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식하게 걷다
갑자기 불현듯 생각이 들었다.
회사에서 집까지 걸으면 얼마 정도 걸릴까? 네이버 지도에서는 약 3시간 20분이 소요된다고 하는데 그게 정말 맞을까?
궁금한 게 생기니 근본 없는 오기가 생겼다.
날도 풀렸고 배도 부르니 걸을 만도 한데 한번 걸어보자는 객기로 그렇게 시작되었다.
시작은 논현역에서 학동역 사이로 걸어가 학동사거리를 지나 영동대교로 걸어갔다. 그 길의 건물은 그 어느 곳보다 높다랗고 화려하면서도 특이했다. 제각기 제 잘난 맛을 뽐내는 공작새처럼 어느 것 하나 같았던 건물이 없었던 그 거리는 건물의 크기만큼이나 걷는 인도로 넓었어 걷어 가는 사람들과 맞추질 이유가 없었다. 대신 워낙에 넓은 인도이다 보니 차들로 인해 걸음이 멈추는 경우가 있었다.
그렇게 넓고 높은 건물은 보통 자동차 전시장이거나 병원이었고, 아님 고급 음식점이 대부분이었다. 거기 앞에 있던 사람들은 어디서나 보이던 사람이었지만 그곳에 있던 차는 어디서나 볼 수 없었던 외제차들이 대부분이었다. 사람보다 차가 많았던 그 길을 걸어가며, 사람의 냄새를 느낄 수 없었던 길이 아쉬웠다.
강남과 강북을 잇는 서울의 여러 대교 중 강남구와 광진구를 잇는 영동대교를 건넜다. 자전거도 여럿 지나가고 차가 양옆으로 다녀서 공기가 좋진 않았지만 그래도 눈앞에 펼쳐진 야경은 어느 곳보다 좋았다. 찰랑찰랑 거리는 도토리묵 같은 한강물에 도로에서 비치는 불빛이 흔들려 고흐의 별 헤는 밤 못지않는 운치를 드러냈다. 낮의 매캐한 미세먼지가 어둠에 가려서 보이지 않으니 낮보다 밤이 좋은 다리였다.
영동대교 이후 노룬산시장을 지나 광진구를 걷는 길은 강남구와는 다소 달랐다. 7호선이 통과되는 도로 바로 옆 블록으로 차들이 중심으로 다니는 길이다 보니 사람도 상가도 거의 불이 꺼진 거리였다.
6킬로가 넘는 길을 그냥 기분 따라 걷다 보니 슬슬 화장실이 급하기도 해서 광진구의 개방형 화장실을 찾았지만 열쇠로 잠겨져 있었다. 부득이하게 병원 1층에 위치한 화장실을 이용했지만 개방형 화장실이 그대로 유지되지 못한 게 아쉬웠다.
상가의 불도 꺼지고 흔하디 흔한 커피숖도 눈에 보이지 않는 거리였지만 철재나 자동차 광택, 거기서 우연히 발견한 <칠만표 방수제>의 본사. 경향하우징페어에서 매번 보기만 했던 그 회사가 여기에 있다니. 반가운 마음에 한 번 더 바라보며 다시 걸었다.
드디어 중랑구를 알리는 반가운 안내판에 발걸음이 가벼워지는 듯했으나 실상은 2시간 넘게 쉬지 않고 걷기만 해서 다리는 이미 풀린 상태였다. 함께 걷던 이가 중간 이후부터는 버스를 타자고 꼬셨지만 일생의 한 번이다!라는 택도 없는 객기를 부려서 결국은 상봉역까지 도착했다.
논현역에서부터 상봉역까지 약 14킬로를 3시간 40분 만에 걷긴 했다. 정말 무식하게 걷기만 했다. 휴식시간이라고는 화장실 간 시간이 고작이었으니 무리였다고 할 수 있다.
무식하게 걸어버린 결과 허벅지와 종아리 근육통과 발바닥에 물집이 잡혀 버렸고, 허리에도 통증이 생겨버렸다. 밤에 자기 전에 심장보다 높게 다리를 올려 잤지만 이틀이 지나도 그 통증은 사라질 줄 몰랐다. 보통 많이 걸어봤자 2-3km였는데 주말도 아닌 평일 근무 후 14km는 확실히 무리였다. 쉼 없이 걸었던 어느 봄날 밤의 후유증은 몇 날 며칠을 갔지만 그래도 그날 함께 걸었던 그 풍만한 마음은 좋기만 했다. 몸은 힘들었지만 마음만은 개운한 느낌이랄까.
이번 걸음을 통해 알게 된 걷기의 필요 요소
1. 3-4km마다 일정 시간 쉬어야 한다.
2. 물이나 당분의 보충은 필수
3. 힘들다 싶으면 포기도 하자.
이제부터 시작이다. 일생의 한 번뿐이라고 했지만 시작이 힘들지 또 하기 시작하면 쉬워지는 게 또 걷기니까. 이제부터 조금씩 무리하지 않고 걸으려 한다. 걸음의 결과는 나아~~~중에 공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