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3화 가짜의 강함을 시험당하다

by 라비니야

아침에 버릇처럼 얼굴을 훑었다. 어제보다 눈썹 앞머리가 조금 옅어졌나 싶어 휴지로 슬쩍 눌러 보았다가 멈췄다. 괜한 손놀림이 화를 부른다는 걸 나는 여러 번 배웠다. 오래 버티고 싶은 건 괜히 만지지 않는 편이 낫다. 주머니에서 명함 크기의 카드가 나왔다. 가게 주인이 건네준 관리 카드였다. 첫 2주 내 가벼운 리터치 권장. 밑줄도 치지 않았는데 밑줄처럼 눈에 박혔다. 내 얼굴이 유통기한을 달고 있다는 기분이 들어 씁쓸해졌다. 그래도 거울 속 얼굴은 어제의 나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 정도면 족했다.

사무실에 도착하자 복도 공기가 먼저 나를 훑었다. 사람들은 티 나지 않게 보는 데 능숙하다. 커피머신 앞에 선 남자 대리 하나가 내 옆을 지나며 말했다. “오늘 프레젠테이션, 자영 씨가 메인으로 잡죠?” 질문이라기보다 공지였다. 나는 네, 하고 짧게 대답했다. 긴 말은 탈을 부른다. 대신 슬라이드의 제목을 바꿨다. 감각적인 여성 대신 편의성의 재발견. 같은 말을 다른 자리로 옮겨놓는 것만으로도 덜 상처받는 날이 있다.

오전 회의에서 팀장은 스크린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음… 톤은 좋은데, 마지막 훅이 약하네.”
나는 숨을 들이켰다. 어제의 내가 오늘의 나를 조금 밀어준다면, 지금이다.
“훅을 세우기보다 사용 맥락을 세밀하게 잡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저희 타깃은 이벤트에 반응하는 사람이 아니라, 불편을 오래 참다 한 번에 갈아타는 사람이니까요.”
회의실 공기가 아주 얇게 바뀌었다. 누군가가 볼펜을 멈추었다. 팀장은 잠깐 입을 다물었다가 말했다. “좋아요. 그 결로 다시 짜봐요.” 칭찬은 아니었지만, 철회도 아니었다. 충분했다.

점심 무렵, 사내 메신저에 알림이 떴다. 전사 타 부문 합동 리셉션. 대강당 6시. 이런 자리는 늘 어중간한 인연을 소환한다. 얼굴로 알아보고, 이름은 까먹고, 소문은 덧칠된다. 나는 그 사실을 안다. 그래도 내려갔다. 회사 생활은 사교를 빙자한 출석체크가 많다.

현관 앞에서 잔이 돌았고, 누군가의 웃음이 지나갔다.
“오랜만이네요, 자영 씨.”
익숙한 목소리에 몸이 먼저 반응했다. 그는 예의 그 미간을 했다.
“잘 지냈어?”
나는 고개만 끄덕였다.

얇은 손목. 반지 낀 손. 그녀가 옆에 섰다.
“안녕하세요. 얘한테 얘기 들었어요. 같이 오래 일하셨다면서요.”
오래라는 말이 어색하게 길었다. 나는 잔을 들었다. “축하해요.” 말의 방향은 흐렸다.

그가 잔을 내려놓으며 내 얼굴을 훑었다.
“인상이… 달라졌네.”
그 말은 칭찬이 아니라, 이유를 캐는 시선이었다.
“회사 사람들이 다 그래요. 아마 제가 달라진 건 아닌데.”
“그래? 뭐, 좋은 거지.”
대화의 종지부를 빨리 찍는 사람은 자기 시간만 지킨다.

옆에서 그녀가 말했다.
“속눈썹… 되게 예쁘세요.”
“감사해요. 요즘은 다 하더라고요.”
신비는 오래 쓰면 미움이 된다. 적당히 평범하게 흐리는 것이 낫다.

그들은 다른 테이블로 옮겨갔다. 나는 테이블 끝에서 잔을 굴렸다. 무언가가 빠져나가는 느낌. 빛에 오래 노출된 사진처럼 색이 조금 빠지는 느낌. 손등으로 눈썹 앞머리를 눌렀다. 괜찮았다. 그런데 어느 구석이 흔들렸다.

리셉션이 끝나고 범석이 손을 흔들었다.
“오늘 자료, 자영 씨 아니면 안 되는 결이었어요.”
“퇴근해요? 역까지 같이 걸어요.”
우리는 걸었다.
“주말에 시간 되면 작은 전시 보러 갈래요? 우리 브랜드 레퍼런스에 딱 맞는 톤이 있어서.”
업무의 얼굴을 한 초대였다.
“좋아요. 전시라면 언제든.”
그는 안도했다.
“자영 씨는 그림 앞에 서 있을 때, 말수는 줄어드는데 존재감은 커져요. 묘해요.”
그 말은 조금 위험했다.

집에 도착해 세면대 앞에 섰다. 낮의 장면이 밀려왔다. 인상이 달라졌네. 그 말은 피부를 통과하지 못했지만 뼈에 긁혔다. 눈썹 앞머리를 다시 보았다. 아주 조금, 색이 얇아졌다. 무너짐의 시작 같았다.

다음 날 오후 긴급 일정과 겹쳐 리터치를 미루게 되었다. 전시장에서 헤어진 뒤 역으로 뛰어가며 메시지를 보냈다. 열차 지연 안내. 7시 48분 도착. 문은 닫혀 있었다.
금요일 단축 운영. 7:30 마감.

나는 죄송합니다 문자를 보냈다. 회신은 없었다. 허탈한 바람이 골목을 스쳤다. 무너지는 시간표가 조금 우스웠다. 집에 돌아와 거울을 보았다. 내 얼굴은 여전히 나였다. 다만 지친 나였다. 냉장고의 관리 카드를 떼어 서랍에 넣었다. 보이지 않는 곳으로. 가끔은 감추기가 덜 불안하다.

밤에 범석에게서 문자가 왔다.
[오늘 고마워요. 덕분에 방향이 또렷해졌어요. 주말에 밥, 정말 사겠습니다.]
나는 짧게 답했다.
[네, 다음 주에 봬요.]

빛이 꺼진 천장 아래서 조용히 생각했다. 가짜의 강함도 내 것이고, 진짜의 나약함도 내 것이다. 둘 다 내 것이라면, 언젠가 굳이 가짜라고 부르지 않아도 될까.
'내일은, 눈썹보다 먼저 눈을 보자.'

keyword
이전 02화2화 거울 속의 낯선 얼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