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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꾹꿍 Feb 09. 2016

타인에 대한 이해

난임을 통해 배운 것

    

난임은 분명 힘든 경험이다. 끊임없이 절망하고, 이상적인 나와 현실의 나와 벌이는 전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임이라는 시간을 겪으면서, 나는 많은 것을 배웠다. 무엇보다도 다른 사람들을 더 이해하게 된 거 같다. 오직 나라는 사람에게만 집중하고 아파하고 슬퍼하다가 어느덧 주변을 둘러보니 나만 아픈 것이 아니었다.  

     

  예전에 철없던 시절 ‘왜 저 사람을 저럴까? 나라면 이렇게 할텐데’ 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그야말로 함부로 타인을 평가했다. 그리고 둘, 셋만 모여도 남을 험담하기 일쑤였다.

그런데 지금은 아니다. 저 사람이 저러는 데는 분명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라면 이렇게 할 텐데’라는 말을 함부로 안 한다. 나 또한 난임을 겪지 않아 본 사람이 ‘마음을 편하게 먹어라. 그건 해봤니.’라고 말할 때 상처를 받는다.


나에게 도움이 되기 위해 말한 것이겠지만 나에게 숱하게 상처가 되었던 말들. 그러니 무슨 일을 겪든 내가 겪어보지 않은 일에 대해서는 함부로 주변에서 들은 이야기를 조언인 줄 알고 이야기 하지 않는다.

그 종류가 나와 같은 것일지라도, (예를들어 난임을 겪는 사람) 나와 너의 이야기는 다르다. 처해진 환경, 모든 것이 다 다르다. 그래서 완벽하게 다른 이야기이다.

나보다 난자 채취도 잘되고, 이식의 기회가 많다고 해서

그래도 네가 나보다는 낫지 않니.’ 라는 말이 전혀 위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내 입장에서 상대방을 바라보기보다, 그 사람이 되면 어떨까 라고 상상해 본다. 그러면 적어도 내 입장에서 바라볼 때보다는 더 상대방을 이해 할 수 있다. 그 사람에게 상처가 되는 말은 피할 수가 있다.      

얼마 전에 아이를 낳고 복직한 후배에게 ‘아이 낳고 뭐가 가장 달라졌니?’라고 물어보니 그 아이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했다.

“사람들을 더 이해하게 됐어요. 예전에는 이해 못할 일들이 지금은 다 이해가 되요. 내 아이가 너무 소중하다 보니 사람들 한명 한명이 누군가의 소중한 자식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렇게 대답하는 모습이 참 예뻐 보였다. 인간미가 느껴진다고나 할까.

아무리 어려도 엄마가 된 사람은 느낌이 다르다. 확실히      


 때로는 나의 ‘난임’상태가 고마울 때가 있기도 하다. 왜냐하면 내가 무언가 잘 안 되는 일을 겪는다는 것은, 누군가와 벽을 무너트리는 완충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아프지 않은 사람은 절대 아픈 사람을 이해할 수 없다. 꽁꽁 숨겨놨던 내 이야기를 풀어놓는 순간 그 사람과 나와의 벽은 사라지면서 그 사람도 무장해제를 선언한다.     

 


일전에 소개했던 영화/책 '와일드'에서 셰릴은 엄마를 잃는다. 엄마가 인생의 구심점이었던 셰릴은 정신을 못차릴 만큼 슬퍼하는데 너무도 사랑했던 남편 폴로 부터 위안을 받지 못하자 서로 헤어지게 된다.

(영화에서는 왜 셰릴이 바람을 피고 남편을 떠났을까가 궁금했다. 책에서 그 이유를 찾았다.)

' 폴도 가끔은 나와 함께 울면서 아주 조금이라도 위로를 해주고자 애썼다.

  그럼에도 그의 말들은 그저 공허할 뿐이었다. 이런 상실감에 대해 그가 무엇을 알고 있단 말인가?

  우리 사이의 관계와 그의 자랑스럽고 문제없어 보이는 인생이 내 고통을 더 가중시키는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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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행복해보인다. 너는 걱정없어 보인다.’라고 하면서 본인은 힘들고 아프다. 라고 한다면 나는 슬며시 ‘난임’카드를 꺼내든다. 나도 너만큼 아프다고. 때로는 내 ‘난임’카드가 꽤 쓸모있다고 느껴진 때가 있다.

종류는 다르지만 나도 아픈 곳이 있다는 것을 공감하는 것 자체가 '나만 힘든게 아니구나'라는 위로를 주는 것 같다.


최근에 알게 된 시를 하나 소개하려 한다.  

   


슬픔이 기쁨에게 (정호승)

     

나는 이제 너에게도 슬픔을 주겠다.

사랑보다 소중한 슬픔을 주겠다.

겨울 밤 거리에서 귤 몇 개 놓고

살아온 추위와 떨고 있는 할머니에게

귤값을 깎으면서 기뻐하던 너를 위하여

나는 슬픔의 평등한 얼굴을 보여 주겠다.    

 

내가 어둠 속에서 너를 부를 때

단 한 번도 평등하게 웃어 주질 않은

가마니에 덮인 동사자가 다시 얼어 죽을 때

가마니 한 장조차 덮어 주지 않은

무관심한 너의 사랑을 위해

흘릴 줄 모르는 너의 눈물을 위해

나는 이제 너에게도 기다림을 주겠다.

이 세상에 내리던 함박눈을 멈추겠다.


보리밭에 내리던 봄눈들을 데리고     

추워 떠는 사람들의 슬픔에게 다녀와서

눈 그친 눈길을 너와 함께 걷겠다.

 슬픔의 힘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기다림의 슬픔까지 걸어가겠다.


아래 시를 보며 한참을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기쁨을 느끼기 위해서는 슬픔을 알아야 한다는 내용이다. 겨울 밤 추위속에서 귤을 파는 할머니에게 귤값을 깎으며 기뻐하는 너에게도 슬픔을 주겠다. 무관심한 너의 사랑, 흘릴 줄 모르는 너의 눈물을 위해 똑같이 슬픔을 주겠다는 내용. 슬픔을 알아야 한다는 것은 결국 타인을 둘러본다는 것이다.


영화 인사이드 아웃의 슬픔이 기억난다. 슬픔은 우리에게 꼭 필요한 감정이었다.        

같이 위로하며 살아가는 힘을 준다.


   모두 행복해보이는가? 자기연민에서 벗어나 주위를 둘러보자. 다들 애쓰며 살고 있다.

그저 아픔을 같이 공감해 주는 것. 들어 주는 것. 같이 있어 주는 것. 결론은 늘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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