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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욱 Dec 01. 2016

여행의 매일이
선명하게 기억될 순 없다

2015.01.06 in Versailles, France

여행을 하다 보면 관심이 없더라도 괜스레 한번 정도는 가봐야 할 것만 같은 장소들이 있다. 살면서 적어도 100번은 넘게 들어봤을 유명한 곳이자, 각종 여행 서적에서 한 번은 꼭 언급되는 장소들. 이런 곳은 일종의 의무감이 이끄는 장소들이다. 프랑스의 베르사유 궁은 내게 그런 곳이었다. 어차피 파리 시내에서 관심 있었던 것들은 다 구경했다 싶었던 나는, 파리에서의 하루를 고스란히 떼어내어 베르사유 궁으로 향했다.


베르사유 궁은 우리나라 사람들에겐 꽤나 익숙한 장소이기도 하다. 본 적은 없어도 누구나 한 번쯤 제목 정도는 들어봤을 순정만화의 전설, 이케다 리요코의 '베르사유의 장미'때문이다. 실제 마리 앙투아네트의 이야기를 각색해 만든 이 만화는 우리나라에서 큰 인기를 끌었고, 대중의 귀에 베르사유라는 이름의 장소는 가본 적은 없어도 괜히 익숙한 곳이 되었다. 물론 베르사유의 장미가 아니더라도 이 궁전은 교과서에서 배운 베르사유 조약을 맺은 역사적인 장소임과 동시에, 압도적인 규모와 아름다운 건축양식, 그리고 정원들 때문에 이미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관광지다.


베르사유는 파리 시내에서 RER 혹은 버스로 한 시간이 좀 못 되는 거리를 이동해야 도착할 수 있다. 졸린눈을 비비며 도착한 베르사유 궁전의 앞마당엔 이미 입장을 기다리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커다란 앞마당과 그 안을 가득 채운 관광객들의 모습을 보며, 이 곳이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장소임을 다시금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회색의 칙칙한 날씨는 광장을 이루고 있는 회백색의 벽돌에 우울함을 더해주며 내 상상과는 전혀 다른 모습의 베르사유 궁전을 보여주고 있었다.

과거 연병장이었다는 베르사유 궁전 앞의 광장은 거대했다. 그리고 진짜 금인지 황금색을 칠한 것인지 모를 성문과 저 멀리 보이는 거대한 조각상들은 그 당시 프랑스 왕실의 위엄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나는 종종걸음으로 길게 늘어선 사람들의 대기열 맨 끝으로 가서 섰다.


5분쯤 기다리며 내 앞에 서있는 외국인 가족들을 구경하고 있었는데, 저마다 손에 베르사유 궁전 입장 티켓으로 보이는 종이를 하나씩 들고 있었다. 내 뒤에 줄을 서는 여행객들도 전부 마찬가지였다. 알고 보니 들어갈 때 티켓을 사는 것이 아니라, 왼편에 마련된 창구에서 티켓을 별도로 산 뒤에 입장해야 했다. 아니나 다를까, 얼마 있으니 직원이 다가와 내게 티켓 소지 여부를 물어왔다. 그나마 빨리 알게 된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며 티켓 창구로 걸어갔다.


그렇게 도착한 티켓 창구엔 벌써 많은 사람들이 일렬로 늘어서 있었다. '한참을 기다려야겠구나..'하고 생각하던 중에, 옆에 Caisses Automatique(Ticket Machine)이라고 쓰여있는 안내문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저기다!' 싶어서 들어간 그곳에는 죽 늘어선 자동 티켓 판매기들이 나를 맞이하고 있었다.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비어있는 기계 앞에 서서 언어 설정을 영어로 바꾸려는데, 기계 자체에 문제가 생겼는지 언어 설정이 바뀌질 않았다. 다른 기계로 가려고 주위를 둘러봤을 땐 이미 다른 사람들이 기계를 차지하고 있었다. 결국 나는 까막눈보다 약간 나은 내 프랑스어 실력으로 더듬더듬 티켓을 사야 했다. 누가 봤다면 프랑스어를 전공한 사람이라고는 믿지 않을 만큼 기가 막힌 프랑스어 실력이었지만, 어쨌든 불문과를 나와서 이 정도라도 알아들을 수 있는 현실에 감사하며 뽑혀 나온 티켓을 쥐고 밖으로 나왔다.

그렇게 입장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틈에서 한 시간 가량을 멍청히 서서 기다렸다. 혼자 온 여행객인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그저 앞 뒤에 서서 나와 함께 입장만을 기다리는 사람들을 관찰하는 일뿐이었다. 다행히도 유럽의 1월 날씨는 우리나라와는 달리 생각처럼 많이 춥진 않았다. 나는 기다리는 동안 프랑스어와 영어와 중국어 등 각종 언어가 공기 중에 섞여 내 귀로 들어오는 소리를 들어야만 했다.


