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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의 다른 면

이해라는 이름의 폭력에서 벗어나는 법

by 김예림

인스타그램을 보다가 이런 문장을 보았다.


“누군가에게 설명하고 해명해야 한다면 그 인연은 오래 가지 못한다.”


과연 그랬다.


같은 단어를 쓰더라도, 저마다의 경험과 맥락으로 그 의미는 달라진다.

보통은 ‘다르구나’ 하고 넘어간다.

어쩌면 그 차이가 상대의 정체성에 닿는 중요한 클루일 수도 있다.


서로의 주관 사이에 놓인 그 미묘한 틈은,

현상학에서는 “간주관성”이라 부른다.

간주관성의 간극을 허용하는 만큼,

관계는 깊어지는지도 모른다.


“네 글과 말을 이런 뜻으로 이해하면 될까?”

매번 자신의 해석이 맞는지를 확인하던 친구가 있었다.

그 마음이 반가워 진심을 담아 설명했지만,

이상하게도 설명할수록 어긋났다.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를 굳이 애쓰며 말하는 그를 보며,

그가 물어왔던 내 말과 글의 의미는 점점 미분되고 흩어졌다.


결국 남는 건 “너와 나는 다르다”는 결론뿐이었다.

어쩌면 다른 게 당연한데,

자꾸 자기가 왜 그런 말을 했고 진심은 뭐였는지

자꾸 자신의 언어로 이해를 구하는 일방성에 나는 질식할 것 같았다.


가끔은 이런 생각이 든다.

굳이 관계에 ‘이해’가 필요할까?

그저 감사함과 미안함만 잘 전할 수 있으면 충분하지 않을까.


말없이 서로를 있는 그대로 느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만하다.


“언젠가는 이해해 줄 거야.”

이 말도 어쩐지 일방적이다.


때로는 틀릴 때도 있고,

갈등이 생길 수도 있다.

굳이 이해하지 않아도 괜찮다.


자꾸 이해하려 들면,

이해하고 싶은 마음이 상대를 내 관점 안에 가두게 된다.


물론, 이해하려는 노력이 마음을 성장시킬 때도 있다.

그건 자신의 입장을 완전히 내려놓고,

“상대가 왜 이렇게밖에 할 수 없었을까”를

조용히 물을 수 있을 때다.


하지만 착하고 싶고,

자기를 이해시키고 싶은 에고에게

입장을 내려놓는 일은 작은 죽음과도 같다.


즉, 쉽지 않다는 말이다.


그럴 때 내가 쓰는 방법은 하나다.

이해하려 애쓰기보다,

상대의 프레임에서 벗어나 감사하기.


마음이 어지러우면 맛있는 걸 해먹고 감사할 거리를 찾는다.

화가 나면 한숨 자고 일어나, 또 감사할 거리를 찾는다.

그래도 힘들면 운동을 다녀와 땀을 잔뜩 흘리고, 다시 감사할 거리를 찾는다.


그렇게 하다 보면,

다른 잡념은 사라지고

건강하고 행복하며

심지어 예뻐 죽겠는 나만 남는다.


이해는, 공부할 때만 잘 하면 좋을 일이다.


#마음공부 #사람공부 #감사가만병통치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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