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이 망가지면, 마음도 같이 망가지더라.
코로나 후유증으로 일상은 속수무책으로 폐허가 되고 있었다.
호흡이 힘들어서 마스크를 쓰고 있기가 어려웠다.
당시에는 무조건 마스크를 써야 했던 시기였기에 어쩔 수 없이 휴직을 선택했다.
결국 여러 가지 후유증을 동반하던 나는, 당시 60대였던 부모님보다 더 신체능력이 저하되고 말았다.
내 신체가 늙어버린 걸 가장 먼저 깨닫게 된 순간은 횡단보도 앞에서였다.
일반적인 횡단보도의 초록불이 그렇게 짧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예전 같아서는 성큼성큼 큰 걸음으로 몇 번 뛰어가면 초록불이 깜빡이기도 전에 횡단보도가 끝나있곤 했다.
하지만, 호흡이 가빠지고 조금만 빨리 걸어도 식은땀을 흘리던 나에게
이젠 횡단보도가 나타날 때마다 하나의 거대한 숙제처럼 느껴졌다.
굽은 허리로 횡단보도를 걸어가는 노인분들이 그들이 원해서 빨간불이 되도록 걸어가는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횡단보도 사이에 놓인 노인분들을 위한 의자가 어떤 배려인지, 그제야 깨달을 수 있었다.
저 횡단보도를 제 속도에 건널 수 있을까?
사지 멀쩡한 사람이 초록불이 깜박여도 느긋하게 걷는 모습을 보면 운전자들은 나를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나는 이제, 보통 사람이 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제대로 못하는 사람이 되어버린 것일까?
횡단보도를 하나 건너지 못할 뿐인데, 머릿속에선 수많은 상념들이 떠오르고 있었다.
당시에는 코로나 후유증이 언제까지 지속될지 알 수 없었기에 이러한 증상들을 평생 안고 가야 하는 것인지도 불확실한 상태였다.
신체능력이 다음 주, 다음 달 괜찮아질지, 아니면 영영 괜찮아지지 않는 것인지는
나도, 의사도 아무도 알지 못하던 시기였다.
그런 미래에 대한 불안은 정신적인 좌절과 우울감으로 이어졌다.
당시 내가 느꼈던 가장 무서웠던 증상 중 하나는 인지 저하였다.
평소 즐겨 시청하던 이동진 영화평론가가 나오는 영상을 볼 때였다.
유난히 그분의 말이 빠르게 느꼈다.
단순히 빠르다에서 벗어나 말이 빨라 이해하기가 어렵게 느껴진다는 것이 혼란스러웠다.
한 번도 그래본 적 없는 나는 말을 알아듣지 못해서 몇 번이나 일시정지를 하고, 10초 전, 30초 전으로 영상을 되돌리고 또 되돌렸다.
결국 하나의 영상을 보는데, 재생시간보다 두세 배 이상의 시간이 걸리곤 했다.
보건소에서 지원하는 인지저하 검사를 받고 싶었지만, 65세 이상의 노인만 검사를 받아볼 수 있다고 했다.
검색 끝에 당시 유행처럼 생겨나던 코로나 후유증 센터라는 이름을 내건 2차 병원에 도착했다.
나는 열심히 내 증상에 대해서 설명했다.
평소에 보던 영상들이 너무 빠르게 느껴져서 일상생활이 어렵다고 토로했다.
그때 내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던 의사가 되물었다.
“혹시 그분들이 말을 빠르게 한건 아닐까요?”
지금의 나라면
'하하, 그러게요. 그럴 수도 있겠네요.'라며 웃어넘겼겠지만 당시의 나는 충격을 받았다.
내 고통을 병원의 의사에게까지 인정받지 못하는 기분이었다.
정신과를 다니고 있는 게 천만다행이었다.
다행히 정신과에 갈 때마다, 이런 상태에 대해 설명했다.
덕분에 나는 나의 신체능력저하와 그에 따른 좌절과 상실감을 고백할 수 있는 사람이 생긴 것이었다.
선생님이 해주신 가장 큰 일은 공감이었다.
코로나 후유증 증상 중 하나로 우울감이 생길 수 있을 뿐 아니라 신체 능력이 저하됨에 따른 우울은 충분히 있을 수 있다는 말에 안심이 되었다.
일주일에서 이주일에 한번, 15분이 남짓한 그 시간 동안
나는 그 사이 있었던 슬프고 혼란스러운 일들을 쏟아내며 하루하루를 버텨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