그렇게 한참을 기다려 입장한 베르사유 궁전은 로비에서부터 나를 압도해왔다. 길게 쭉 뻗은 복도와, 목이 아프게 올려다봐야 하는 높은 천장과, 곳곳에 화려하게 장식된 장식물들을 보며 들었던 생각은 '이 큰 공간을 몇 명이 청소해야 했을까' 혹은 '몇 명이 생활했을까'따위의 것들이었다. 동시에, 몇 백 년 전에도 내가 걷고 있는 이 길을 프랑스의 왕족들이 걸어 다녔다는 생각에 조금은 으스스한 기분이 들었다. 수백 년이 지났음에도 지나치게 깔끔하게 정돈된 대리석 복도엔 밤마다 유령이 떠돌아다닐 것 같았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런 인상은 어릴 적 즐겨본 '꼬마유령 캐스퍼'에 나오던 오래된 저택의 모습에서 어렴풋하게 기인한 것이었다.

궁전을 둘러보는 사람들은 모두들 천장을 쳐다보며 사진을 찍었다. 궁전의 천장은 높았고, 화려했다. 어느 한 곳도 비워져 있는 곳이 없었다. 천장에는 전부 그림이 그려져 있거나 반짝이는 샹들리에로 치장되어있었다. 내가 중세시대에 태어난 왕족 혹은 귀족이었다면 이렇게 정신없고 현란한 방에서 과연 생활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을 잠깐 했다. 물론 아주 쓸데없는 생각이라는 걸 깨닫기까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지만.

화려하게 치장된 방들을 몇 개 지나니, 어떤 방 앞에서 사람들이 북적이고 있었다. 직감적으로 유명한 곳임을 깨달았다. 그곳은 바로 베르사유 궁전에서 가장 유명한 '거울의 방'이 있는 곳이었다.


과거 거울의 방은 궁정의 축제나 중요한 행사들이 열리는 곳이었고, 근대사에서는 베르사유 조약이 체결된 중요한 역사적 장소이기도 했다. 이 방에 자리 잡은 17개의 커다란 창문과 거울들은 서로 마주 보며 서 있었고, 천장에는 화려한 샹들리에가 잔뜩 달려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화려함의 극치라는 생각을 자연스레 하게 만든다. 그러나 내가 도착한 날엔 날씨가 흐려서 거울의 방이 가진 화려한 매력이 충분히 느껴지진 않는 듯했다. 거대한 창을 통해 햇볕이 좀 더 많이 들어오는 날에는 방 안을 수놓은 샹들리에와 거울들이 어떻게 빛을 반사시키고 있을지 무척 궁금해졌다.

거울의 방뿐 아니라 베르사유 궁전의 내부는 대체로 화려했다. 그러나 내게 베르사유 궁전 내부의 인상은 그저 큰 샹들리에 작은 샹들리에, 더 작은 샹들리에, 큰 조각 작은 조각 부서진 조각, 큰 그림 작은 그림 천장에 그려진 그림 등이 계속되는 풍경에 지나지 않았다.


사실 나는 앞에서 말했던 '어쩐지'가야 할 것만 같은 의무감으로 가는 곳들에선 대체로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그곳까지 간 노력과 시간이 아쉬워서 일부러라도 좋은 점을 찾고 흥미를 가지려 애쓰는 편이었지만, 그건 그저 무언가를 좋아하는 일이 단순히 노력한다고 되는 것이 아님을 다시금 깨닫는 과정일 뿐이었다. 여행지에서는 오히려 무턱대고 발걸음을 옮긴 곳들이 더 내 마음을 잡아 끄는 경우가 많곤 했다. 흥미를 느끼지도 못하고, 끌리지도 않는 장소임에도 불구하고 단순히 다른 이들의 입에 오르내린다는 이유로 갔던 곳들의 대부분은 그저 얄팍한 인상만을 남긴 채 사라질 뿐이었다.


그렇지만 자신이 어떻게 느낀 곳이든 그 곳에 대해 다른 이들에게 함부로 말하거나, 추천하지 않는다며 속단하는 일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사람들에겐 저마다의 여행 스타일이 있고, 그렇기에 마음이 끌리는 지점은 서로가 다르게 마련이다. 만약 내가 안 좋았던 곳에 대해 그대로 험담하며 절대로 가지 말라고 한다면, 그건 상대방이 그 장소에 대해 느낄 기회를 박탈하는 일이자, 나의 판단이 최고의 판단이라 생각하는 오만에서 저지르는 실수일 뿐일 테다. 그리고 때로 우리의 여행은 실망하기 위한 여정들이기도 하다.


