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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의 시대와 노르웨이의 숲
그리고 서른 즈음에

상실

by 소소한마음씨

1980년대 후반, 무라카미 하루키는 소설 《상실의 시대》에서 한 세대가 겪었던 혼란과 방황을 섬세하게 그려냈습니다. 당시의 젊은이들은 무엇인가를 잃어버린 채 표류하고 있었고, 분명한 방향도 찾지 못한 채 불확실한 미래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로부터 수십 년이 지난 지금, 그리고, 오늘, 한국 사회 역시 커다란 혼란 앞에 서 있습니다. 2025년 4월 4일, 오늘을 앞두고 사회는 극명하게 양분되었으며, 사람들은 각자의 정의를 외치며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 채 충돌합니다. 저마다 자신이 믿는 것들을 근거 없이 확대 재생산하며, 다른 가능성에 대해서는 생각하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지금의 한국은 보편적 가치도, 어제의 상식도, 옳고-그름편 가르기 앞에서는 의미를 잃습니다. 과학도 사회적 합의도 없습니다. 티끌 같은 권력도 자신의 주머니를 채우기 위해 마구 휘두르며, 상식도 원칙도 없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어제까지는 비상식적인 일들이 내편이 그랬다고 하면 옹호할 만한 일이 되기도 합니다. 익명성의 방패뒤에 숨어 타인을 비난하는 것을 서슴지 않습니다. 나와 같지 않다면 용서도 관용도 없습니다. 그저 배금주의, 이기주의, 외모지상주의 그리고 그 외의 정신적 가치의 상실, 어쩌면 우리는 지금 다시 한번 ‘상실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처럼 시대를 관통하는 ‘상실’이라는 주제는 과거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것은 여전히 우리 안에 존재하며, 우리가 삶의 방향을 잃고 표류하게 만드는 현실 그 자체입니다.


32485895617.20220527043746.jpg 상실의 시대저자무라카미 하루키

오늘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책 《상실의 시대》(노르웨이 숲)에 관한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꺼낸 것은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무엇보다 우리가 마주한 개인적·사회적 ‘상실’이라는 문제 때문입니다. 삶의 소소한 기쁨들, 아이를 키우는 잔잔한 행복, 타인에 대한 존중과 양보, 삶의 긍지, 직업에 대한 자부심, 사회의 일원으로 기여하는 것의 기쁨, 사회적 규칙과 질서, 미래를 향한 희망과 같은 열거하기조차 힘든 수많은 정신적 가치들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경험하는 이 상실의 시대는, 약 40년 전 하루키가 《상실의 시대》에서 깊이 있게 탐구했던 그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하루키는 소설을 통해 “우리는 살아가면서 무엇인가를 상실한다”는 주제를 지속적으로 탐구합니다. 주인공 와타나베 토오루는 사랑하는 사람들의 죽음과 이별, 그리고 청춘의 순수함이 소멸해 가는 다양한 형태의 상실을 겪으며 성장합니다. 특히 와타나베가 경험하는 친구 키즈키의 자살, 연인 나오코의 정신적 고통과 죽음, 미도리와의 관계에서 느끼는 불확실성 '삶이 본질적으로 상실을 수반할 수밖에 없음'을 상징적으로 나타냅니다. 소설을 통해 하루키는 상실을 받아들이면서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입니다.

삶은 본질적으로
상실을 수반한다.


특히 소설의 마지막 장면에서 와타나베는 "나는 대체 어디에 있는 걸까?"라는 혼잣말을 남깁니다. 방향을 상실한 이 감각이 어쩌면 지금 한국 사람들이 느끼는, 그리고 제가 느끼는 혼란스러운 현실과 꼭 닮아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소설의 결말에서 주인공은 상실 이후에도 다시 살아가고자 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절망이 아니라, 상실을 인정하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하루키 특유의 관조적 태도일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떠신가요?
어떻게 살아가고 계십니까?


저에게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가 그리는 상실의 감정은 김광석이 부른 노래 〈서른 즈음에〉를 떠올리게 만듭니다. 노래에서 김광석은 "점점 더 멀어져 간다"고, 살아간다는 것이 무언가를 끊임없이 잃어가는 과정임을 담담하게 이야기했습니다. 이것은 하루키가 소설 속에서 이야기했던 '상실'과 본질적으로 같습니다.


제 나이가 서른 즈음에 (사실 서른도 넘어서) 훈련소에 입소하여, 훈련을 마치고 불 꺼진 생활관에서 스피커를 통해서 이 노래를 들었던 순간이 다시 생각나기도 합니다. 아마도 가족과 친구들과 떨어져 통제된 군 훈련소였기에 상실의 감정을 더 절절하게 느낄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아마 그때 저는 알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

언제나 무언가를 떠나보내며,

빈자리를 품은 채 살아가는 과정이며,

우리는 그 자리를 무엇으로 채워야 할지,

늘 고민하며 살아간다는 것을요.


머물러 있는 청춘인 줄 알았는데,
비어 가는 내 가슴속엔
더 아무것도 찾을 수 없네.


