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애매한데 유쾌한 어떤 모임 이야기

설명은 못 해도 웃음은 남는 사람들

by Helen

“어떤 모임인데요?”


지인들과 합정동에서 모임을 갖기로 했는데, 장소가 고민이었다. 마침 그 동네에 사는 후배가 있어서 장소 추천을 부탁했더니 바로 돌아온 질문. "어떤 모임인데요?" 당연한 질문인데 답하기는 쉽지 않다. ‘하… 이 모임을 뭐라고 불러야 하지?’


멤버는 세명이다. 남자 하나, 여자 둘.(편의상 남자는 P, 나 아닌 다른 여자는 B라고 부르겠다.) 같은 학교 출신도 아니고 직장 동료인 적도 없다. 일로 얽힌 적이 딱 한 번 있기는 하지만, 이해관계라고 부를 만한 것도 없다. 굳이 공통점을 찾자면 다들 교육 업계 언저리에 발을 담그고 있다는 정도일까.


처음 P를 알게 된 것은 지인의 소개였다. 소개해 준 사람의 말에 따르면 그 당시 P는 본업 외에 처음으로 강의라는 걸 하게 되었는데 교육을 잘 몰라서 배우고 싶어 한다는 것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늘 한가로운 나는 잘난 척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싶어서 흔쾌히 오케이를 했고, P는 산 넘고 물 건너 내가 사는 일산까지 찾아왔었다.


초면이었는데 이상하게 어색하지 않았다. 카페 구석자리에 앉아 세 시간을 신나게 떠들었고 P는 가끔 필기를 하면서 진지하게 경청했다. 그날 P는 미리 준비해서 가져온 선물을 내게 건네주고 돌아갔다. 뜻밖의 선물이라 '앗!'하고 당황하면서도 기분이 좋았다. 그 후로도 P는 종종 연락을 해왔고, 나는 업계 최신 정보며 교육 기법을 최대한 ‘잘난 척 모드’로 풀어주곤 했다. P는 그때마다 내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으면서 어떨 때는 스타벅스 카드를 주기도 하고 어떨 때는 너무 귀한 이야기를 들었다면서 현금으로 성의를 표하기도 했다. 남의 머릿속 지식을 당연한 듯 공짜로 쓰려는 사람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P의 행동은 꽤나 신선했고 고마웠다.


그러던 어느 날, P가 “프로그램에서 보조강사가 필요한데 혹시 가능하냐”라고 물어왔다. 역시나 한가로웠던 나는 좋은 알바 자리라고 생각하고 P가 알려준 곳으로 갔는데, 그곳에는 또 다른 보조강사 B가 있었다. P의 말에 따르면 원래 모 컨설팅회사에 다니다가 얼마 전 퇴사를 하고 지금 잠시 쉬는 중이고 B가 회사에서 일할 때 P를 강사로 초빙한 적이 있다고 했다. 나는 대문자 I라서 아무리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내도 쉽게 친해지지 않는 타입인데 이상하게 세명의 호흡은 척척 맞아 들어갔다.그날 집으로 돌아오는 지하철에서 피식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던 기억이 난다.


며칠 뒤, 늘 감사표시에 진심인 P가 그날 보조강사를 해준 것에 대한 답례로 나와 B를 호텔 레스토랑에 초대했다. 보조강사였지만 박하지 않은 정도의 강사료를 받았기 때문에 굳이 호텔 식사까지 얻어먹을 일은 아니었지만 P는 늘 그런 식이다. 아슬아슬하게 부담스럽지 않은 정도에서 감동적인 보상을 한다. 아무튼, 그때부터 지금까지 우리는 1년에 한두 번씩 모여 밥을 먹고 근황을 나누는 모임을 갖고 있다. 남들에게는 뭐라고 설명하기 어려운 그 모임은 대체로 나와 B가 수다를 떨면 P는 묵묵히 듣고, 모임이 파할 때쯤에는 P가 밥값을 결제한다.


결정적으로 이 모임이 특별해진 건, P가 자신의 세컨드 하우스가 있는 제주도로 나와 B를 초대했을 때였다. 때마침 ‘제주 당일치기 여행’에 꽂혀 있어서 혼자서라도 훌쩍 떠나볼까 하던 나는 바로 초대를 수락했다. 그 사이 주 4일제 근무를 하는 훌륭한 회사에 재취직한 B도 금요일이라면 본인도 가능하다고 했다. 나는 쓸모없어서 골칫거리였던 마일리지로 바로 첫 비행기를 예매했다. 예매 정보를 공유하자 B도 같은 비행기를 예매했다.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고 모든 것이 일사천리였다. 그렇게 우리의 당일치기 제주도 여행이 성사되었다.


제주에서 만난 P는 완벽한 가이드였다. 숨은 명소와 맛집 안내, 운전, 결제, 사진 촬영까지 다 도맡았다. 당일치기라고 믿기 힘들 만큼 알찬 하루를 보내고 뿌듯한 마음으로 마지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늦은 밤 김포공항에 도착했을 때, 핸드폰 전원을 켜자마자 P가 보내준 사진이 카톡으로 쏟아져 들어왔는데, 하나같이 놀라울 정도의 인생샷이었다.


P와 B는 바빴는지 한동안 소식이 뜸했다. (나만 여전히 한가롭다.) 그러다 내 책 출간을 계기로 다시 연락이 닿았다. 합정동의 작은 이탈리안 식당에서 피자와 와인을 앞에 두고, B는 회사에서 있었던 속상한 일을 털어놓았고, 나는 책을 쓰게 된 이야기를 나누었다. 건강을 위해 러닝에 빠진 P의 근황도 들었다.


모임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우리의 첫 만남 때 그랬던 것처럼 피식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도 그럴 것이 그날 우리는 두 번째 제주도 당일치기 여행을 결의하고야 말았기 때문이다. 그때는 봄이었고 이번에는 가을이다. 늦가을 제주 오름에서 맞게 될 거센 바람, 그 짜릿한 소름돋움이 벌써부터 내 가슴을 뒤흔든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화장실 앞, 작은 도서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