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정신학과 하이데거적 존재 사유
언어는 언제나 빛을 닮았다.
무언가를 비춘다는 점에서.
하지만 그 빛은 언제나 대상 위에 떨어지기 전에,
이미 그림자를 동반한다.
긍정신학(cataphatic theology)은 말의 신학이다. 신을 이름 붙이는 시도, 신의 속성을 긍정적으로 규정하는 언표들의 향연.
전능하신, 전지하신, 선하신…
인간이 가진 모든 최상급 형용사가 신을 향해 봉헌된다.
이는 마치 캄캄한 방에서 촛불을 켜며 말하는 것과 같다 — “여기 있다”라고.
그러나 부정신학(apophatic theology)은 그 촛불조차 끈다. 그리고 말한다 — “여기 없음을 말해야 한다”라고.
신은 이름 지을 수 없고, 다가갈 수 없으며, 말할 수 없다.
언어가 닿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신이 아니다.
여기서 부정신학은 하나의 부정변증법을 품는다.
신의 ‘부정성(negativism)’은 단순히 ‘신은 이것이 아니다’라는 도식적 부정보다 깊다.
그것은 존재 그 자체의 구조에 대한 근본적 의문이다.
언어는 끊임없이 지시하지만, 그 기표는 언제나 미끄러진다.
‘신’이라는 말은 오히려 신의 부재를 증명하는 기호가 된다.
그런데도 우리는 말한다.
언어는, 기표는, 여전히 작동한다.
이 긍정성 — 말할 수 있다는 가능성, 신을 언어로 소환하려는 인간적 욕망 — 이 바로 하이데거가 『존재와 시간』에서 비판한 형이상학의 ‘잊혀진 존재’에 대한 구조와 겹친다.
여기서 잠시, 하이데거가 말하는 ‘존재’와 ‘존재자’를 떠올려보자.
존재자는 ‘나무’나 ‘사람’ 같은 개별적인 사물들이다.
존재자는 우리가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들, ‘존재한다’고 말하는 대상들이다.
그런데 존재는 무엇인가? 그것은 마치 바닷물과 같다.
존재자가 바다 위에 떠있는 배라면, 존재는 그 바다 자체, 배를 받쳐주는 숨겨진 바닥 없는 심연이다.
하이데거는 기존 형이상학이 이 바다를 잊고, 오직 배(존재자)만을 말해왔다고 지적한다.
형이상학(metaphysics)은 전통적으로 존재자를 분류하고 이름 붙이며, 그 특성을 분석하는 ‘지도 제작’의 작업이었다.
하지만 하이데거에게 형이상학은 너무 ‘명료함’을 추구하다가, 존재의 ‘어둠’을 잃어버린 ‘빛 공해’ 같은 것이었다.
존재론(ontology)은 그 ‘바다’ 자체를 묻는 질문이다 —
“이 바다는 왜 여기 있는가? 우리는 왜 이 배 위에 떠 있는가?”
이제 부정변증법(negative dialectics)을 은유로 풀어보자면,
그것은 마치 어둠 속에서 촛불을 켜려다 촛불을 끄는 행위다.
촛불을 켜려 애쓰는 동안, 빛은 그림자를 만들지만,
결국 그 빛을 꺼야만 어둠의 본질이 드러난다.
신의 부정성은 바로 이 어둠이다. 말하지 않는 그 무엇.
하지만 인간은 그 어둠을 두려워하면서도, 말이라는 빛으로 신을 소환하려 한다.
그 소환의 욕망이 바로 언어적 긍정성(positivism)이다.
이 긍정성은 단순한 언어의 힘만이 아니다.
이는 또한 실증주의적 존재론과 인식론과 깊게 연결되어 있다.
즉, 우리가 오랫동안 당연시해온 뉴턴적 세계관,
‘측정 가능하고, 계산 가능하며, 명료한 대상만이 실재다’라는 과학적 실증주의의 패러다임이다.
그 패러다임 안에서 세계는 마치 기계처럼 작동하는 ‘존재자’들의 총합이었고,
‘존재’ 자체의 심연은 잊힌 채로, 오로지 보이는 것만이 진실로 인정되었다.
그러나 오늘날, 이 실증주의적 세계관의 한계는 더 이상 숨길 수 없는 현실이 되었다.
기계적이고 환원적인 이성의 지평 너머에는 해석학적이고 실존주의적인 부정성(negativism)의 심연이 필요하다.
우리가 다시 마주해야 할 것은 ‘존재’의 어둠, ‘신’의 침묵, ‘구원’의 모호함이다.
그것은 정량화될 수 없고, 언어로 완전히 포획될 수 없는 깊이이다.
따라서 우리는 신학, 형이상학, 존재론, 그리고 구원론을 다시 써야 한다.
기존의 언어를 벗어나, 말하지 않는 것들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것은 ‘존재’라는 바다 위에 떠 있는 배를 내려놓고,
바다의 깊이를 온몸으로 느끼는 일이다.
부정신학적 하이데거는 우리에게 묻는다.
빛과 어둠이 공존하는 이 세계에서,
우리는 어디에 서 있는가?
말과 침묵 사이의 경계에서,
존재의 심연을 마주할 준비가 되었는가?
신은, 어쩌면 그 심연 너머에서
여전히 말을 걸어오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