어쨌든 베르사유에서 나는 기계적으로 셔터를 누르며 지도에 안내된 대로 내부를 돌아다녔다. 그리고 시간이 흐른 지금, 내게 베르사유는 화려한 조명과 어지러운 장식들이 뭉뚱그려진 하나의 이미지로만 남아있을 뿐이다.

궁전 내부 구경을 마친 뒤 정원으로 나왔다. 궁전의 정원이 아무리 커봤자 얼마나 크겠냐는 생각을 하며 나온 나는 정원의 규모에 두 눈을 의심했다. 못해도 어지간한 동네 하나 정도는 충분히 들어가고도 남을 만한 크기의 정원이 내 눈앞에 펼쳐졌다. 궁전에서 정원으로 나오면, 그 앞에 이동을 좀 더 손쉽게 할 수 있는 꼬마기차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나는 속으로 '커봤자 얼마나 크겠어 천천히 걷지 뭐'하는 생각을 하며 정원으로 걸어 내려갔다. 이것이 이날 내가 저지른 가장 큰 실수가 될 줄은 꿈에도 모른 채 말이다.

겨울을 맞은 베르사유궁은 전체적으로 보수공사가 한창이었다. 온통 회색과 갈색의 낮은 채도가 가득한 그곳은 사람이 살지 않는 오래된 마을 같았다. 정원을 걸어 다니는 동안 보인 것은 칼로 자른 듯 정확하게 가지치기되어 관리되고 있는 나무들 뿐이었다. 나뭇잎이 시들어버린 나무들에선 생명의 기운을 느낄 수 없었다. 겨울의 정원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저 걷고 또 걷는 일뿐이었다. 걸으면서 종종 구글 지도를 켜 내 위치를 확인할 때면, 다시금 이 공간이 얼마나 큰 곳인지 깨달았다.

정원 내부에는 마리 앙투아네트가 프랑스 시골의 전원생활이 궁금해 만들었다는 마리 앙투아네트의 마을을 비롯해, 쁘띠 트리아농, 그랑 트리아농 등의 작은 궁전들도 있었다. 전원생활이 궁금해서 마을 하나를 통째로 만들었다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가 실제로 가능하려면 얼만큼의 재산과 권력이 있어야 하는 것인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그러니까,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그렇게 혐오해 마지않는 '부자들의 서민체험'과 같은 기만적인 행위는 이미 예전부터 있어왔던 것이다.


정원 내부를 걸으면 걸을수록, 베르사유 궁전은 겨울이 아닌 봄이나 여름철에 와야 그 매력을 제대로 알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겨울의 베르사유는 그저 앙상한 나뭇가지와, 화려했던 왕족들의 생활과, 그래서 더 작고 초라해지는 자신만을 보게 되는 곳이었다. 베르사유에서의 내 하루는 그리 인상 깊지도, 즐겁지도 않은 날이었다.

그렇게 베르사유에서의 하루를 마친 나는 지친 몸을 이끌고 숙소로 향했다. 그곳에서의 하루는, 여행의 기간 동안 매일매일 행복하고 선명한 날만 계속될 수는 없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는 시간이었다.


우리가 SNS를 통해 보는 다른 이들의 여행사진은 대체로 좋고 아름다운 것들만 보여줄 뿐이고, 여행기 속의 여행 얘기는 대체로 즐겁고 유쾌한 것들로만 가득하다. 이런 것들은 결국 하나의 잘 압축된 소설과도 같다. 가끔 위기를 겪지만 결국 이를 잘 극복한 주인공의 모험 이야기.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그런 소설들처럼 압축된 형태의 이야기로 펼쳐지지 않는다. 현실은 그런 압축적인 강조점들 뿐 아니라 희미한 작은 점들이 촘촘하게 모여 이루어진 하나의 길고도 지루한 선의 형태를 띠고 있다.


그래서 여행지에서의 날들은, 때로는 즐겁지만 대체로 지루한 여정들로 가득 차 있다. 시간이 흐르면 선명한 날들만 남고 흐렸던 날들은 지워질 테지만 우리의 여행은 결코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우리는 모든 것이 희미해진 채 다시 여행의 길 위에 서서야 깨닫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행자가 낯선 장소로 떠나는 이유는, 여행을 떠나지 않고서는 그런 여행의 희미함조차 경험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날의 베르사유처럼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떠난 장소에 실망하고 돌아오는 날이면, 내가 진정으로 어떤 것들에 끌리는지 어렴풋하게나마 느끼고, 이런 작은 느낌들이 모여 인생의 중요한 순간에 나를 좀 더 올바르게 지탱해 줄 수 있으리라 믿기 때문이다.


오랜만의 여행기인데, 즐겁지만은 않은 내용들로 찾아뵙습니다. 앞으로는 좀 더 여행기 완결에 속도를 가해볼까 합니다. 벌써 2년정도 지난 여행의 이야기를 쓰고 있네요.


https://www.instagram.com/jw_yoon_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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