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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올빗ORBIT Apr 18. 2020

흑점

 태양흑점은 태양활동의 대표 현상이다. 흑점과 주변 지역은 자기활동이 활발해서 활동영역이라고 부른다. 흑점이 많아질수록 지구가 받는 태양 에너지는 많아지며 적어지면 그 반대가 된다. 그 주기는 11년. 11년마다 네가 나에게 왔다. 뜨겁고도 차갑게.


 열한 살의 사월 초 팔일, 구인사에 공을 들이러 갔다. 엄마가 무엇을 빌기 위해 그토록 열심히였는지는 모른다. 구인사는 집에서 기차로 네 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에 있었다. 열한 살에게 네 시간은, 그리고 제한된 장소는 억겁과도 같다. 더군다나 어딜 가든 가만히 있지를 못하는 성미의 나는 덫에 걸려든 야생동물 같은 꼴로 기차 복도와 화장실을 쏘다녔다. 여기서 나가면 탑으로 곧장 달려가야지. 그리고 얌전한 척 보살들을 따라 탑돌이를 해야지. 보살들에게 잘 보이면 절간 생활이 편해진다. 다년간의 동자승 생활로 체득한 사실이다. 나는 1년에 한두 번은 동자승이 되었다. 기억이라는 게 생기고 나서부터 의무처럼 해오던 일이라 파르라니 깎은 머리가 편했다. 머리를 깎고 나면 정말 스님이 된 것처럼 만사에 욕심이 사라졌다. 온 데를 할퀴고 지나가는 아토피처럼 자꾸만 덧나던 조급증과 짜증, 울분 같은 것도 누그러들었다. 승객들은 까까머리에 승복을 입은 나를 귀여워했다. 군것질거리를 손에 쥐어주고 시답잖은 말을 걸고 머리카락 씨만 뿌려진 민둥한 머리를 만져댔다. 그들에게도 무궁화호 기차의 느린 시간은 지루했음이다. 물론 모르는 이가 머리를 쓰다듬는 것 불쾌했다. 사탕 쪼가리라도 지불하지 않은 인간들에게는 모종의 복수를 했는데 복수의 내용은 비밀로 하기로 한다. 엄마는 한 번도 눈치챈 적이 없으니까. 그렇게 기차의 첫 칸과 끝 칸을 모두 섭렵하고 지쳐서 까무룩 잠이 든다. 식은땀을 흘리며 잠투정을 하면 엄마는 엄한 얼굴로 나를 깨워 등에 업었다. 드디어 도착한 것이다. 바깥의 공기는 달고 시원했다. 무르익은 봄의 향기가 산 전체에 탐스럽게 고여 있었다. 엄마가 나를 길에 내려주자마자 탑으로 달려갔다. 탑돌이를 하고 있는 사람들의 진중한 표정은 지금에 와서도 도무지 해석 불가해한 영역이다. 무엇을 비는 걸까. 엄마도 매번 절에 와서 무엇을 비는지 모르겠다. 누구에게 빌어야 하는지도 모르면서. 다만 탑에 새겨진 얄궂은 지옥의 풍경들을 들여다보는 것은 좋았다. 벌거벗은 인간들이 큰 솥에 담겨 보글보글 삶기고 뿔과 송곳니가 돋은 몬스터들의 창에 꼬치처럼 꽂혀 괴로워하는 무간지옥. 지옥도가 펼쳐지는 그 구간을 몇 번이고 되짚었다. 정신을 못 차리고 선정적인 지옥에 홀려 구석구석을 읽어가던 그때, 아이를 처음 만났다. 지금도 또렷이 기억이 난다. 삼백안의 눈이 가만히 노려보던 순간을. 아이의 발치에 나뭇가지로 그려진 지옥도와 뻐꾸기의 천연덕스러운 울음소리, 잡목들로부터 기어나오던 피톤치드 냄새 같은 것들도 말이다. 일곱 살 치고는 정교했다. 아니, 이렇게 기억한다면 그것은 날조다. 흙땅에 아무렇게나 그려놓은 그 그림들은 법당의 탱화보다 세밀하고 아름다웠다. 


 이름이 홍염이라는 사실은 아이를 만나고 한참 후에야 알게되었다. 조숙하고 새치름한 불꽃. 아이는 부모가 없었으나 이름을 준 이가 절에 있었다. 공양채에 머무는 보살들이 흘리는 이야기로 홍염의 부모 중 부는 그 젊은 스님이 확실한 듯했다. 홍염이 오기 전 구인사의 아이돌은 나였으나 이제 모든 루머와 가쉽, 관심의 중심에는 걔가 있었다. 내가 아무리 죽 끓듯 변덕을 부리고 절 곳곳에서 사고를 치고 다녀도 홍염의 타고난 재능과 그 주변에 관한 외설스러운 호기심을 따라잡기에는 무리였던 것이다. 나는 그 때가 사춘기였다고 변명하고 싶지 않다. 보호자와 함께 몰려온 또래들을 꼬드겨 홍염의 그림들, 몇 가지 없는 소지품, 아무튼 걔가 관심을 쏟을 만한  모든 것을 부수고 없애버렸다. 영악하고 악독한 괴롭힘에 주지스님마저 고개를 저었을 망정 홍염은 끄덕도 없었다. 이글거리는 안광으로 나를 몇 번 흘겨보고는 그 뿐이었다. 홍염은 그런 종류의 의연함으로 절간 사람들을 자신의 편에 세웠다. 때로는 저속한 연민도 부러 사면서. 장담컨데 홍염은 몇 살 차이 어림도 없다는 듯 내 머리꼭대기에 앉아 있었던 것이다. 미운 일곱 살. 홍염은 내가 이제껏 모르던 감정들을 많이도 일러주었다. 열등감과 안달, 애타는 감정과, 갈망, 집착. 홍염은 처음으로 열한 살의 나에게 감정의 바닥과 그것에 갇히는 것이 진짜 지옥이라는 것을 모조리 알려 준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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