람들이 다치기도 했다. 그건 순전히 톰 홀랜드 피터의 선택으로 벌어진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주변 사람들은 그를 이해했다. 그 마음이 무엇인지, 어떤 걸 생각하는지 잘 알고 있었고 기꺼이 함께해주었다. 한 사람을 잃고 슬퍼할 때면 주변에 또 다른 사람들이 모였다. 얼싸안고 같이 울어주고 다음 순간까지 곁에 있어줬다. 아무도 없는 것 같았지만 정신차려보면 어느새 주위엔 사람들이 모여있다. 피터 역시 그 힘으로 다시 일어서서 자신의 선택이 불러온 결과에 대한 책임을 끝까지 지게 된다. 어쩌면 성인이 되기 전 꼭 겪어야 할 과정을 비유적으로 보여준 건지도 모르겠다. 어른이 되기 전엔 나를 지켜줄 울타리가 많다. 부모님, 학교, 끈끈한 친구들. 사회로 나오면 온전히 나혼자 맞서야 하는 일들이 부지기수로 늘어나 가끔은 아무도 없는 곳에서 펑펑 울게 된다. 첫 연애에서 겪는 이별이라든지 직장 상사와의 불화로 겪게 되는 인간 관계에 대한 염증 같은 것들. 이 과정을 지나다보면 선택에 책임을 지는 태도가 어떤 건지 깨닫게 된다. 


결국 피터는 소중한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자신을 포기한다. 세상이 나를 잊게 만들고 다시 시작하는 길을 택한다. 모두가 나를 잊는 것과 나까지 나를 잊는 것 중에 어느 것이 더 잔인할까. 같이 영화를 보고 나온 남자친구가 질문을 했다. 어느 것을 택해도 세상에 혼자 남은 기분이 드는 건 마찬가지일 거다. 그럼에도 여전히 희망을 갖는 건 피터의 친구들이 끝내 기억을 되찾고 다시 돌아오리란 기대 때문이다. 꼭 그렇게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기도 하다. 샹영을 마치고 불이 들어온 상영관에는 시작할 때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앉아있었다. 한산하게 느껴지던 공기는 일순간 훈훈해지고, 왠지 모르게 마음이 놓였다. 아무도 없는 줄 알았던 세상엔 사실 나 혼자만 있는 게 아니었다. 다음 편엔 피터 곁에 분명 누군가 다시 다가올 거란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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