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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향을 지킬 결심

by Helen

[매거진 : 가난한 프리랜서의 소심한 사치생활]


오랜 직장생활에 종지부를 찍고 퇴사를 결심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사람은 희선 언니였다.


희선 언니는 내가 대학 졸업 후 처음 입사했던 회사의 경리부서 직원이었다. 나보다 두 살 연상이고, 고등학교 졸업 후 바로 취업해 출납 업무를 전담하던 베테랑이었다. 특별히 친하게 지낸 사이는 아니었다. 그런데도 퇴사를 앞두고 언니가 떠올랐던 건, 언니가 회사를 나가게 되었을 때 내게 해준 이야기가 오랫동안 마음에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언니의 퇴사는 자의가 아니었다. 그 시절엔 나이 많은 고졸 사원이 회사에게는 애물단지였다. 더 싼 인건비로 대체할 수 있는 인원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언니는 오랫동안 눈치를 받았고, 결국 회사의 노골적인 압박에 못 이겨 퇴사를 결심했다.


언니는 저렴한 인건비를 받으며 새로 입사할 후임자를 위해 인수인계를 준비하는 데에만 6개월을 썼다. 그만큼 언니가 하던 일은 방대했고, 오로지 언니만이 아는 일이었다. 무엇보다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었다. 근속기간도 길고 무척이나 알뜰해서 지방이지만 본인 명의의 아파트를 가지고 있다는 소문이 있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안심이 되면서도, 그 나이에 회사를 나가서 다음엔 뭘 하려는 걸까 궁금했었다.


그날 어떻게 이야기가 시작됐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여사원 휴게실에서 단둘이 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던 기억은 또렷하다. 퇴사 준비는 잘 되는지, 나가면 뭘 할 건지 같은 형식적인 말을 주고받다가 문득 언니가 씁쓰레한 미소를 지으며 건넨 한마디가 지금까지도 잊히지 않는다.


내가 스위트콘을 정말 좋아하거든.
그 왜 통조림에 들어 있는 옥수수 말이야.
회사 그만둔다고 생각하고 나서 마트에 갔는데,
나도 모르게 몇십 원 더 싼 걸 집고 있더라.


결혼만 현실인가, 퇴사도 현실이다. 그때 나는 한창 성과를 내며 인정받고 있었고, 퇴사는 남의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도 언니의 이야기는 너무나 실감 나게 들렸고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매달 따박따박 입금되던 급여가 사라지면,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무엇을 포기해야 하고, 또 무엇을 포기할 수 없을까. 그때 처음으로 그런 생각을 했다.


언니가 떠난 후에도 나는 꽤 오래 그 회사를 다녔다. 그 뒤로 한 번 이직했지만 이직한 회사의 새로운 조직문화에 잘 적응하지 못했다. 그 와중에 회사는 구조조정에 들어갔고, 남의 일 같았던 퇴사 압박이 들어왔다. 어차피 회사가 계속 데려갈 생각이 없다면, 고연령·고직급·고연봉 직원을 내보내는 게 가장 쉬운 인건비 절감책이다. 희선 언니와 나누었던 대화가 다시 떠올랐다.


타의에 의해 회사를 떠날 때는, 대부분 ‘그다음’을 정하지 못한 채 나가게 된다. 최소 몇 달, 길게는 몇 년 동안 고정 수입 없이 지내야 한다. 그래서 그 몇 달, 몇 년을 어떻게 버틸지 냉정하게 계산해야 한다. 지금 가진 돈과 생활 습관을 저울질해야 하는 상황에 맞닥뜨리게 되는 것이다.


엑셀로 정리해 둔 금전출납부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별생각 없이 가입했던 적금, 저축성 보험, 연금보험 등을 하나씩 확인했다. 납입금 조정이 가능한 건 줄이고, 필요 없는 건 해지했다. 보험설계사를 만나 세부 내역을 점검하고 해지할 것과 새로 들어야 하는 것을 정리했다. 특별한 감정은 거의 들지 않았다. 그냥 일하듯 처리했다. 그럴 때는 현실을 빨리 인정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어쩌면 저축보다 소비를 줄이는 게 먼저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원래 돈을 잘 안 쓰는 편이다. 명품에도 관심이 없고,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보는지도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의 『월든』이나 헬렌 니어링의 『소박한 밥상』을 좋아하는 걸 보면, 사치는 나와 거리가 먼 단어다. 그래서 애초에 줄일 소비가 거의 없었다. 어차피 수입이 줄면, 소비는 자연스럽게 줄어든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나도 희선 언니처럼 마트에서 물건을 골라잡을 때 단 몇백 원, 몇십 원 차이로 선택을 바꾸게 될 것이었다.


다만 마트 선반 앞에 서서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고 있는 내 모습을 상상하는 것은 조금 슬프게 느껴졌다. 돈 때문에 나의 취향을 버려야 하는 순간이 온다면, 그때 나는 어떤 기분일까. 덤덤할까. 속상할까. 아니면 비참할까. 불안감은 오래된 친구처럼 내 곁을 지켰다.


직장생활을 마치고 프리랜서가 되었다. 말이 프리랜서지, 반쯤은 백수다. 수입은 줄었고 일정하지 않다. 처음에는 어색했지만, 연예인들이랑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좀 낫다. 필요한 걸 살 때 전보다 오래 고민하는데 생각보다 불행하지 않다. 불행하기는커녕 직장생활을 했을 때보다 지금이 더 행복하다. 장담한다.


돈을 번다는 것, 돈을 쓴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많이 벌고 많이 써야 돌아간다는 자본주의는 나와 잘 맞지 않는다고 늘 생각했다. 실제로 적게 벌고 적게 쓰며 살아보니 그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 돈이 돌아가야 유지되는 자본주의 사회에 큰 기여를 못하는 것 같아 미안하지만 그렇다고 악착같이 돈을 벌어 쓸데없는 물건을 사서 집을 채울 생각은 추호도 없다.


포기하지 못하는 몇 가지만 지키면 충분하다.


없으면 조금 슬플 것 같거나, 별것 아니지만 하면 행복이 크게 느껴지는 것들이다. 앞으로 내가 쓸 이야기들을 보면서 누군가는 생각할지도 모른다. ‘이게 왜 사치지?’ 그렇다면, 당신은 이미 중산층 이상일 가능성이 높다. 또 어떤 이는 ‘이 사람, 가난한 거 맞아?’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럴 일은 별로 없겠지만, 혹시 그렇다면 이렇게 말하고 싶다. 그 작은 것을 얻으려고, 나는 다른 것들을 꽤 많이 포기하고 있다고. 굳이 구질구질하게 다 쓰지 않을 뿐이다.


이 글을 쓰다 보니 오래전 영화 소개 프로그램에서 봤던 <소공녀>(2018)라는 영화가 생각난다. 주인공 미소는 가난하게 살지만, 양주와 담배만은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 월세를 감당할 수 없게 되자 양주값과 담배값과 월세값를 비교해 보고는, 결국 방을 빼고 친구 집을 전전한다. 나는 그녀처럼 무모하지도 않고, 무엇보다 술담배를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를 나이게 하는 자기만의 취향을 지키며 사는 그녀의 선택을 지지하고 왠지 닮아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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