김광석의 이 노랫말처럼, 우리는 청춘의 한가운데에서도 이미 무언가를 잃어버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지금 우리의 시대가 다시금 '상실의 시대'를 맞이하고 있는 건, 어쩌면 필연적 인지도 모릅니다.


상실의 시대를 다시 마주하는 지금, 우리는 하루키와 김광석이 던진 같은 질문을 떠올리게 됩니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이 질문 앞에서, 다시 한번 멈춰 서봅니다.


잠깐 사족을 붙이자면,


개인적으로 저는 한글판 제목인 《상실의 시대》를 일본 원제 《ノルウェイ の森 (노르웨이의 숲)》보다 더 좋아합니다. 물론 원제와는 느낌이 전혀 다르지만, 소설의 본질적인 메시지를 훨씬 명료하게 담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20여 년 전의 저에게, 제가 이 책을 처음 읽었던 그때, 결과적으로 《상실의 시대》라는 번역된 제목이 소설의 핵심을 더 잘 표현해 주었고, 그래서 지금도 이 제목이 더욱 와닿습니다.


다만 이 책의 원제 《노르웨이의 숲》은 비틀스(The Beatles)의 노래 〈Norwegian Wood (This Bird Has Flown)〉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작품 속에서 이 곡은 나오코가 특히 좋아하는 노래로 등장하며, 그녀와 와타나베 사이의 대화에서도 중요한 매개로 활용됩니다.


그렇다면 하루키는 왜 이 노래를 제목으로 선택했을까요?


아마도 비틀스의 노래 〈Norwegian Wood〉가 쓸쓸한 회상과 상실을 담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가사 속 화자는 한때 사랑했던 한 여인을 떠올리지만, 그 관계는 결국 지속되지 않고 공허한 기억만 남습니다. 이것이 소설의 주제와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와타나베는 과거의 기억과 상실을 곱씹으며 살아가고, 나오코 역시 행복했던 과거를 그리워하지만 현실에서 점차 멀어져 갑니다.


소설에서 나오코가 머무는 요양소 주변의 자연은 소위 ‘마의 산’으로 상징되며 그녀의 고립된 내면세계를 은유적으로 드러냅니다. 요양소는 현실과 격리된 또 다른 세계로 존재하며, 이는 ‘Norwegian Wood’가 주는 몽환적이고 고립된 느낌과 닮아 있습니다. 즉 《노르웨이의 숲》은 와타나베가 잃어버린 친구, 사랑, 순수함을 상징하는 공간이며, 기억과 상실 속에서 방황하는 인간의 내면을 함축적으로 담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 다른 한편으로 , ‘Norwegian Wood’라는 제목에는 다른 의미도 숨겨져 있습니다. (Norweigian woods가 되어야 '숲'입니다. 작가가 의도한 오역이고, 그 의미를 명확히 하지 않은 것조차 작가의 의도라고 합니다.) 가사 속에서 이 단어는 ‘가짜 목재(싸구려 합판)’라는 의미로도 읽히는데, 겉보기엔 아름답지만 실상은 허무하고 덧없는 감정을 암시하는 표현입니다. 와타나베, 부여잡고 있는 과거의 기억 나오코와의 관계가 이러한 '노르웨이 목재'와 같은 것이지요. 그리고 우리 역시 사랑과 삶의 순간 속에서 이런 허망함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노르웨이 나무
= 싸구려 합판

그럴싸해 보이지만
실상은 허무하고 덧없는 것


그리고, 오늘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 중에 하나는..


서로가 옳다고 굳게 믿으며 외치는 각자의 ‘정의’가 사실은 비틀스의 노래에 등장하는 ‘노르웨이산 목재(Norwegian Wood)’와 같은 것은 아닐까요? 겉보기엔 단단하고 아름다워 보이지만, 사실은 얇은 합판에 불과한 값싼 목재처럼, 각자의 정의 역시 그럴듯한 외형 아래 공허하고 덧없는 자기 확신에 불과한 것은 아닌지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옳다고 믿는 이 '정의'가 '진짜'인가,

아니면,

그저 그럴싸 해 보이는 '가짜'일뿐인가?


하루키가 오늘, 우리에게 던지는 또 하나의 질문은 바로 이것일지도 모릅니다.



책 이야기를 마저 하자면,


와타나베는 소설 내내 키즈키와 나오코의 죽음을 잊으려고 하지도, 그렇다고 완전히 지우려 하지도 않습니다. 그는 상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 방황할 뿐입니다. 소설은 결국 우리에게 이렇게 묻고 있습니다.


상실을 안고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여러분은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생각하셨습니까?


소설 마지막 부분에, 친구의 자살, 연인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와타나베가 미도리를 향해 나아가는 마지막 장면은 어쩌면 우리에게 필요한 메시지를 던져줍니다. 그것은 과거를 잊지 못해도 좋다는, 완전히 극복하지 못했어도 좋다는 위안입니다. 최소한 그 상실을 끌어안고 앞으로 나아가려는 결심만으로도 충분하다는, 하루키가 전달하는 따뜻한 위로가 아닐까 합니다.



상실을 끌어안고
앞으로 나아가려는
결심만으로도 충분하다

상실을 안고 살아가자.


문득, 하루키가 전한 이 메시지가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말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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