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한 줄기가 창문 틈을 비집고 들어온다. 서늘한 기운이 공간을 채우고, 그 안에는 먼 곳을 지나온, 낯설고도 친숙한 냄새가 섞여 있다. 바람 속에서 무엇인가 기다리고 있다는 감각이 스며든다. 구속의 여정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단번에 도달할 수 있는 목적지가 아니라, 존재가 서서히, 천천히 다가오는 것이다. 마치 바람처럼, 우리가 준비될 때까지 조용히 몸을 움츠리고 있다.
구속과 구원은 실체가 없다. 그 의미는 언어로 정의할 수 없는 영역에서 끊임없이 변형된다. 우리가 말할 때마다, 한 발짝씩 멀어진다. 그것은 말할 수 없는 무엇인가를 향해 다가가려는 조심스러운 발걸음이다.
믿음이라는 말도 마찬가지다. 믿음은 결단이나 확신이 아니라, 이해할 수 없는 것에 나를 맡기는 일이다. 믿음은 나를 잠시 고요하게 만들며, 때로는 겸손한 손짓으로 세상을 움직인다. 말보다 먼저 다가오는 감정이며, 그 속에 담긴 진실이 결국 우리가 나아갈 길을 인도한다.
어느 날, 왕이 허름한 옷을 입고 사람들이 알어채지 못하게 성곽을 둘러보고 있었다. 잡초는 무성하고, 초가집은 커녕 판자로 만든 그늘 아래에 앉아 있는 사람들. 성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들, 백성들이 신음하고 절망하는 소리의 진원지였다. 지옥과도 같은 이 거리에는 나병환자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한 사람을 제외하고. 나병환자의 손을 잡고, 헐벗은 자에게 옷을 건네는 한 여인이었다. 환자들을 안아주고 위로하던 여인에게 왕은 다가간다. 그리고 속삭인다. “당신이 이 나병환자들, 연약하고 외면받는 사람들에게 섬긴 것이 곧 나, 왕에게 충성한 것과 다름 없습니다. 당신의 신실함과 충성됨을 잊지 않겠습니다.“
고대 근동 지방의 마태 공동체에서 입으로 전해진 이 이야기는 단순한 도덕적 교훈만을 주지 않는다. 그것은 ‘진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묻는 질문’에 대한 응답이다. 빈 골목을 홀로 걷다가, 불 꺼진 창문 사이로 지나가는 어렴풋한 눈빛을 마주친 순간처럼. 그 눈빛 속에서 무언가가 전해진다. 우리는 종종 거대한 세상의 ‘진실’을 좇지만, 더 가까운 곳에 우리가 쉽게 지나칠 수 있는 순간들이 깊은 의미를 품는다.
이런 순간들이 모여, 진정한 해방의 의미가 서서히 드러난다. 길을 잃은 자에게 손을 내미는 것처럼, 아무 생각 없이 마주치는 일상 속에서 발견된다. 믿음이 그것을 이끌 수 있을까? 그 모든 여정은 한 가지 형태로 정의될 수 있을까? 질문들이 마치 돌처럼 단단하게 느껴지지만, 실제로는 떨리는 호수의 표면처럼 변하기 시작한다. 바람이 불면 물결은 흩어지고, 햇살에 따라 물빛이 변한다. 모든 것은 매 순간 다르게 해석되어야 하는 상징적인 과정이다.
어떤 날에는, 억압당하던 집단이 긴 세월을 지나 마침내 자유를 찾아가는 여정처럼 다가온다. 지도에서 사라졌던 이름들이 다시 불려지고, 울지 못했던 이들이 처음으로 소리 내어 울 때. 또 다른 날에는 병든 몸이 서서히 회복되거나, 닫혀 있던 마음이 열리기 시작하는 순간이 다가온다. 작은 순간들이 아무리 큰 선언보다 더 큰 위로를 주기도 한다. 그것은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서로 다른 이야기들이 겹쳐지며 태어나는 장면이다. 그것은 하나의 답이 아니라, 여러 개의 조용한 응답들이다. 그 응답 속에서 우리는 다시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종말. 종말은 자주 ‘끝’이라 여겨지지만, 사실 그것은 아직 다 이루어지지 않은 열린 기다림이다. 종말은 우리가 예상할 수 있는 어떤 고정된 질서가 아니라, 알지 못하는 방식으로 다가오는 가능성이다. 마치,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별이 떨어질지 모른다고 믿는 감정처럼. 그 별이 떨어질지 아닐지는 알 수 없지만, 그 가능성 자체가 세상을 새롭게 보이게 한다. 종말은 우리가 알고 있는 질서 너머에서 펼쳐질 전혀 다른 이야기의 예고편일 수 있다.
믿음은 가능성을 열어두는 감정이다. 정답을 아는 사람이 아니라, 모르는 것을 감당하려는 사람에게서 나오는 감정이다. 논리가 아니라 시와 같이, 계획이 아니라 응시처럼 다가온다. 흔들리고 다시 일어나는 과정 속에서 비로소 모습이 드러난다. 우리는 신이라는 말보다도, 말의 여백 속에 남아 있는 침묵을 더 가까이 마주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침묵 속에서 우리는 새로운 시작을 향해 걷는다. 첫걸음은 보이지 않는 바람 속에서, 사라지는 그늘에 기대어 한 발짝을 내딛는 순간과 같다. 길을 걷는 동안, 빛은 점점 더 희미해지고, 오히려 어두운 곳에서 더 많은 것들이 반짝이는 듯한 느낌을 받을지도 모른다. 어두운 길에 떠도는 불빛이 진실의 답이라 믿고 가는 것이 아니라, 그 불빛은 단지 길을 밝혀주는 시도일 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 불빛 속에서, 완전함을 찾는 사람은 없다. 오히려, 어두운 길 끝에서 무언가가 살아 움직이고 있다고 느낀다. 우리는 깨닫는다. 그 길이 우리가 찾고자 했던 진정한 해방의 모습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그 여정은 언어로 설명할 수 없는 곳, 형상으로 그릴 수 없는 곳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믿음은 그저 우리가 그 길을 가는 데 필요한 불확실성일 뿐이다. 우리가 믿어야 한다는 사실보다, 믿음이 그 길을 걷게 만든다.
길 위에서 마주하는 고요한 침묵 속에 우리는 점점 더 많은 질문을 품게 된다. 길 끝에서 마주한 건 결국 ‘모름’이다. 그 ‘모름’ 속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자신을 묻고, 더 깊은 곳을 향해 나아가려는 의지만을 알게 된다.
끊임없는 물음과 대답이 충돌하며, 끝없이 나아가는 과정이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각자의 길을 따라 가면서도 결국에는 무엇 하나 확정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끝내 잡을 수 없을지라도, 불확실한 빛에 가까워져가며, 하나의 여백 속에서 존재한다는 감각을 느낀다.
바람을 볼 순 없지만, 우리는 느낄 수 있다.
그것은 말로 설명될 수 없다. 움직이는 언어의 빈자리를 느끼고, 그 안에서 조용히. 빈자리를 향해 말을 던지지만, 그 말은 결코 다가오지 않는다. 그때야 우리는 알게 된다. 그 자리가 바로 진정한 자리이며, 이곳에 머무르는 자체가 우리가 찾아 헤맸던 상태라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